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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0:1~22 알게 하소서 2016. 3. 2

 

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2 내가 하나님께 아뢰 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오늘 볼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 9~10장까지입니다. 지난주 제목이 욥의 인내입니다. 욥의 인내의 결론은 하나님이 가장 자비롭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욥의 인내의 결과로 보상이 주어진다면 자비와 긍휼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인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님께 알려달라고 합니다. 아무리 친구들이 설득하여도 욥은 그들의 말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답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입니다.

 

본문 1~2절을 봅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다고 합니다. 영혼이라고 해서 몸과 영혼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몸이 괴로운 것이 마음이 괴로운 것 보다 낫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몸이 괴로우면 마음도 괴로운 것입니다. 성경은 영육이원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영혼이라고 하든지 혼이라도 하든지 몸이라고 하든지 항상 전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사는 일이 너무 힘들기에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욥이 우리가 아는 식의 인내의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친구들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뢰기를 나를 정죄하시 마시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다투시는지 알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3~7절입니다. “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4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5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새 번역입니다. “3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 4 주님의 눈이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의 눈이기도 합니까? 주님께서도 매사를 사람이 보듯이 보신단 말입니까? 5 주님의 날도 사람이 누리는 날처럼 짧기라도 하단 말입니까? 주님의 햇수가 사람이 누리는 햇수와 같이 덧없기라도 하단 말입니까? 6 그렇지 않다면야,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기어이 내 허물을 찾아내려고 하시며, 내 죄를 들추어내려고 하십니까? 7 내게 죄가 없다는 것과, 주님의 손에서 나를 빼낼 사람이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한글 개역은 우리가 익숙하지만 문단 나눔이 매끄럽지 못한데 새 번역은 문장을 정리해서 읽기가 좀 더 쉽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실 때 다른 번역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욥의 갈등과 고민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시편 73편이 고민과 같은 고민을 토로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신데 어떻게 의인은 고난 받게 하시고 악인은 형통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면 제한적이고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은 나의 허물을 찾아내려 하시고 허물을 들추어내려고 하시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내게 죄 없다는 것과 주님의 손에서 빼낼 자가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러시는지 알고 싶다는 말입니다.

 

욥의 답답함으로 인하여 계속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매한 고난이 오면 어떻게 합니까? 너무 빨리 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한국인의 빨리 빨리 문화는 세계가 아는 문화입니다만 하나님의 뜻도 빨리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빨리 알고 빨리 순종해서 내가 원하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한국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과연 그러한가 하면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는 것 보다는 종교전문가들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려준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면 내가 이루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마치 자판기처럼 기계적인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욥의 친구들의 논리와 똑 같습니다. 지금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언가 잘못했으니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훨씬 큰 축복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인내이며 무엇이 믿음이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고민하고 성경을 보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신학을 한 목사들이 잘 알고 우리는 모르니 거저 시키는 대로만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를 묻기 보다는 어느 유명한 목사가 어떻게 해석했느냐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찾다가 자기 취향에 맞는 해석을 찾으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여 고정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베드로후서 3:12~16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2)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이 땅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약속의 대하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다고 합니다. 그 모든 편지에 이런 일 곧 심판과 영원한 나라에 대한 말씀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억지로 푼다는 말은 사사로이 푼다는 말입니다. 사사로이 푼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단체나 교회의 어떤 사적인 욕망을 위하여 푸는 것이 사사로이 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해석을 좋아합니다. 자기를 위한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사람들이 헷갈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욥처럼 알게 하여 달라고 해야 합니다.

 

본문 8~12절입니다. “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진술합니다. 이런 표현을 시편 13913~15절을 봅니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12절에 보시면 생명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흙으로만 뭉쳐놓은 것이 아닙니다. 정자와 난자로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생명과 은혜를 주시고 보살피시며 내 영을 지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주님이시여 왜 이러한지를 알려 주옵소서! 이 간절함이 욥의 인내요 신앙입니다.

 

13~17절입니다. “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4 내가 범죄 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 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욥의 질문이 얼마나 깊어지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만드시고 생명과 은혜를 주셨지만 하나님은 죄를 조금만 지어도 벌을 주시기 위하여 살펴보고 있는 그런 분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악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자신이 비록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자기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환난당하는 이것이 온 몸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이 현실이 하나님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시는 결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이 머리를 높이 들면 주님이 젊은 사자처럼 자신을 공격하신다고 봅니다. 머리를 높이 든다는 것은 무언가 일이 좀 잘 되기만 하면 나를 공격하시는 분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공격하는데 군대가 번갈아 가면서 공격을 하듯이 자신을 증거 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치심이며 친구들의 공격도 이와 같습니다.

 

18~22절입니다. “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 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욥의 질문에 하나님은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욥도 지칩니다. 물론 앞에서도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만 아무리 하나님께 물어도 답이 없으니 이제는 더욱 깊은 탄식만 나옵니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된 일이냐고 합니다. 차라리 모태에서 죽어서 나왔다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있어도 없는 것처럼 되어 모태에서 바로 무덤에 갔더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제발 혼자 좀 내벼려 달라고 합니다. 이남은 기간 즉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라도 잠시 쉬게 해 달라고 합니다. 얼마나 죽음이 눈앞에 보이면 이렇게 탄식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욥의 간구와 탄식에도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시여 제발 좀 알게 하여 달라고 부르짖는데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이러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산적되어질 때에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언제 이런 일이 끝이 나는지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용하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러 가는 것이 점을 치는 것입니다. 이런 습성으로 절에 가거나 성당에 가거나 교회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답답한 인생문제 해결 좀 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이 걸려드는 내용은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해결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종교 전문가라고 하는 자들이 내가 알려 주마! 하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누구입니까?

 

욥기 8장에서 본 빌닷이며 그 앞에서 본 엘리바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너무 잘 안다고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엘리바스는 그의 경험과 심지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빌닷은 교리와 전통을 주장합니다. 인생의 일반적인 경험으로 통하여 보아도, 전통과 교리를 통하여 보아도 공의로운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윤리와 도덕체계는 없습니다. 악한 자가 벌을 받고 의인이 형통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엘리바스와 빌닷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발도 똑 같이 말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인생의 답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려주는 대로만 하면 인생역전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엘리바스나 빌닷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지식은 욥도 가지고 있던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지금 하나님께 알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얼마든지 사람들이 지식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복음을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지식으로 받게 되면 반드시 교만하게 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고전8:1).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알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고 겸손하게 됩니다. 겸손이란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손이 아니라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받아도 욥과 같은 고난이 닥치면 또 다시 왜 이런지 알게 하여 달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오늘 결론도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이 기도대로 살아내신 분이십니다. 이 기도의 내용을 이루시기 위하여 살아내신 그 길이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지신 길입니다. 그 사랑 받던 제자들도 다 배신하여 도망가 버리고 애타게 하나님을 부르짖었으나 응답이 없는 그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7:1~3절입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내심으로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나도록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23~26절입니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한 구원입니다. 이런 구원에 해당되는 자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정말로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하여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알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욥이 알게 하여 달라고 한 그 뜻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서만 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미리 고난당함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약 사도의 증언인 베드로후서 1:19~21절입니다.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더 확실한 예언이란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앞에서 베드로후서 3장의 말씀도 보았습니다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샛별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기까지 우리는 주의하여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인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달라고 한 그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죄 없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까닭 없는 고난에 대한 유일한 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부와 능력이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욥의 질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골로새서 2:1~3절입니다.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구약이나 신약이나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성경을 통하여 고난 중에도 마음의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 안에 감추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난과 같은 고난 중에 성도라면 이 말씀이 답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