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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8:1~22 하나님을 찾으면 2016. 2. 17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기독교 서점에 가면 책과 기독교용품들이 함께 있습니다. 어떤 곳은 책보다 용품의 자리가 더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많은 용품들이 있는데 그 가운에 가장 많은 구절이 방금 읽은 욥기 8:7절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가게에 가보면 가장 많이 보이는 액자나 현판이 욥기 8:7절의 내용입니다. 아마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처음에 미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방의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망했습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망한 욥이 만일 하나님을 찾으면 나중이 창대하리라는 말이 빌닷의 말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말을 우리가 반박할 수가 있습니까? 욥기 8장의 어느 한 절인들 우리가 반박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빌닷의 말을 우리는 타당한 말로 여기기에 욥기 8:7절의 성경구절을 벽에 걸어놓습니다. 그리고는 내 하는 사업이 비록 미약하게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창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시작해도, 교회를 개척하여도 이런 말로 꿈을 꿉니다. 이러한 성경구절을 선물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들 한 마음입니다. 하는 사업이 잘 되어 대박이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구절을 인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탐심을 성경구절로 포장한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처음으로 욥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동안 욥의 재앙을 보고 욥의 탄식과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욥에게 엘리바스가 4~5장에 걸쳐서 욥을 책망합니다. 욥을 책망한 엘리바스의 이론은 인과응보론 입니다. 인과응보만이 아니라 자신이 환상 중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욥을 교훈합니다. 그러자 욥은 6~7장에 걸쳐서 엘리바스를 반박하면서 하나님께 침 삼킬 동안도 놓지 않으시기를 언제까지 하시겠느냐며 탄식을 합니다. 이 모든 말을 들은 빌닷이 이제 자기의 말을 합니다. 네가 어느 때 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 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느냐고 합니다. 전에 번역은 광풍 곧 미친바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빌닷은 욥의 말을 듣고 엘리바스의 말을 들으면서 많이 참았는데 미친 소리 그만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3~4절 새 번역입니다. “3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 4 네 자식들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거나 정의롭지 못한 심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판사들은 잘못된 판단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재판을 틀리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자녀들도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빌닷의 말을 반박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도 공정하고 의로운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도 공정하지 않은 판결에 분노를 합니다.

 

본문 5~7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에 심히 창대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에 우리는 욥이 아니라서 더더욱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우리의 수준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빌닷의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목사가 심방을 와서 빌닷의 이 말로 권면을 하면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십일조와 주일성수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사업하느라고 주일성수를 제대로 못하면 헌금으로 벌충하라는 말도 합니다. 이것이 공의로운 하나님의 계산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을 저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까?

 

아모스 5:4~6절을 봅니다. “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월요일 광주에서 전한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를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이런 곳은 다 제사를 드리던 장소입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이런 곳을 찾았는지 아모스 4:4~5절을 봅니다. “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찾고 있는지 벧엘과 길갈에 가서 아침마다 희생의 제사를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거기다가 수은제와 낙헌제라는 감사의 예물까지 드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지사가 아니라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의 제사나 십일조라는 것은 나를 대신하여 희생하는 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자들은 이러한 희생의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고 각종 감사의 예물까지 드렸으니 이제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자신들이 기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와 목사들이 전하는 내용들이 대부분 이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성공하면서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래야 전도도 잘 되고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십일조와 주일성수 만이 아니라 각양 감사도 해야 하고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찾으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였는데 교회당 건물은 창대하고 온갖 종교 사업은 번성하였지만 과연 그렇게 헌신한 사람은 창대하여졌습니까? 세상의 썩어질 것의 창대함이 아니라 그 영혼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까?

