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욥기 1:1~5 욥이라 불리는 사람 2015. 12. 23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3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4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오늘부터 욥기를 보겠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욥에 대하여 한 두 번의 설교를 들어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욥이 엄청난 환난을 당하였지만 원망을 하지 않고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신이도 하나님이라고 하는 불굴의 믿음으로 결국 나중에 배나 복을 받았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나중에 배나 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그 사랑하는 자녀가 한꺼번에 다 죽는 고통을 통하여 배나 많은 재산을 받으면 무엇을 합니까? 환난을 당하기 전에도 이미 욥은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이런 욥은 신앙도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환난을 주시지 않아야 더 복된 것이 아닙니까?

 

저도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지옥이 무서워서 열심히 다녔습니다만 교회에서 배운 이야기는 소년 소녀 위인전기의 내용과 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위인전기는 대학생들이 농활을 와서 마을문고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책 한권 읽을 것이 없을 때에 호롱불 밑에서나 소를 먹이면서 폭풍흡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은 고진감래, 권선징악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성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들어보니 단어만 조금씩 다를 뿐 내용상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위인전에 없는 죄와 벌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결국 내 하기 나름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 때에 주경야독을 하면서 코피를 쏟아가며 노력을 해도 세상에서 복을 받고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마다 내가 좀 더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면서 더욱 열심히 노력을 하였습니다.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면서 노력을 하였는데 나중에 병까지 들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물론 성경의 인물들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의 또래들과 비교를 해 보면 더 착하게 살고 더 힘들게 노력하였지만 계속하여 힘든 상황만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고난과 복에 대하여 성경도 보고 여러 가지 책들도 보면서 조금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대부분의 설교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을 받는다고 말을 합니다. 노골적으로 하든지 좀 더 세련되게 하든지의 차이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하나님을 잘 못 섬기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스님도 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이 일산의 성당에서 일산 시민을 위한 강연을 하는 시간에 어느 목사 사모가 질문한 내용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 사모가 스님께 질문한 내용이 자신의 남편이 유학을 위한 장학생으로 뽑혔는데 선발 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유학하고 귀국하여 교수 후보 일등이었는데 인맥에 밀리고, 시골교회 5년째에 장로 권사가 내쫓고, 시어머니는 자기에게 악담을 퍼붓고 화풀이한다고 하면서 너무 힘들어 가끔을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스님에게 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약하면 이 스님이 어려서 교회도 다녔고 성경도 많이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는 말씀을 자신이 고문을 당하면서 경험한 내용을 통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답변이 지금 그 고난이라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간다면 참으로 바르게 가는 길이기에 복된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모의 관점을 세상의 대형교회와 목회 성공하였다는 관점으로 보지 말고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관점으로 보면 아주 복된 길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에 대하여서도 나에게 무엇을 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합니다. 공손한 말로 하지만 그것은 압박인데 기도를 들어주면 내가 잘 해 줄 것인데 기도들어주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식의 협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가 은혜 받은 자임을 안다면 감사기도 외에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전체 이야기 중에 비판할 내용이 없지 않지만 많은 목사보다 나은 설교를 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욥기를 보기 전에 서론에 해당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선악과를 물고 나온 자들입니다. 이미 아담의 허리에 속한 모든 인류가 선악과를 함께 따 먹은 공범들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내가 신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스님의 이야기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어떻게 관점을 바꾸느냐로 대답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에 달린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만이 선악을 결정하셔야 하는데 선악과 이후의 인간들은 만사를 내가 결정해야 하고 내가 선악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기에 세상만사를 인과응보로 봅니다. 신도 내 하기 나름이라는 식의 생각들이 우리 안에 이미 장착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성경을 보기에 성경을 통하여 나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성경에 투사시켜 나의 뜻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관점들을 산산이 부수는 내용이 욥기서입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합니다. 우선 이 욥에 대한 정보를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욥이 사는 시대는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로 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처럼 그의 삶의 형태가 족장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는 지역은 우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우스라고 나오는 것은 요단강 동편으로 봅니다(4:31). 그리고 욥에 대한 성경의 인용을 한 곳 봅니다.

 

에스겔 14:14,20절입니다. “14 비록 노아, 다니엘, ,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신다고 결정하셨다면 그곳에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 사람도 자기의 자녀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에스겔 선지자가 경건한 사람으로 인용한 세 명 중의 한 사람이 욥입니다.

 

런데 이 욥의 경건이 어느 정도 입니까? 본문 1절에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경견하였으면 이런 표현을 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경건함으로 사는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겉으로 보기에는 욥의 이러한 복은 욥의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결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욥기가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은 아들이 일곱이며 딸이 셋입니다. 이러한 숫자는 성경에서 다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숫자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재산이 얼마인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시면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시대의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자가 인색하거나 포악함으로 부자가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행동이 어떤지 다음절에서 봅니다.

 

본문 4~5절을 봅니다. 그의 아들들이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누이 세 명도 함께 청하여 먹고 마신 것입니다. 삶의 여유가 없으면 생일이고 무슨 기념이고 간에 챙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요한 집안의 자녀들이기에 생일에 돌아가면서 잔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합니다. 그 성결하게 함이란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혹이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한 것입니다.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욥의 경건입니다.

