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예레미야 51:33~44 타작마당 2015. 4. 15

 

3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1)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35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복하여 그의 바다를 말리며 그의 샘을 말리리니 37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 38 그들이 다 젊은 사자 같이 소리 지르며 새끼 사자 같이 으르렁거리며 39 열정이 일어날 때에 내가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0 내가 그들을 끌어내려서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게 하리라

 

지난주에 바벨론을 멸망의 산이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변 나라들과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는 산이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그 교만이 드러남으로 멸망하게 되는 산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멸망의 산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한 것임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언약과 이러한 언약이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문자대로 현재의 팔레스타인 땅에 적용하면 안 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1~18절입니다. “봉독 이 본문은 자주 말씀을 드린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몇 구절만 봅니다. 3절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의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새 언약이 완성이 되었는데 아직도 옛 언약으로 전한다면 그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구약이든 신약이든 율법의 조문으로 읽는다는 것은 아직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가야 그 수건이 벗겨지고 새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밝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주의 영으로 인한 참된 자유가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새 언약 시대의 복과 저주의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6: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마라나타! 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성도를 사랑하는 자이며 성도를 핍박하는 자는 주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감옥에 가두며 핍박할 때에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습니다(22:7).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영이 임한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영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다면 그것이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의 영이 임한 성도를 사랑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33절을 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지난주 마지막 구절입니다. 멸망의 산 바벨론을 이제 멸망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이 멸망되는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것을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 본문으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딸 바벨론은, 사람이 그것을 밟아 굳혔을 때의 타작마당과 같도다(박동현주석)”

 

이스라엘의 곡식타작은 밀과 보리와 같은 밭작물입니다. 이러한 곡물을 타작을 하려면 먼저 타작마당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저도 시골출신이라서 이런 타작마당은 좀 압니다. 논과 밭에 보리를 심어 추수할 때면 제일먼저 타작마당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논이나 밭의 평평한 한 부분의 곡식을 먼저 배고 나서 그곳의 그루터기를 뽑습니다. 그리고 발로 꼭꼭 밟습니다. 그렇게 단단해진 땅에 보리나 밀을 가져다 놓고 도리깨로 때려서 추수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을 타작마당으로 만드신다는 말씀은 타작마당을 발로 밟아 만들 듯이 적들이 쳐들어와서 바벨론을 타작마당 밟듯이 다 밟아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타작마당을 만들고 나서 본격적인 추수를 합니다. 그러면 바벨론이 타작마당에 모아진 곡식더미처럼 털려지는 것입니다.

 

본문 34~35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이 멸망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이 말씀이 바벨론의 멸망 이유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란 이스라엘을 말하기에 다른 번역에서는 우리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먹고 멸하여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켰다고 합니다. 뱀은 사냥물을 통째로 삼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폭행과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나가 이제 시온의 주님이 말하는 것이 됩니다.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바벨론이 시온을 공격하여 피를 흘린 것은 시온 백성들이 잘못하여 징계하기 위한 도구가 되지만 바벨론이 시온 백성을 공격하면서 그들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들의 교만은 시온을 공격하면서 시온의 하나님보다 자신들이 높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작마당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19절입니다. 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냐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은 이방 신들을 섬겼기에 이방인들의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신들을 섬긴 것은 이방의 나라들이 크고 강하였기에 그들도 크고 강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의 신들을 섬긴 결과 나라가 크고 강하여지기는커녕 나라가 오히려 망하게 되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벨론 유수라고 합니다. 유수(幽囚)란 잡아가둔다는 뜻입니다. 시온의 거민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 있는 것을 바벨론 유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벨론에 잡혀가는 것은 바벨론의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신만 섬긴 것이 아니라 크고 강하다고 여기는 애굽과 앗수르의 신들도 섬긴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세상 나라들의 모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크고 강한 나라, 크고 강한 회사, 크고 강한 교회입니다. 회사나 국가나 교회들이 크고 강한 것들을 바라면서 벤치마킹을 하는 것이 시온의 백성들이 이방의 신들을 흠모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갇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크고 강함을 비판하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1973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이 책은 경제문제를 다룬 내용입니다. 세계 경제가 크고 강한 것을 추구하면서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고 아름다운 것이란 인간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경제를 말합니다. 이러한 경제는 빈부의 격차를 줄이며 서로 상생하는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영향들로 인하여 이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매가 처치를 비판하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작은 교회 운동들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도시는 슬로 시티를 기치로 걸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결국은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체제들입니다. 그러므로 크고 강함으로 나가든 작고 아름답게 나가든 이 모든 것들이 다 바벨론의 정신 곧 바벨론 유수의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 잡혀있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본문 36~37절입니다. “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복하여 그의 바다를 말리며 그의 샘을 말리리니 37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바벨론이 믿고 있는 것은 그들의 강입니다. 그들의 바다와 강을 말리신다고 하신 말씀을 그들의 강을 바다로 표현한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하듯이 많은 물을 바다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던 물 근원인 샘을 말려버리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것은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 웅덩이는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예레미야 2: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한 것이 바벨론이라면 바벨론이 터진 웅덩입니다. 그러므로 그 샘물의 근원을 말리신다는 말씀은 그들이 의지하고 바라던 세상의 힘을 말려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8:5~6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남 유다 의 아하스 왕이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을 때에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버리고 강대국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앗수르가 거대한 홍수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세상의 힘을 요청하였기에 그것이 심판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물이 목에 까지 차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남 유다든 북 이스라엘이든 이런 모습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갇힌 모습 곧 바벨론 유수의 모습니다. 지금 온 세상이 바벨론 유수입니다.

