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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1:15~17 비둘기 같은 눈    2019. 2. 11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지난주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나도 향에 비하고 남자를 몰약으로 말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서로가 주고받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신분의 차이가 엄청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신분의 차이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모태솔로라서 이런 사랑의 느낌을 잘 모른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보면 됩니다.

 

베드로전서 1:7~9절입니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비록 육적인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단지 사랑의 감정만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영혼의 구원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1:1~4절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1)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영원한 생명을 보고 증거 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태초부터 있었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고 합니다. 2천 년 전에 기록된 이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들음은 사도들과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도 그 시대의 사람과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는 사랑은 남녀노소 신분과 상관없는 참된 사랑의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봅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남자가 여자의 눈을 보고서 비둘기의 눈 같다고 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한 것입니다. 여자의 눈이 비둘기 전체와 같다고 하였지만 비둘기의 눈도 전체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비둘기 눈에 대하여 조금 말씀드립니다. 201310월에 비둘기가 교회당 안 화분위에 알을 두 개 낳고 품었습니다. 부화하여 성체가 되어 날아가기까지 약 50일 걸렸는데 제가 비둘기 눈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청년 때에 비둘기의 눈동자는 좌우상하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까이서 살펴보니 정말로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물을 보려면 목을 움직여서 사물을 봅니다. 사람처럼 눈동자를 좌우상하로 움직이지는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특징을 가지고 신부된 교회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만 바라봐야 한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먼저 아가서에서 나오는 비둘기에 대한 내용을 읽어만 보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아가 2:12절입니다.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이 본문을 볼 때에 다시 보기로 하고 비둘기에 대한 내용만 보겠습니다.

 

아가 2:14절입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가 4:1절입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아가 5:2절입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가 5:12절입니다.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아가 6:9절입니다.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사랑하는 연인을 비둘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창세기에서 비둘기를 봅니다.

 

창세기 8:8~12절입니다.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성경에서 최초로 비둘기가 등장하는 곳은 노아홍수 때입니다. 비가 그치고 산봉우리가 드러나자 노아는 창을 열고 까마귀를 먼저 보냅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20년 전에 창세기 설교할 때에 까마귀는 사체위에 앉을 수 있으니 그것을 먹으면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둘기는 그런 것을 먹지 못하니 접족(接足)할 곳을 찾지 못하여 돌아왔다고 합니다. 칠일을 기다린 후에 다시 보내니 저녁때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로 온 것입니다. 다시 칠일 후에 보내니 돌아오지 않음으로 물이 빠진 것을 알았습니다. 비둘기가 전령이 됩니다.

 

예레미야 8:7절을 봅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학과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지 않는 다는 책망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들보다 못하다는 책망을 하기에 여기서는 지혜로운 비둘기로 말합니다.

 

호세아 7:11~12절입니다. “1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12 그들이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회중에 들려 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예레미야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어리석은 비둘기라고 합니다. 비둘기가 전서구(傳書鳩)로 사용되기에 전시에 도움을 요청하면 도움을 주려고 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이나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어리석은 비둘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를 잡듯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신다고 합니다. 징계하시는 목적은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징계하여 다른 길로 간 이스라엘을 돌이키십니다.

 

호세아 11:8~11절입니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애굽으로 앗수르로 도움을 요청하러 갔던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여 내심으로 그곳에서 새 같이 비둘기 같이 떨면서 오게 하여 그 집에 머물게 하신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눈을 맞추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애굽으로 앗수르로 도움을 요청하러 갔지만 아무른 도움을 얻지 못하고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망한 그들을 그대로 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불이 붙는 것 같아서 그들을 다시 돌이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오는 자의 모습을 떨며 오는 비둘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84:1~5절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다가 망한 자들이 주의 돌보심을 입어 다시 주님의 제단으로 돌아오는 것을 참새와 제비로 말합니다. 비둘기는 없지만 연약한 새의 모습으로 주께 돌아와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17절입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성경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로 비유된 비둘기가 어떻게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비둘기로 표현된 술람미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침상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이며 잣나무 서까래라고 합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왕궁을 백향목으로 짓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짓는 성전도 백향목과 잣나무로 짓습니다. 백향목과 잣나무를 수입하여 성전을 짓는데 이 나무는 향기가 좋고 오래가는 나무라서 아주 귀한 재목입니다. 이러한 집에서 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번역은 푸른 초원을 침상으로 산의 백향목을 들보로 산의 잣나무를 서까래로 여긴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번역도 좋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임과 함께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천국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는 이유는 이 세상 살기에 힘이 들어 도피처로 천국을 사모한다면 아직 천국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천국의 환경이 좋다고 하여도 사랑하는 임이 그곳에 없다면 그곳은 외롭고 쓸쓸한 곳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랑이 신부를 향하여 네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하면서 백향목과 잣나무 집에 살자고 합니다. 이 집이 왕궁이든 성전이든 들판이든 광야이든 간에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성부 성자 성령께서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11~12절입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1)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1)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증거 합니다. 이 말씀은 구원과 심판을 집행하실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증언 후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마태복음 3:16~17절입니다. “16 예수께서 1)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2)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로서 소리가 나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합니다. 저는 이 장면과 노아홍수 후에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온 것과 연결이 된다고 봅니다. 이뿐 아니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세례가 노아 때의 물로 심판 받는 것과도 연결합니다(벧전3:20~22). 노아 홍수 때의 심판이 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예수님의 세례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노아 홍수 때에 심판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시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 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처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가 성전이 됩니다(고전3:16, 6:19). 이렇게 성전이 된 성도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21:1,2). 새 예루살렘은 건물이 아니라 어린 양의 신부라고 합니다(21:9,10).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구속한 신부를 보고 어떻게 부르시겠습니까? 내 사랑아 나의 어여쁜 신부야 네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랑을 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비록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나 그런 과정 속에서도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주님만 바라봅니다.

 

시편 123편입니다.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그리스도의 신부들은 주님만 바라보게 만들어 내십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하여서 신부의 눈에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만 보이게 만들어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신랑이 자기 목숨을 바쳐 확증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신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