 

우리가 욥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오늘 이 말씀만 읽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셨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잔치를 하고 나서 혹 마음으로라도 죄를 범하였을까 하여 번제를 드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욥에 대하여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까지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 욥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욥의 친구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욥기서 37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욥기 38장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게 말씀하시는데 욥은 회개하기에 이릅니다. 욥이 원하는 답도 욥의 친구들이 원하는 답도 우리가 원하는 답도 없습니다. 물론 끝에 욥이 배나 복을 받았다는 말씀이 있지만 앞에서 본 대로 배나 주시기보다 현재의 것들을 망하지 않게 하시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욥기를 보려면 고난에 대한 문제를 성경이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 먹은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우리의 선악의 잣대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 중에 대표적인 말씀들이 시편 37편과 시편 73편과 하박국서와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종종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요약하면 어떻게 공의로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시편 73편을 욥기 서론으로 봅니다. 욥기도 앞부분과 뒷부분 일부만 산문이고 나머지는 다 시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 731~2절입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편 기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 욥도 그 마음이 정결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욥도 욥의 친구들도 알지 못하는 욥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에 대하여 모두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도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악인 형통함과 의인의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투하였다고 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봅니다.

 

4~12절입니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이것이 악한 자가 누리는 형통한 모습입니다. 여기서 대한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13~16절입니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악인의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다면 의인으로 살기 위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손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항의입니다. 오히려 의롭게 살려고 할수록 재난과 징벌을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심한 고통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성소에서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해결이 되었다는 것은 성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해결이 될 수도 있고 기도 중에 그 뜻을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깨닫고 나서는 자신이 참으로 무지한 짐승과 같았음을 알고 하늘과 땅에서 주님만 사모할 분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의인의 고난을 보고서 주님이 없다고 하면서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임을 알게 됩니다.

 

시편 73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지만 욥기서는 이보다 더 어렵습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습니다. 갑자기 닥친 재앙에 대하여 지금 우리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만 직접 당하고 있는 욥은 이런 재앙이 왜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때 욥과 욥의 친구들이 이 고난에 대한 논쟁이 무려 37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드디어 38장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욥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설명하여 주시지도 않고 까마귀 새끼가 배고파 울 때에 누가 먹이를 주느냐고 물으시고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묻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욥은 자신이 억울하다고 악악거린 자신에 대하여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회개할 뿐입니다. 이것이 고난에 대하여 해석하고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이런 답변이 시원하십니까? 더 답답하게 여겨지십니까? 아마 더 답답해지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라고 하는 원망이 나올 것입니다.

 

시편 901~6절을 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인생이 땅의 티끌임을 언제 알 수 있습니까? 고난 가운데서 알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여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알고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주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자신이 땅의 티끌이며 우리의 일생이 천년이 된다고 할지라도 주의 목전에는 밤의 한 순간 같은 것입니다. 인생은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처럼 자라다가 저녁에서는 시드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본 욥과 같이 형통하면 결코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알지 못합니다.

 

7~12절입니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우리의 일평생이 이러함을 알게 되는 것은 고난이 아니고서는 알지 못합니다. 늙고 병들고 고난을 통하여 죽음에 직면하게 되어야 자신의 날 계수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유도 모르고 고난을 당한 욥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에 자신의 원망과 하나님께 따지고 싶었던 모든 말들은 다 날아 가버리고 땅의 티끌 가운데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욥기서 42:1~6절입니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에 대하여 욥의 마음에 딱 떨어지도록 답변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모든 질문을 거두어들인다고 합니다. 자신이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악악대면서 하나님께 대 들었던 모든 질문을 거두어 들일뿐 아니라 내가 스스로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한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욥이 알아먹은 한 가지는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뵙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욥의 결론입니다. 이러한 욥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그림자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선지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5:7~11절입니다.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주께서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언제 우리가 참게 됩니까? 만사가 내 뜻대로 될 때에 참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농부들이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우리보고도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주의 강림이 가깝다고 합니다. 그런데 힘들고 어려우면 서로 원망하기 마련입니다. 욥도 처음에 원망을 하지 않았지만 고난을 당할 때에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이런 원망이 나올 때에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신다는 것을 알라고 합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이미를 사용합니다. 이미 심판 주가 문고리를 잡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강림과 심판을 믿으신다면 인내하라고 하면서 욥의 예를 듭니다.

 

그런데 욥이 인내한 것이 있습니까? 욥기서 3장부터 욥은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위로하려고 찾아온 친구들이 온갖 인과응보적인 논리로 공격합니다. 이런 공격에 욥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인과율적인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공격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것을 저는 욥의 인내로 봅니다. 그 결론은 하나님은 결국 욥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욥의 인내로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은혜로 믿게 되는데 이런 자들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처럼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욥의 고난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만 인간의 모든 인과율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함을 입은 성도라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고난이 필수 코스입니다. 고난이 없다는 분도 간혹 있습니다만 우리가 다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이러한 것들에 직면할 때에 더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알고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는 자가 주의 백성입니다. 이런 자들의 동일한 고백은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자신의 일하심으로 주님 자신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된다는 고백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