 

노회 안에 어느 목사님이 시집을 한권 보냈습니다. 이 분이 사시는 곳이 남해의 벽련입니다. 벽련은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이기도 합니다. 이 시를 보고 나서 문자로 독후감을 보냈습니다. ‘이 땅 유배지 아닌 곳이 없지만 옛날의 유배지가 바쁜 세상의 쉼터가 되군요! 유배지 밧모섬에서 하늘이 열리듯 벽련에서 이미 십자가로 완성된 하늘이 열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이 땅에 유배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바벨론 유수입니다. 이 바벨론 유수지에서 빠져나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미 타작마당이 마련되었고 그곳에 추수하기 위하여 곡식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나올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의 감옥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영광이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탈출시키시기 위하여 미리 타작을 하십니다.

 

미가서 4:1~5절입니다. “1 끝 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2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3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5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끝 날에 여호와의 전의 산 곧 시온 산이 우뚝 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의 예루살렘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전하여진 복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오는 자들이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기에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한다고 합니다.

 

미가서 4:6~10절입니다. 봉독 미리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발을 저는 자며 환난 당한 자들입니다. 발을 저는 자의 모습이 야곱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는 자들은 바벨론까지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포함이 됩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는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이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들은 심판받을 바벨론에서 미리 심판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자들입니다.

미가서 4:11~13절입니다. “봉독 이방 사람들이 시온을 치면서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이 더럽게 되고 이방 나라에 의하여 망하게 되는 것을 통하여 계획하신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고 망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이 침을 당하여 더럽힘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죄를 범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언약을 위하여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타작하십니다.

 

본문 38~40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이미 타작마당이 준비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아직 그들이 망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젊은 사자 같이 소리를 지르며 새끼 사자 같이 으르렁거립니다. 그들의 열정이 아직 일어납니다. 이런 모습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 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연회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이 연회를 이들에게 심판과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시는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잔치로 인하여 그들의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벨론을 타작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타작을 누가 이루어 내십니까?

 

마태복음 3:11~12절입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 타작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추수하시는 것입니다. 추수란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이미 2천 년 전부터 추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추수란 성령을 보내심으로 추수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기 죄를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런 추수가 일어나는 자들은 자신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고 그곳에서 빠져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빠져 나오는 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처럼 저는 모습, 맹인, 잉태한자, 해산하는 여인의 모습처럼 자기 힘으로 올수 없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미련하고 약하고 천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추수당한 자들입니다. 이렇게 추수당한 자들은 다시는 바벨론을 의지할 수가 없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됨을 믿고 살게 됩니다(고전1:30).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