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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1~35 욥의 인내 2016. 2. 24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사람들이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면 사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문제를 처음부터 피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지만 손자병법의 36계중에 마지막이 싸움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전법은 자신이 아주 열세일 경우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 이것이 꼭 최고의 병법이 아님은 그 앞의 병법에서 이미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싸움을 일단 시작해보다가 중간에 포기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은 어떤 사람일까요? 기질상 마지막에 속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까닭 없이 고난당하는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이 말을 하니 응답하라 1988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다 보지는 못했지만 명절연휴에 연속방송을 해서 몇 편을 보았는데 공군사관학교에 간 학생이 수학문제 한 문제가 풀리지 않자 며칠 동안 그 문제만 잡고 늘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르면 포기를 하든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텐데 그 문제만 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제목이 욥의 인내입니다.

 

야고보서 5:10~11절입니다.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욥도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욥이 오래 참고 인내한 것이 무엇입니까? 욥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인내하였기에 나중에 그 결말이 좋았다는 말로 우리는 이해를 합니다. 욥의 인내를 말할 때에 이렇게 말하지 않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이미 욥기 3장부터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엘리바스의 공격에 욥의 원망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빌닷의 공격에도 욥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판장에서 한판 붙고 싶지만 하나님은 너무나 강하고 독단적이라서 나의 이러한 요청도 묵살하는 분이라는 식의 말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기 1장과 2장만 보고 나머지 결론만 말하면서 욥이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서 욥이 인내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인내가 아닙니다. 욥의 인내로 인하여 욥의 결말이 배나 물질적인 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것도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1절에서 고난당하는 자들의 인내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주는 가장 자비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욥이 인내한 그 행위가 보상으로 주어진다면 자비와 긍휼이 아니라 욥이 훌륭하였기에 잃은 것을 배로 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인내는 인과응보적인 공격에 승복하지 않고 인내한 것입니다. 욥이 인내하고 싶어서 인내 한 것도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의 공격은 평소에 자신도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내용이 잘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으로는 자신의 고난이 해석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버틴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하나님께서 욥의 손을 들어주십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욥이 의로웠기에 구원을 받았다는 결론이 아닙니다. 욥도 하나님 앞에서 무조건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내의 결론이 자비와 긍휼로 마감됨으로 주의 자비와 긍휼을 입는 것이 욥의 인내의 결과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의 인내를 통하여 선지자들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면서 오늘날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떤 것을 요구받는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본문 1~4절을 봅니다. “봉독 지난주에 빌닷의 말을 보았습니다. 빌닷의 말을 우리가 논박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서 죄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상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환난을 당하는 욥은 반드시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면 네 시작을 미약하였으니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을 누가 반박하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이미 엘리바스의 말도 들었고 빌닷의 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말하는 그런 지혜와 전통과 교리는 나도 안다고 하는 말이 2절입니다. 그런 말이 나도 사실이라고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말을 요약적으로 말하기를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롭겠느냐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강하신데 누가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 형통할 자가 누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엘리바스나 빌닷을 말을 인정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막상 까닭 없이 이 고난을 당하고 보니 그 지혜와 전통적인 해석들에 의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알고 있는 창조의 지혜를 욥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5~10절입니다. “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이 본문은 8~10절을 먼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8~9절은 하나님 홀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하늘을 펴시고 바다 물결을 밟으셨다고 합니다. 바다 물결은 성경에서 교만과 혼동을 말합니다. 이러한 바다를 발로 밟으셨다는 것은 질서를 부여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하늘의 별들을 만드시고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하신 창조주께서 지금은 그의 진노로 산을 무너뜨리고 옮길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땅을 움직이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고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고 별들을 가두어 버립니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를 다시 혼동의 세계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20~21절입니다. “2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1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뜨려 그에게 그의 자리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언약을 말씀하시고 나서 그 언약을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실지를 낮과 밤에 대한 언약을 사람들이 깨뜨릴 수 없음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다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 11~16절입니다. “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너무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내 앞으로 지나가시나 내가 보지 못하고 내 앞에서 움직여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포섭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에게 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느냐고 누가 물을 수 있느냐는 말을 욥이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의로워도 하나님은 그런 정도로는 눈도 깜박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입니다. 라합은 바다의 혼돈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 세력을 돕는 자들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데 감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다만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욱 절망인 것은 내가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새 번역은 이렇습니다. “비록 그분께서 내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해도,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실까?” 지금 욥은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까? 다음 구절을 봅니다.

