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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3:1~5 잉태한 이의 방으로 2020. 1. 15      (찬송 397장)

 

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3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의 사랑이야기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화자는 술람미이며 배경은 꿈속입니다. 새 번역에서는 이 단락의 제목을 아름다운 꿈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분을 그리워하기에 꿈에서도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가지고 솔로몬이 어떻게 술람미의 꿈속의 이야기를 아는가 하고 질문을 한다면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아가서는 솔로몬이 저자입니다. 솔로몬은 이 사랑의 이야기를 통하여 모든 성경이 증거 하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오늘 공개상담 란에 창조의 목적에 대한 질문에 이러한 예로 답변을 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소설이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은 그 목적을 이미 가지고 소설을 쓰거나 드라마를 만듭니다. 소설이나 드라마 작가가 그 작품을 이끌어 나갈 때에 수많은 퍼즐들을 맞추어 나가는 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작가의 목적을 다 알지 못하기에 전개방식에 불평불만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을 다 알고 나서도 그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하여 호불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하드라마로 보라고 하였습니다. 무려 1500년에 걸쳐서 40여명의 저자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그 주인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왔고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11:36, 1:16). 이러함에도 사람들은 원망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보라고 올린 내용이 빌립보서 2장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타락한 이후로는 모든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기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사람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자기 자신은 결코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난 그 사랑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기에 다른 것을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이 믿는다는 말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여기서 밤이라는 단어가 원어로는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밤마다 찾았다는 말도 되지만 밤새도록 찾았다는 말이 됩니다.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다고 합니다. 마음으로라는 단어가 네페쉬입니다.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갈망하는 인간인데 타락하고 나니 썩어질 것만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을 갈망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러한 복음에 대한 갈망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도 꿈에 대하여 말들을 많이 합니다. 제 나름대로 꿈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낮에 우리가 활동하는 것을 의식적인 활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낮에 체면 차린다고, 또는 먹고 사느라고 드러내지 못하고 꾹꾹 눌러 놓은 생각들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면 의식이 느슨해져서 무의식 층에 있던 것들이 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서 일종의 치료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언가 간절하게 생각을 하면 꿈에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꿈에 나타나지만 그 꿈속에서 내가 꿈을 조절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서 원하는 것이 보이다가 사라지면 막 소리도 지르고 울기도 하고 좋으면 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꿈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전달방식으로의 꿈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꿈이나 환상이나 천사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으로, 역사로, 시와 지혜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 곧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서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1:1~2).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우리가 성경을 구약 시대 사람보다 더 풍성하고 더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그 사랑을 아가서에서 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사랑하는 임을 찾아 성안을 돌아다닙니다. 거리에서 큰 길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만나지 못합니다.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습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는 너희가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아무른 대답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성경해석자들이 이 순찰 자를 교역자로 말합니다. 문장은 생략되어 있어도 순찰 자가 그 신랑을 가르쳐 주었기에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났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순찰하는 자가 아무른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별 보탬이 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아가서 5:7절입니다.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5장의 배경은 자는 중에 신랑의 음성을 듣고 잠시 지체하는 사이에 신랑이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찾아 나섰다가 순찰 하는 자들에게 맞아서 상처를 입습니다. 파수하는 자들이 겉옷을 벗겨갔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임을 만나는 것은 갈망하여 찾아 나서게 되지만 만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4:1~3절입니다.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5~7절입니다. “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세대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을 주께서 돌이켜 주셔야만 야곱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듯이 술람미를 신랑이 만나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사랑하는 임을 찾아 예루살렘 성안에서 찾아 해매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길거리를 다니다가 순찰 하는 자를 만나서 물어봐도 대답도 없습니다. 이들이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교역자라면 이들을 지나쳐야 사랑하는 임을 만나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를 듣는 분들에게도 종종 말씀을 드립니다. 사람의 설교에 머물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나쳐 가야 합니다. 지나쳐 가야 진짜 사랑하는 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5:1절입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찾는다고 열심히 찾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날 것이라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찾아 나선 하나님은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이었기에 진짜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여기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아가서의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도 방금 시편과 이사야 두 곳을 찾아본 내용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예루살렘에 수많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을 버려두고 술람미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외적인 조건을 갖춘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희고 고운 자들입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한 자이며 더러운 자입니다. 그런 자에게 솔로몬이 나타나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내 이름을 부르지 않던 자들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방인이었는데 주님이 이렇게 찾아오십니다.

 

다시 본문 4절을 봅니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순찰 자들도 모르는 그 사랑하는 임을 이 여인이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임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찾아서 만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임이 그 여인에게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를 찾고 싶은 갈망을 주신 분도 그분입니다. 오셔서 사랑한다고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찾아서는 어디로 갑니까?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방은 자기가 태어난 방입니다. 그 은밀한 곳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4:67절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이삭이 아내를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라를 데리고 옵니다. 이삭도 리브가도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결혼을 합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인다는 것은 부부가 된다는 뜻이지만 이것은 단지 부부됨을 의미하기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이어짐입니다. 이삭을 통하여 야곱이 나오고, 유다가 나오고, 다윗이 나오고, 솔로몬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어머니가 잉태한 방으로 데리고 간 것은 합방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말합니다.

 

우선 솔로몬의 근원을 봅니다.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자식입니다. 다윗이 간음을 하고 나니 밧세바가 임신을 합니다. 알리바이를 위하여 우리아에게 특별휴가를 명하였지만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이튿날에 어주(御酒)를 내려 잔뜩 먹였는데도 막사에 누워 잡니다. 하는 수 없어서 비밀편지를 군대장관에게 보냅니다. 그것도 우리아의 손에 들려 보내어 결국 죽이고 맙니다. 간음하고 살인하여 태어난 첫째 자식이 죽습니다. 자식이 죽기 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습니다. 처음에 자기 죄를 모릅니다. 결국 자기 죄를 알고 회개한 것입니다.

 

시편 51:5절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다윗의 아버지 이새와 그 어머니도 죄인이기에 죄 중에서 자신이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모태 죄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러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러한 죄인인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처음 자식이 죽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자식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의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어주셨는데 여디디야입니다(삼하12:25).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그 사랑이 술람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입니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3)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하갈과 사라를 통하여 율법과 복음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갈과 시내산과 땅의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복음은 사라와 하늘의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을 듣고 자유 함을 얻었는데 다시 율법 선생들의 말에 흔들리고 있기에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왜 오늘 본문과 연결시키는지는 바로 앞에서 솔로몬의 잉태하는 내용에서 그 조상 이삭에게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죄 가운데 태어난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그 주님을 자기의 가장 깊은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내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 누구도 알 수 없는 그 깊은 마음의 중심에 십자가 지신 그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기꺼이 이 누추한 곳에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나타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에서 깨어나기를 원하지 않고 그곳에서 머물기를 원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음을 아는 자들은 그 어떤 세상의 것들에게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수많은 여우들이 도전하여도 내가 받은 그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믿기에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