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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23-25 부르짖는 소리 2010. 1. 6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사람이 언제 부르짖습니까? 정말 다급하면 부르짖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부르짖을 일이 있습니까? 부르짖을 일도 없는데 수요기도회에 왜 나오신 것입니까? 정말 부르짖을 일이 있다면 혼자서라도 부르짖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르짖어 기도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니 내가 부르짖어 기도할 내용들이 영 아니다 싶어서 아마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면 날마다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부르짖을 일이 없다는 것은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아가기에 부르짖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모퉁이 돌 선교회 대표인 이삭 목사는 북한을 보고서 그렇게 눈물이 난답니다. 그래서 북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이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더 많이 가지지 못하여 울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탄식하며 울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역이 가중되니 탄식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고된 노동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백성을 돌보셨다고 합니다. 이런 고역의 가중됨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1-7절을 봅니다. “봉독”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온 자손들 70명이 애굽에 들어가서 살게 됩니다. 애굽에 들어간 지 약 400년이 되었습니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었을 때는 그들이 평안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도 죽고 요셉을 아는 애굽의 왕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났습니다. 계속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지리라고 하셨기에 반드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구가 늘어나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들의 번성을 막아보려고 합니다. 자꾸만 불어나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 적군의 편에 서서 이기게 되면 그들이 애굽에서 나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인구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펼칩니다.

 

그 첫째가 강제노역입니다. 1:11절입니다. “봉독” 강제노역을 시키면 피곤해서 아이 낳을 틈도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12절입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근심이 됩니다. 그래서 더 강한 강제 노역을 시킵니다. 그래도 번성하는 인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가 산파에게 협박하여 사내아이는 죽이고 여자아이는 살리라고 합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애굽 왕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이 두 산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 아기를 살린 것입니다. 바로 왕이 화가 나서 왜 아이를 살려두었느냐고 하니 무엇이라고 합니까? 히브리여인은 애굽 여인과 달라서 산파가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아 버렸다고 합니다. 강제노역을 당하는 여인들이 건강하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여인들은 지배층이라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두 여인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세 번째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세가 태어날 즈음에 있었고 그 전후로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던 법으로 보입니다. 아론이 모세보다 세 살 위인데 살아 있고 또 모세 보다 나이가 적은 자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계속 이어진 것을 보면 잠시만 그런 유아살해 법이 시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된 것도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도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인간의 수단과 강한 법으로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으려고 하여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전능한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모세를 사용하시는데 어떤 방법으로 사용하시는가 하면 모세의 자기 힘과 능력으로 행할 때에는 살인자가 되어 도망가는 신세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양치기로 40년을 보낸 후에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하는 80세가 된 노인을 하나님께서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도하여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이 부르짖는 소리가 여호와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것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잊고 계시다가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니 그제야 기억을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짖게 되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등 따시고 배부르면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여러 가지 고난이 닥치면 우리가 부르짖게 됩니다. 그 부르짖는 것들이 질병으로 부르짖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 못한 고민들로 부르짖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르짖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보니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자들을 보니 시기도 나고 불평도 납니다. 그런데 그런 불평도 하지 말라고 지난주일 오후 시편 37편에서 보았습니다.

 

왜 이런 부르짖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평안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면 결코 부르짖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출애굽 후에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애굽에서 강제노역만 없다면 살아갈만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고기 가마가 좋았다고 광야에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정도의 고통이 가중되어야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에게 주어지는 복인 것입니다.

 

시편 37편과 73편을 통하여 보았습니다만 악인은 평생 고난도 없고, 죽을 때도 평안하게 잘 죽고, 그 재산을 자식에게 끼치고, 그들의 재물을 늘어나고 늘 평안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인은 오히려 고난이 많으니 어떻게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답변이 악인은 지금 그렇게 든든해 보여도 졸지에 멸망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런 부조리한 세상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가 잘못하여 오는 환난만이 아니라 애매한 고난도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부르짖는 일이 일어나고 그래서 언약대로 출애굽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지 무려 400년이 되었을 때에 누가 이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들이 전하여 졌겠지만 까마득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역이 가중되니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이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것입니다. 야곱에 애굽에 내려오도록 하기 위하여 가나안에 흉년이 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떠나야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4대만에 너희 후손이 이곳에 돌아오리라고 하신 대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흉년을 내리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시편에서 보게 됩니다.

 

시편 105편을 봅니다. 1-2절에서 “봉독”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그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8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천 대에 걸쳐 영원히 기억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돌보신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기억하셨기에 이제 그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하여 그 애굽에서 400년이 넘게 살아온 땅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할 정도의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절대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곳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11-23절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어떻게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는지를 말하면서 그런 떠돌이를 하나님이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왕들을 꾸짖으며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을 들게 하시고 그 앞서 요셉을 보내시고 쇠사슬에 매인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고 형들을 만나게 되는 모든 것도 여호와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환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면 이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게 되며 오히려 이 고난 인하여 부르짖고 부르짖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하게 알아가게 되면 그것은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을 통하여 부르짖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24-25절을 봅니다. “24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을 크게 번성하게 하사 그의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또 그 대적들의 마음이 변하게 하여 그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교활하게 행하게 하셨도다” 백성을 번성하게 하는 것도 여호와께서 하십니다. 그 대적들의 마음이 변하여 그의 백성을 미워하고 교활하게 하는 것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고난 중에 부르짖지만 또한 찬양도 하는 것입니다. 이 풍랑 인연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373장 가사 중).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라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거나 교활하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이 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대적하는 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그 언약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일이 없을 때는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부르짖을 일이 있을 때에는 십자가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짖음도 성도에게는 복인 것입니다.

 

로마서 8:15-17절입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부르짖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하여 고난도 받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빼 내시기 위하여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영원한 영광에 참여시키시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탄식하며 그 자유의 날을 사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