 

본문 17~21절입니다. “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19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21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폭풍으로 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폭풍이라는 단어가 욥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에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신다는 뜻과 같습니다(38:1, 40:6). 하나님의 말씀이 욥에게 폭풍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다시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신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폭풍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폭풍으로 바다 속에 산소가 공급되고 도시의 더러운 공기도 순환이 됩니다. 그러나 그 폭풍으로 인하여 수많은 피해들도 나타납니다. 지금 욥은 하나님이 폭풍을 맞고 있다고 여깁니다. 마치 폭풍우와 회오리바람으로 모든 것이 날아가고 뒤집어지는 경험을 영육 간에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이런 하나님을 소환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너무 강하시니 자신이 의롭고 온전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정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을 천히 여기게 됩니다.

 

본문 22~26절입니다. “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욥의 이 탄식이 복음을 들어도 나오는 탄식입니다. 욥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의인을 돌아보지도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다 멸망시킨다고 여긴 것입니다.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는 일이 무죄한 자에게 일어나도 하나님이 비웃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이라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하면 이랗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도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어도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여 버리면 하는 말이 그러면 나는 막 살아도 되겠네!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네! 이런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응도 사실은 그렇게 하신 분이 허락하셔야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욥은 도저히 의로우신 분이 통치 하지 않는 세상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것조차 이렇게 되게 하신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가운데 욥이 인내하는 것이며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면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런 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만들어 내십니다.

 

본문 25~28절입니다. “25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26 그 지나가는 것이 2)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27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28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29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의 날이 달리기 선수와 같이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빠른 배란 갈대로 만든 배가 가벼워서 빨리 갑니다. 그런 배처럼 빠르고 독수리가 먹이에 내릴 때의 속도와 같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불평을 하다가 문득 어떤 생각을 합니까? 불평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고 할지라도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기에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바꾸고 태도를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노력이 헛되이 보이는 것은 자신이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하여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러므로 자신이 아무리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여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본문 32~35절입니다. “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4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새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32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을 할 수 있으련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33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34 내게 소원이 있다면, 내가 더 두려워 떨지 않도록, 하나님이 채찍을 거두시는 것. 35 그렇게 되면 나는 두려움 없이 말하겠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그럴 수가 없는 줄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너무 높고 강하고 크셔서 소환할 수가 없지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누가 재판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억울하면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없을 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곳까지만 보겠습니다. 욥기 10장까지가 욥이 빌닷에 대한 반론이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입니다. 처음 설교를 준비할 때는 10장까지 다 보려고 하였습니다만 너무 길어져서 절반으로 줄입니다. 욥이 이렇게 처절하게 하나님께 질문을 하여도 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내하고 싶어서 인내하는 것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인내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압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 당하는 일은 욥과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가? 나는 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구원하시지 않으시고 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시는가? 이런 고민들을 나오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예수 믿었더니 만사형통하더라는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 없는 내용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덧입는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일 오후부터 월요일 오전까지 학생회 수련회를 했습니다. 겨울에는 하루 단합회로 모여 말씀공부 한 시간 하고 식사하고 하는데 이번에는 송정에 펜션하시는 분의 제안으로 그곳에서 1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련회 내용은 요한복음 17장 한 장으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3까지 성경 본문을 몇 번에 걸쳐 읽게 하였습니다. 돌아가면서도 읽게 한 후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기도하셨는지 체크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직접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왜 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하셔야 되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보조교사로 참여한 청년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많이 고민 한 내용이라서 책도 보고 설교도 들으면서 정리하였다고 한 대답입니다. 잘 대답하였지만 저는 욥기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정의롭게 하지 않으셔도 누가 감히 하나님께 시비를 걸 수가 있겠느냐고 반대 질문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도 의인도 똑 같이 심판하여 버리시는 분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말할 수도 없다고 말한 사람이 욥입니다.

 

그러면서 저의 답변은 요한복음 17장을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은 세상이 말하는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영광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이 볼 때에 전혀 영광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한 것이냐고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할만한 그런 메시아로 보내도 되실 텐데 왜 세상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는 그런 모습으로 보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중학생이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만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학생이 그 사실을 정말 믿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말씀을 듣기는 들은 모양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보면서 욥의 고민과 질문에 우리를 대입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고민하는 내용들도 다 들어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욥처럼 의롭다면 더욱 말씀이 생생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욥만큼 의롭지 않기에 이 말씀들이 피상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반드시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종교적인 열심을 내던 사람들이 그 원하는 바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게 됩니다. 욥의 이 고난과 고민과 질문과 항의 속에서 무엇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가졌던 그 생각들이 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까닭 없이 고난당함을 통하여 그 세계관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지혜도 그들의 전통적인 해석들도 무너져 내립니다. 그렇게 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가을 금요일에 공부한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의 서론 중에 한 부분은 인용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십자가가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평생을 바쳐서 그 의미를 연구한 후에라도 펑펑 울며 통곡해야 할지 모릅니다. 십자가는 언어가 감당할 수 없는 인생조차도 그것을 감당하고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신비이자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논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우리는 신비라고 부른다.”

 

욥기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이론과 생각들이 다 무너져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