 

본문 8~10절입니다. “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면서 여호와를 찾는 길을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우라고 합니다. 역사와 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쌓여온 인류의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종교적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란 시대의 아들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제한적인 영향아래 있기에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교훈을 받으라고 합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같이 유교적인 영향을 받은 곳에서는 역사와 전통을 더 따집니다. 그래서 군사부일체라고 합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다 역사와 전통을 따라 가르칩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곳에서도 역시 역사와 전통을 말합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는 구교입니까? 개신교입니까? 구교 곧 가톨릭이 틀렸다고 개혁한 교단입니다. 그런데 개혁교단이라고 하는 곳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나누어진 것입니까? 서로가 자신들이 진리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원리는 날마다 개혁한다고 합니다. 늘 개혁되어야 한다면 확정된 진리라는 것이 없다는 반증이 됩니다. 지금 아는 것이 나중에 틀릴 수 있다고 인정을 해야 개혁을 할 것입니다. 이런 개혁교회에서도 성경으로 개혁을 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의 원뜻보다 역사와 전통을 따라 자기들의 주의나 주장에 따르지 않으면 정죄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진리라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진리가 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욥을 공격하는 빌닷은 역사적인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본문 11~19절입니다. “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빌닷은 자연을 이치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형통함과 그렇지 못한 자의 급속한 멸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왕골과 갈대가 진펄이나 물이 있어야 자랍니다. 인과율입니다. 그리고 왕골이나 갈대는 크고 무성하게 자라지만 다른 풀보다 일찍 말라버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이 다 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로 세운 집들도 보존되지 못하는 것이 마치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 같지만 그곳에서 뽑히게 되면 그 자리도 모르게 되고 그 후에 다른 것이 그곳에서 나는 것을 말하면서 욥에게 여호와를 찾으면 급속히 쇠하여 멸망하지 않고 창대하며 영구하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20~22절입니다. “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빌닷의 결론입니다. 지금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죄가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악한 자는 붙들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 돌아오면 웃음이 네 입에 있을 것이며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악인의 장막은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빌닷의 말을 우리가 반박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은 빌닷과 말과 같은 내용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을 봅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말씀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말씀입니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에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만큼이나 액자에 많이 넣어서 벽에 걸어두는 내용입니다. 시편 1편과 오늘 본 욥기 8장의 빌닷의 말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겉으로 보기에 같은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구별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하지만 그렇지 않는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이런 악인들을 심판을 당하고 망하게 되지만 의인은 형통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시편 73편은 어떻습니까? 시편 1편의 말씀대로 살려고 열심히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롭게 살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은 온갖 재앙과 고난을 당합니다. 반면에 악인은 얼마나 형통한지 날마다 소득은 늘어나고 죽을 때에 고통도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고서 실족할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도 결론은 악인은 결국 졸지에 망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73편도 이해가 됩니다. 빌닷의 말이나 시편 1편도 겉으로 보면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닷의 말을 우리가 반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말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렇게만 해석하고 적용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가 없게 됩니다. 자신이 복을 받거나 못 받거나, 영생을 받거나 영벌을 받는 것도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해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엘리바스의 말이나 빌닷의 말이나 소발의 말이 더 일리가 있게 들리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죄인의 후손임을 증언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이 다 이러합니다. 공의와 정의를 말합니다. 성과급을 말합니다. 일한대로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시편 88:1~18절입니다. “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3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 죽은 자 중에 던져진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빌닷의 말과 시편 1편과 73편의 내용이 시편 88편의 내용과 무엇이 다릅니까? 시편 88편은 아무리 부르짖고 간구하여도 여호와의 응답이 없습니다. 정말 죽게 되었다고 탄식을 합니다. 죽어버리면 더 이상 찬송도 할 수 없는데 왜 이렇게 내버려 두시느냐는 탄식입니다. 어려서부터 고난을 당하고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구원하실 지에 대한 염려와 탄식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응답도 소망도 없이 이 시편은 그대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에 들어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런 말씀으로 인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유 없이 고난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죄 없이 죽으시는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유일한 의인의 부르짖음을 끝끝내 외면하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자신이 죄가 되어 죽으신 자리입니다. 이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논리나 정의개념으로 풀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들에게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베드로전서 2:19~20절입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2)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잘못한 이유 없이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번역은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으로 욥을 생각하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말이 각주에 보면 은혜라고 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은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매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십자가의 공로를 아는 것을 아름답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21~25절을 봅니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게 하시려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다는 것은 죄 없이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는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이유 없는 고난이 반드시 닥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 우리가 원수를 갚지 않고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 분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빌닷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면 창대하리라고 하였지만 성경의 결론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