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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4:10~14 내 마음을 누가 알까?   2017. 7. 19

 

10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13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14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

 

잠언에서 우리말로 마음이라는 단어가 95회가 나옵니다. 성경전체에서는 천 번이 넘게 나옵니다. 그동안 잠언에서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 설교했습니다. 한 번은 잠언 3장에서 네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이었고 또 한 번은 잠언 4장에서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을 볼 때에 국어사전적 의미도 보았고 성경의 용례도 살펴보았습니다. 간단하게 한 번 더 요약하면 사람의 마음이란 의식, 감정, 생각 따위의 정신적인 작용의 총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는 힘으로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단어의 용례는 심중, , 콧김, 가슴, 감동, 간담, 결심, 생각, 진심, 기력, 관념, 인심, 심장, 염통, 한마음, 성심, 전심, , 충심, 총명, 지혜, 지식, 의사, 생각, 명철, 지각, 굳센 자, 말하다, 간곡하다, 낙심하다. 염려하다. 깨닫다, 간교하다. 살피다. 기억하다 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지 그래서 마음공부라는 말도 하고 마음 수련을 한다는 말도 합니다. 왜 이렇게 마음에 대하여 여러 의미들이 있고 마음을 공부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합니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전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로 모르는지 상담학을 전공한 사람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은 눈과 귀로 정보가 뇌로 전달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정보로 저장되는 것이 얼마나 극소수 인지 나는 당신을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표현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봅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한 줄로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고통을 자기만이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당신의 고통을 이해한다거나 안다고 하면 정작 본인은 화가 나는 것입니다. 네가 뭘 알고 내 마음의 고통을 안다고 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욥기에서는 위로하려고 온 자들이 오히려 재난을 주는 위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즐거운 일인데 상대방은 전혀 즐거워하지 않는 일들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답답해합니다.

 

11절입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한다고 합니다. 집이라는 개념은 한 집안을 말하기도 하고 그 집안의 모든 식구들을 포함하는 말도 됩니다. 악한 자가 겉으로 보기에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결국은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의 집은 결국은 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이 세상에서 늘 그렇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욥기와 시편을 통하여 이미 살펴본 대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성경을 통하여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11절의 말씀은 12절과 연결하여 봐야 합니다. 어떤 길이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畢竟)은 사망의 길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볼 때에 누가 봐도 바른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국이 사망의 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신앙의 명문가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집안이 신앙의 명문가라는 말을 듣는 집안이라고 하여도 그 결국에는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속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볼 때에 저주를 받은 집안으로 보여도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을 우리도 사용합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 슬픔이 가득한 것입니다. 저도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년 때에 공부하느라 독서실에 좀 있었습니다. 그때에 나이가 몇 살 적은 후배들이 저에게 말하기를 형님은 웃고 있지만 그 안에 슬픔이 보인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제가 여러모로 힘든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웃음에도 슬픔이 묻어난 모양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이 놀라운 것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도 잘 모르는데 이렇게 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결국 사람의 행위로 보응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굽은 자라고합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아무리 자기 행위가 옳다고 주장하여도 그 마음이 굽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진리라고 하여도 배척합니다. 마음이 굽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제 방에 피사의 탑을 똑 바르게 그리고 옆의 건물들은 기울어지게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주보를 그리는 한성훈 화백이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의도는 자신이 바르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 틀린 것으로 본다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가 틀려도 옳다고 주장 하겠지만 마음이 바른 사람이라면 자기의 행위가 틀렸음을 인정합니다. 마음이 굽은 자와 대비되는 단어가 선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바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굽은 자와 마음이 바른 자가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자신의 행위가 굽은 줄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행위가 굽은 줄을 알면 회개하겠지만 굽은 줄을 모르면 회개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전체에서 마음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을 통하여서도 대략을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때와 다른 관점에서 마음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왜 부부라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흔히 부부를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합니다. 부부만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마음과 뜻이 같을 때에 이런 말을 씁니다. 노사 관계도 하나가 되자고 이런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글자의 원 뜻대로 보면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타락하기 전에 아담이 하와를 부를 때에 내 뼈 중에 뼈며 내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으니 한 몸입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음으로 타락합니다. 타락한 결과 일심동체가 되지 못하고 서로 핑계를 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자기의 마음을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납니다. 둘 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바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 주지 않습니다. 가인이 안색이 변합니다. 아벨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하시면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미움과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여 살인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이후의 인간은 결코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다스릴 수 없다고 인정하고 나의 마음을 맡아서 다스려 달라고 창조주께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선악과의 유혹 속에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내용이 들어있기에 결코 자기의 마음을 맡아서 주장하여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며 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악한 마음을 먹지 않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의 착함이나 선한 마음이라는 것도 결국 자기중심적이기에 보편적인 인간이 선이라고 하는 것도 악할 뿐입니다.

