[음성 설교] 

 

열왕기하 6:32-7:2 어찌 더 기다리리오! 2010. 6. 23

 

32 그 때에 엘리사가 그의 집에 앉아 있고 장로들이 그와 함께 앉아 있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33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1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기도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다림이 세상에 있습니까? 정치 이야기 아니면 스포츠 이야기뿐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우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라는 말이 텔레비전에서 나옵니까? 신문에서 나옵니까? 신문에서 아주 가끔 이단들의 광고로 나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피식 웃으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립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마라나타를 부르짖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교회마저 세상을 닮아버렸기에 교회도 주님의 종말론적인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자끄 엘륄이라는 사람이 ‘잊혀진 소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과 단절된 현상과 징조로 닫힌 세상, 비합리의 폭발, 뒤바뀜, 가치들의 변질, 말의 죽음, 마법으로의 회귀, 경멸, 의심, 조롱들과 같은 세상에서의 현상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의 징조로서 교회의 평범함과 메마름, 세상에 대한 추종, 교회 제도 등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 적용해 봅시다. 평범하고 메마름이 없습니까? 세상에 대한 추종이 없습니까? 제도로서 유지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다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단절된 상황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늘 본문의 배경을 봅니다. 6:24-29절입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서 사마리아를 에워쌉니다. 사마리아는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요새로서 쉽게 공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군대로 포위하고 있으면 굶주려 항복하게 하는 작전이 유리한 것입니다. 아람 사람들이 성을 포위하고 있으니 성안에는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게 됩니다. 그러니 물가는 어마어마하게 올라서 평소에 부정하다고 먹지도 아니하는 나귀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 나가고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이 은 다섯 세겔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갑니다. 한 여인이 왕에게 외치며 도와달라고 합니다. 왕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무엇으로 돕겠느냐고 합니다. 타작마당이나 포도주 틀로 도울 수가 있겠느냐고 합니다. 이어서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한 여인이 다른 여인을 고소합니다. 이 여인이 네 아들을 내어 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고 하여 자기 아들을 삶아먹었는데 이튿날에 이 여인의 아들을 내어 놓으라고 하니 숨기고서 내어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신명기 28:15절입니다.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 저주 중의 하나가 53절입니다. “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적에게 에워싸여 굶주림으로 자기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고 한 이 저주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왕 때에 임한 것입니다. 아하시야도 그 아버지처럼 악을 행한 것입니다.

 

여인의 이 말을 들은 왕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참담함이겠지요! 그러면 왕이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어떻게 하는지 봅시다. 열왕기하 7:30절입니다. 자기 옷을 찢으니 그의 속살에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굵은 베옷은 슬픔을 표하고 회개를 할 때에 입는 것입니다. 왕이 굵은 베옷을 입고 짐짓 회개의 모습을 보였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31절을 봅니다.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라고 자기 저주의 맹세를 합니다.

 

이런 맹세는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이세벨도 이런 저주를 합니다. 열왕기상 19:2절입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고 신들의 이름으로 저주의 맹세를 합니다.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되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기 저주의 맹세는 가장 강력한 증오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자기 저주의 맹세로 엘리야와 엘리사를 죽이려고 합니다.

 

왕이 속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것은 형식일 뿐입니다.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런 재앙이 일어난 것을 엘리사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선포는 회개하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을 행할 것이라고 하였기에 이런 재앙이 일어난 것을 엘리사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군사를 보냅니다.

 

32-33절을 봅니다. 그 때에 엘리사가 그의 집에 있고 장로들이 그와 함께 앉아있습니다. 이들은 엘리사의 말을 들으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때 왕이 자기 처소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사자들이 오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배려고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니 문을 닫고 그 사자를 문안에 들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 사자가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겠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왕의 말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왕이 자기 딴에는 굵은 베옷까지 입었는데 적들은 물러가지 않고 성은 에워싸여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삶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하나님을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몰아간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지자도 잡아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 왕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구원의 소식은 없고 더 악화되는 이런 지경에서 더 이상 어떻게 여호와를 기다리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이 시대를 봅니다. 세계 곳곳에는 굶주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그것도 동족이 사는 가까운 북한에서 그런 소문들이 있습니다. 이런대도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닙니까? 더 이상 어떻게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반면에 남한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과 단절된 징조들이 교회에 어떻게 나타난다고 하였습니까? 세상에 대한 추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많은 한국의 실상은 예수님의 재림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원하고 있습니다. 경제력의 발달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어제 6.25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여기에 간증자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왔습니다. 부시와 평화가 연결이 됩니까? 이라크에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며 전 세계에 전쟁의 공포를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기도회에 초청한 교회들을 보면서 저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여호와를 기다리기보다 강력한 미국의 힘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평화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하시야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세상을 보아도 교회를 보아도 이렇게 답답한 일들만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정말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런 절망의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파기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 미련하여 보이고 나약해 보일 것입니다. 아무른 대책이 없어 보입니다. 아무른 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선지자인 것입니다.

 

7:1-2절을 봅니다. 엘리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 스아는 약 한말에 해당되는 양입니다. 먹을 것도 없는 나귀 머리 하나가 은 80세겔을 한 것을 비교해보면 정말 하늘에서 창고가 열려 곡식이 쏟아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엘리사가 말하기를 네가 눈으로 보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20절입니다. 이때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성안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난 것입니다. 성안에서 먹을 것을 던져주어야 먹고 사는 신세인데 성안이 굶어죽는 지경에 나누어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 있어도 굶어죽을 것이고 성안에 들어가도 굶을 죽을 것인데 차라리 아람군대에 항복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살려주면 살 것이고 죽이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아람 군대의 진영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가 모든 군량미와 무기와 말들까지 그대로 두고 도망간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고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다 도망간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하는 가사가 생각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나환자들이 장막에 들어가 먹고 마시고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또 감추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인데 우리가 침묵하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라고 하며 왕궁에 가서 알리자고 합니다. 성읍 문지기에게 사실대로 말합니다. 문지기들이 왕궁에 있는 사람들에 말합니다. 그러자 적들이 굶주린 것을 알고 일부러 진영을 비워두고 매복하여 있다가 공격할지도 모르니 정탐을 보내자고 합니다. 그래서 성 중에 남아있는 말 다섯 마리와 병거를 준비하여 정탐을 하러 가보니 급히 도망가느라 길에 버린 의복과 병기가 가득한 것입니다. 이들이 돌아와 왕에게 보고하자 성문을 열고 나가서 노략하여 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왕이 그이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는데 성 밖의 진에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굶주린 백성들이 밀려나가니 그 틈에 그 장관은 밟혀죽은 것입니다. 이 장관은 하늘에서 창이 열린들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말한 대로 눈으로 보기는 하였지만 먹지는 못하리라는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여 있다면 왕이나 이 장관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도 믿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이 왕과 장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까? 지금까지 기다려왔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이 있느냐면 돌아서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이 대속을 하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원수를 그의 발등상 되도록 온 세상을 다스리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승리하신 분이 곧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종말론적인 성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그 내용들이 세상에 대한 추종이기에 실제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 사람들이 저주받은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하늘의 소식을 전하러 오신 분이 저주받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분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소망의 말씀이 됩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고 살기 바랍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