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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5:13~24 마음의 즐거움과 근심 2017. 9. 5

 

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14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15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19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21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 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 22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24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

 

사람들은 근심이 없이 즐겁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근심거리가 생기니 인생을 즐겁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근심거리를 없애기 위하여 많이 노력을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에 우리의 근심거리는 거의 대부분이 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국민이나 간에 경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떤 드라마에서 돈이란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해결하지 못하는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지만 우울하여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부자 가운데 많습니다. 오히려 가난하였다면 먹고 살기 바빠서 우울할 틈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도서 5:12절입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가난한 노동자는 잠을 달게 자지만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한다고 합니다. 부자가 그 부요함으로 인하여 왜 잠을 잘 못 잘까요? 너무 많이 먹어 소화가 안 될 수도 있고, 자기 부를 계속 더 늘리고 지키려니 잠을 자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석꾼은 천 가지의 걱정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의 걱정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세상의 재미가 없어서 잠이 안 오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즐거움과 근심이란 우리의 환경이 다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그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속에 기쁨이 있으면 얼굴에 기쁨이 나타납니다. 속에 분노와 슬픔이 있으면 그 얼굴에 나타납니다. 물론 외식하는 자나 사기꾼들은 이것을 잘 속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마음의 즐거움이나 근심이 얼굴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외적인 조건으로 우리의 즐거움을 만들어 낼 수가 없기에 우리의 마음의 즐거움이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외적인 조건은 우리가 어느 정도 노력을 할 수가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는 반발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을 이 주제와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14절입니다.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지만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긴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즐거움이 나옵니다. 미련한 자가 미련한 것을 즐긴다고 합니다. 미련한 것을 다른 번역에서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합니다. 미련한 자는 어리석은 것을 즐거워하지만 명철한 자는 지식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즐거워하고 있는지를 보시면 내가 미련한 자인지 명철한 자인지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잠언에서 명철한 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철한 자의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는 여호와 경외가 아니라 자기를 경외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조차 나를 즐겁게 해주면 섬겨주겠다는 것이 타락한 이후의 모든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 경외가 즐거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미련한 자가 어리석은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15절입니다.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합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지금 나의 날이 다 험악한가? 항상 즐거운 잔치를 하는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죽을 지경이다. 죽지 못하여 산다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늘 즐겁습니다. 내 마음은 항상 잔치를 하면서 산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보는 늘 즐겁다고 하면서 조롱도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그 날을 험악하게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날마다 마음이 즐거워 잔치하는 자가 누구인지 구약에서 살펴보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야곱은 그 일평생이 험악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고생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는 이름의 나사로는 평생 거지로 살다가 죽었는데 지옥에 간 부자는 늘 호화롭게 잔치하였습니다.

 

다시 이 말씀을 보면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지만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한다는 이 말씀을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고난과 잔치를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날마다 잔치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뒤집어 생각해 봅시다. 평소의 마음이 얼마나 허하였으면 많은 사람을 불러서 잔치를 하였겠습니까? 그 잔치에 온 사람들이 주인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한 것이 아님을 주인도 알 것입니다. 그러니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허전하고 괴로웠을까요? 그러니 다시 더 멋진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잔치가 아니라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 즐거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환경과 상관없이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즐거움이란 환경을 넘어서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저는 가난한 시골 소작농의 아들이라서 어려서부터 이런 말씀들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웃에 살던 집이 우리보다는 조금 형편이 나은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툭하면 그 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고 그 친척들끼리도 원수처럼 으르렁 거리며 싸우는 것을 보았을 때에 참된 행복이란 재산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알았습니다. 다른 집들도 그랬습니다. 무언가 재산이 좀 있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채소를 먹는 것이 비싼 음식이 되었습니다만 옛날에는 고기를 먹는 것이 정말 귀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산이 적어서 채소를 먹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하여 크게 부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자들의 마음에는 쉼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분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합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들은 왜 그렇습니까? 자기 안에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불평불만에 사로잡혀 살기에 외부의 조그마한 자극에도 분이 폭발함으로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란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안식과 만족과 사랑이 있으면 노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식탁으로 살아가도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니 서로 미워하며 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라고 합니다. 게으른 자는 이런 저런 핑계를 됩니다. 심지어 길에 사자가 있다고 하면서 나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면 그 길이 가시 울타리처럼 되지만 정직한 자의 길은 길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정직한 자를 부지런한 자로 바꾸어도 됩니다. 이것은 단지 농사짓는 일에 게으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부지런하지만 여호와 경외에 게으른 것도 적용해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경외라는 것이 종교적인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더 알기 원하고 더 친밀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부지런함이란 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것과 같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길이 가시 울타리처럼 될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긴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세상의 교훈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만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기에 이 관계를 하나님 아버지를 즐겁게 하는 것과 업신여기는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즐겁게 하는 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데 미련한 자는 자기만을 즐겁게 하려고 살아가는 자가 됩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평안히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이 쌓아둔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 혼자 스스로 잘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은 모습니다.