 

노아홍수 직전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6:5).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한 상황설명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결혼하는 것을 두고 말씀합니다. 타락이후에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이 모습이 그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이 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홍수로 심판을 합니다. 홍수로 심판하고 나서도 성경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8:21). 이런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노아처럼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은혜를 입으면 죄와 심판을 알기에 방주를 예비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죄를 알기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잠언서 4: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우리의 마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인과 노아 시대를 통하여 살펴본 대로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28:26).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17:9). 그런데 사람이 이런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도 알지 못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선악의 판단은 결국 자기 마음에 좋은 것을 선으로 보기에 타인에게 악이라도 자기에게 이익이면 선으로 봅니다.

 

열왕기상 8:37~39절입니다. “37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막론하고 38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지난주 오후에 역대하에서 솔로몬의 기도를 통하여 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재앙이 일어날 때에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이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재앙이 와도 그것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에게 간구하거나 세상의 다른 힘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미사여구나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을 똑 바로 차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나의 선악판단의 구조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청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무너뜨리시고 새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에스겔 36:23~27절입니다.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1)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2)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아무리 선지자를 통하여 돌아오라고 해도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몸에 할례를 행하여도 마음에 할례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한다고 재를 뒤집어쓰고 옷을 찢어도 마음을 찢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거짓 선지자들은 종교의식을 행하면서 재물을 많이 바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나라가 망하게 되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상태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언약을 따라 이들을 돌이켜 주신다고 합니다. 돌이켜 주시는 것은 맑은 물을 뿌려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숭배에서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정결하게 하는 과정중의 하나가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새 영을 주신다는 것은 새 언약의 결과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 영이 임하게 되면 새로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새 영이 임하여 새로운 마음이 되면 우리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합니다. 돌과 같은 딱딱한 마음이 살과 같이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결국 새 영이 부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책망을 받고 그 책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전하자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새 영을 부어주시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결론은 자기 죄를 알기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스가랴서 12:10절입니다.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1)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면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잃어버리고 애통하듯 할 것이라고 합니다.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를 바라보고는 곧 나를 바라보고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이 찌른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손에 찔림을 당한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알게 되는 자들이 새 영이 임하여 새 마음이 주어진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새 마음을 받았습니까? 새 마음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어떤 죄인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지킴의 의로운 것들이 그 앞에서 배설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그 어떠한 죄라도 그 십자가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새 영이 임하고 새 마음이 된 자들은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들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고후5:17).

 

사도행전 15:7~8절입니다.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성령 곧 새 영을 부어주시면 믿음으로 마음이 깨끗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임을 알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발한 교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초대교회 때에 히브리 파 과부와 헬라 파 과부 사이에 차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기 위하여 집사를 세워서 구제의 일을 하게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는 온갖 문제들이 다 생깁니다. 같은 복음을 들어놓고도 파당이 생깁니다.

 

고린도전서 1:10~17절입니다.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1)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같은 복음을 듣고도 파당이 생긴 것입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베드로 파, 심지어 그리스도 파까지 파당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 바울사도가 하는 말이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는 말로 교통정리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는 자들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드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취향을 따른 죄악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파라고 하는 자들은 인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드는 그들이 꼴 보기 싫다고 그리스도 파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도 파당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은 세례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온갖 수사적인 말이나 지식이나 철학으로 십자가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가 사람들의 이론으로 헛되지 않게 하려고 두렵고 떨림으로 십자가를 전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1~8절입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새 영을 받아 새 마음이 되어도 우리는 아직 옛 사람 안에 살고 있기에 온갖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한 말씀 곧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이런 말씀 앞에 우리의 입이 다물어 지는 사람이 새 영이 임하고 새 마음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일들이 어떤 것입니까? 죄를 짓고 세상에 속하여 살아갈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 사랑,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 자비와 같을 일을 할 때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볼 때에 성령의 열매입니다. 선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할 때에도 다툼과 허영과 교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거듭나고 새 영이 임하고 새 마음을 가진 자들인데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언제까지 이런 일들이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우리의 몸이 죽을 때 까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두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육체의 법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이든 이방인의 양심이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육체의 소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의 소욕은 우리가 완전히 죽어야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을 때 까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복종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아무른 소망도 없음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라는 것이 쓸데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나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영외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만이 하나님의 깊은 속을 아십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새 마음이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죄가 어떠함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합니다. 또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라면 서로 마음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이 한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내 마음을 몰라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