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15 피의 호소 2009. 11. 18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어제 노회에서 총신신대원 방문의 날이어서 갔다 왔습니다. 도서관 일층에 문소 박물관이 마련되어 둘러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교회 주보가 있는데 예배 전에 국민의례로 궁성요배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제의 압박으로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기에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총회에서 통과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후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욕할 정도가 아니라 지금은 궁성요배보다 더한 우상숭배가 교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모습이 기도회라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수능을 앞두고는 수능을 위한 기도회를 한다고 절이나 교회에서 경쟁적으로 기도회를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모이는 날도 수요기도회입니다. 과연 우리가 수요기도회로 모여서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성경에서 기도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기도에 대한 주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호소, 간구, 부르짖음, 기도와 같은 주제들이 어떤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오늘 첫 번째로 보고자 하는 내용은 아벨과 가인을 보면서 기도가 무엇이지를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창세기 4장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은 이미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상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범죄 한 인간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하여 쫓아내시고 천사들이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스스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차단된 상태입니다. 어떤 제물이나 어떤 기도도 하나님께서 들으실 의무나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가인과 아벨이 각자의 노동의 산물을 하나님께 제물을 삼아 드립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기에 농산물을 드리고 아벨은 목축을 하였기에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물을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을 합니다. 가인은 곡식이라서 받아주지 않았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라서 받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누구의 제물도 받아주실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 둘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아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를 통하여 보여주실 계시의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한 자라고 합니다. 그 예물이란 양을 잡아서 기름을 구별하여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증거를 얻은 것이 바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벨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아벨이 알았든지 몰랐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심을 통하여 계시를 보여주시는 것인데 아벨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벨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었을 때에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아버지께서 알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을 받아주셨다는 것은 대신 희생을 통하여 죄인을 받아주심을 보여주신 계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까? 5절입니다.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왜 아우 아벨의 제물은 받아주시고 나의 제물을 받아 주지 않는가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죄인의 제물이나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지지 않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것입니다(사1:15;59:2, 요9:31).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받아진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이며 가인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함은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이런 마음이 들겠습니까? 평소에 나보다 못하다고 여긴 자가 나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당장 우리의 안색도 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노선은 가인의 노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이렇게 모여서 기도를 하는데 누구의 기도는 받아들여지고 누구의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습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영화로 만든 것을 보니 아벨의 제물 태우는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가인의 제물 태우는 연기는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퍼져버립니다. 이런 식의 가시적인 모습이 들어나면 그것도 목사 장로 권사의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교회도 잘 나오지도 않는 사람의 기도를 받아주었다면 우리도 안색이 변하여 그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니 몰아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경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하십니다.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받아주시지 않고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정성을 바쳤는데도 왜 하나님은 받아주지 않고 복을 주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 바로 죄가 도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죄의 소원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경고를 받지만 인간은 죄의 소원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벨을 돌려 쳐 죽여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보호하여 주시면 되시는데 왜 그냥 두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아벨이 죽게 하심으로 이 세상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죽이고 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치는 자입니까? 이렇게 발뺌을 합니다. 아담의 후손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의 피의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여 버렸으면 끝난 줄 알았는데 그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기도란 아벨의 피의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자가 이 땅에서 어떤 꼴을 당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는 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세상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피의 소리를 들으시고는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땅이 저주를 받은 모습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땀을 흘리며 경작을 해야 먹고사는데 가인은 땅을 경작하여도 그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죄벌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아벨은 죽어서 피로 호소를 하는데 가인은 자신의 죄벌이 너무 중하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호소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너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너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의인을 죽인 자를 이렇게 보호하시는 것입니까? 악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데 왜 들어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의인의 간구와 악인의 간구를 대비하기 위한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의인은 죽어서 피로 하늘에 호소하고 있지만 가인은 저주를 받았는데 오히려 땅에서 번성하며 성을 쌓고 문명을 이루며 사는 계열이 가인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아벨과 같은 자의 후손들이 땅을 차지하고 성을 건설하고 안전하게 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 대신에 주어진 셋의 계열은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 계열은 성읍을 이루고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창세기 4:16-24절을 봅니다. “봉독” 성을 쌓습니다.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나옵니다.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들의 조상이 나옵니다.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듭니다. 라멕은 자기의 창상을 인하여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는 말이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이 칠 배이나 자기를 죽이는 자는 벌이 칠십칠 배라고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일을 하는 것이 가인의 계열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에 성공한 것을 세상은 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교회에서 조차 이런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3:35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너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선지자를 핍박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의인들의 피를 흘린 자들의 후손인 너희가 그 의인들이 증거 한 나마저 죽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 땅에서는 피의 호소가 하늘로 향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9-11절입니다. “봉독” 창세기에서 아벨의 피의 호소로 시작한 이 세상의 역사는 요한 계시록에 역시 순교한 자들의 피의 호소로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아직도 그 수가 남아있기에 흰 옷을 입고 잠시 동안 쉬라고 합니다. 그 수가 다 채워지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이 어떤 심판입니까? 12-17절입니다. “봉독”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엄청난 심판입니다. 이것은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의 진노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요일 모여서 기도를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기도여야 합니까? 가인과 같은 자기 삶의 안정을 자기가 지키는 방식을 원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사실 가인도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사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5절에서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악인은 이 은혜를 모르지만 의인은 압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사람은 무슨 기도의 소리를 듣겠습니까? 땅에서 호소하는 의인의 피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 하다가 흘린 피가 호소하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의 피 값을 신원하여 주실 것입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런 기도의 소리가 들리는 사람입니다. 이상하게 들으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 증거 하는 죽임 당한 어린 양의 피 소리가 들리는 사람이 기도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