 

21절입니다.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 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합니다. 지금까지의 잠언의 내용이나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이 말씀을 보면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 합니다. 미련한 것이란 결국 자기를 즐겁게 하려고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합니다. 그 길을 바르게 한다는 말씀은 자기를 즐겁게 하려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인생의 즐거움이지만 타락한 인생들은 어느 누구도 이렇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는 이런 즐거움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22절입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혜를 잘 받아들이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다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 살아가기에 자기의 지략이 최고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망하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의논이나 지략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사람의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만 마음이 낮추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경영도 지혜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23절입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사람이 서로 대화를 할 때에 나와 같은 의미의 대답이 상대방에게 나올 때에 참으로 기쁨입니다. 때에 맞는 말이란 어떤 때에든지 적절한 말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들은 때에 맞는 말을 잘 못합니다. 위로한다는 말이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적절하게 맞는 말이 나오는 것은 기쁨입니다. 같은 방향성으로 가진 자라고 만나보았는데 다른 말이 나오면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사람에게서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참으로 기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한 성령, 한 믿음, 한 세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24절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만으로 지혜로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 정리해 봅니다. 즐거운 마음, 명철한 사람의 마음, 재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가난해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 성을 더디 내는 사람, 부지런한 사람, 지혜로운 아들, 명철한 사람, 조언을 받아들이는 자, 적절한 대답을 하는 자, 이러한 자들이 슬기로운 자들이며 이들은 생명의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자들은 스올의 길을 가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위로 향하는 생명의 길로 걸어가는 자가 아니라 아래에 있는 스올의 길을 걸어가는 자라는 말입니다. 바로 앞에서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만 이제 스올로 가는 자의 모습이 어떤지 다시 봅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 미련한 것을 즐김, 크게 부하며 번뇌하는 자, 서로 미워하는 자, 분을 쉽게 내는 자, 게으른 자,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 적절한 대답을 못하는 자, 이런 모습이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길은 스올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자기를 정직하게 말씀 앞에 세워볼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라서 끊임없이 자기를 좋게 포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에 좋은 편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려고 하고 악한 것은 전부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자가 스올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러한 본성대로 내 버려두면 모두가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이런 모습을 뒤집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도 삶도 환경도 뒤집어 져야만 생명의 길이 보입니다.

 

기쁨이라는 이름의 나오미의 생애를 보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어려움을 면하고 살기 위하여 모압으로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두 아들도 죽고 과부만 세 명 남았습니다. 이때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룻만 끝까지 따라옵니다.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때 나오미가 하는 말이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로 부르라고 합니다.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태어났을 때에 부모는 기쁨이라고 이름을 지었겠지만 나오미의 삶은 라마를 통하여 비로소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과 보아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안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마라가 나오미가 된 것입니다. 그 아들의 씨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품에 안으려면 그동안 내가 즐거워하고 내가 기뻐하면서 나를 위하여 잔치하면서 살아가려고 하였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무너져 내릴 때에 비로소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는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참된 즐거움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영으로 오신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이 없다면 우리는 늘 자기의 즐거움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6:1~11절입니다.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1)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2)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잠언 본문의 내용이 시편 16편에 다 녹아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윗이 쫓겨 다닙니다. 장인인 사울 왕이 죽이려고 할 때에 도망 다니면서 내가 주께 피한다고 합니다. 주님 밖에 나의 복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께 피하는 자는 내가 만든 그 어떤 것도 피난처가 되지 못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피하여 온 자들은 여호와의 교훈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오른편에 계신다고 합니다. 오른 편은 구원의 자리이기에 내가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고 생명의 길을 보이시는데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내가 즐거워하는 것들이 무너지게 되고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안에 채워지는 과정이 성도의 길입니다. 이런 자들 안에는 그 마음에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마음의 즐거움에 대한 말씀을 보았으니 이제 마음의 근심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안에 근심이 두 종류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의 근심이 있습니다. 세상의 근심이란 어떻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까를 근심하기에 이런 근심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하여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케 하는 회개를 이룹니다. 바울사도의 책망을 받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한 결과는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인하여 바울사도는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6:6~10절입니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세상의 근심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자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부자가 되면 마음의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려고 할수록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의 근심으로 인하여 사람이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세상의 근심이란 다 이런 방향입니다. 이들은 마음의 즐거움이 없습니다. 육신적인 쾌락들은 잠시 누릴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더 큰 쾌락을 추구하기에 결국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9절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 안에 어떤 즐거움과 어떤 근심이 있습니까? 세상 근심은 멸망에 이르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 거듭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에게로 버림을 받아서 우리와 연합되어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이제부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썩어지고 더럽혀 지고 낡아지는 것들은 우리에게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잠간 근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망하는 길이 아닌지 잠시 근심하게 되지만 이러한 연단을 통하여 없어지지 아니할 믿음의 세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내려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구원받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