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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1:1~20 어찌 대답이 없으랴 2016. 3. 9

 

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3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엘리바스와 빌닷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가 별로 반박할 내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엘리바스와 빌닷의 말과 같은 설교를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욥이 엄청난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환난에 대한 엘리바스와 빌닷의 해석은 욥이 잘못한 것이 있기에 이런 환난과 재앙이 닥쳤다고 합니다. 교회를 좀 다닌 사람이라면 이런 말에 반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러한 말에 대하여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나도 그런 정도는 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이 지난주의 제목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예고하기를 오늘 제목은 내가 알려 주마라고 하려다가 빌닷의 말인 어찌 대답이 없으랴로 하였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공격하는 그런 도덕률과 인과응보와 전통과 체험과 교리로 말하는 것으로는 자기의 문제가 해석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욥 자신도 그러한 생각들을 하고 살았지만 막상 까닭 없는 재앙이 닥치니 해석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죽을 정도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알려달라고 합니다. 욥은 재산이 날아가거나 자식의 죽음이나 아내가 욕한 것이나 몸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자기 인생이 해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아뢰기를 제발 알려달라고 간구하였는데 이러한 욥의 말을 들은 소발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봉독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의 말에 대답을 합니다. 대답을 하는데 소발 안에 욥을 향한 분노가 가득합니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겠느냐고 합니다. 욥의 말은 헛된 소리라고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고 합니다. 소발의 이 말은 잠언(10:19)과 전도서(5:3)에도 나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얼마나 성경적인 말입니까! 그러므로 소발은 아주 확신에 차서 욥이 말이 많다고 합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쓸데없는 소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고 있는 욥이 소발이 보기에 가소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말은 자기를 자랑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니 이것은 자랑하는 말입니다. 욥이 친구들의 충고를 비웃고 있습니다. 이런 욥을 향하여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소발이 대답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소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속담이 생각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서투른 무당이 재앙을 물리치기는커녕 재앙을 초래하는 것처럼 돌팔이 의사가 사람을 잡는 다는 말을 할 때 사용합니다. 이 말은 사람을 고친다거나 가르친다는 사람들의 착각은 자신이 다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오늘 어떤 분과 전화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구원의 확신이라면 무너져 내려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쉬운 답변을 가지고 싶어 하고 그것을 고정시켜서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에도 얼마나 답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습니까? 더구나 삶의 적용에 있어서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쉬운 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과 같은 대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만 수학공식처럼 맞아 떨어지는 답으로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해석이 안 되더라는 답답함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사람이 많이 와서 자리가 비좁습니다. 이렇게 오는 분들의 이야기를 여러분 보다는 제가 조금 더 많이 들어서 압니다. 물론 그들의 속 이야기 전부를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거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섬기는데 교회에서 설교하는 대로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에서 잘 되고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자신은 전혀 그렇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정도의 차이가 다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설교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고민하며 이리저리 찾다가 오게 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온다고 여러분의 삶이 다 해석이 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답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을 좋아합니다. 신앙도 구구단처럼 외워서 즉답이 나오는 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몸이 아프다면 기도하라고 합니다. 경제가 좋지 않으면 감사하라고 합니다. 감사하면 더 감사할 것을 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런 식의 답들이 이미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답변이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답변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답변을 우리가 반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우리의 본성과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4~6절입니다. “4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5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6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소발이 욥에게 하는 말입니다. 욥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고 하느냐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를 향하여 말씀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의 지식은 광대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네가 받는 벌은 하나님께서 많이 봐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소발이 마치 하나님의 대변자나 되는 것처럼 욥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저도 소발과 같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도 성경에 다 있습니다. 성경에 있다고 해서 그 말씀으로 고난 중에 있는 형제를 향하여 정죄를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욥을 공격하는 사람의 자리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가정생활이나 자녀들의 문제를 잘 말합니다. 그러면서 처방도 척척 내립니다. 자신의 조금 나은 점으로 다른 사람의 못한 점을 공격하는 것이 우리의 처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7~12절입니다. “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 나귀 새끼 같으니라

 

욥이 말하기를 자신은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죄가 없는데도 이런 고난이 온다는 말을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소발이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면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으시고 스올 보다 깊으시고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다고 합니다. 그 크고 높으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공평하게 다스리시지 않는다고 소발이 말합니다. 이 말에 우리도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도 그러함을 증거 합니다. 그래서 소발은 하나님께서 재판하시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사람이 보기에는 악한 일을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다 보신다고 합니다. 네가 아무리 의롭다고 주장하여도 하나님은 너를 다 아시기에 너에게 일어난 일이 불공평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것도 네가 모른다면 너는 들 나귀 새끼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소발은 욥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렇게 공격 합니다.

 

시편 139:1~12절입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소발의 말은 이 말씀의 압축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발의 말을 함부로 반박을 못합니다.

 

13~20절입니다. “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15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18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19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20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소발의 결론이 엘리바스나 빌닷과 같습니다. 욥이 무언가 잘못 한 것이 있으니 이런 재앙이 왔다고 확신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될 것이며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환난은 잊을 것이며 기억하려고 해도 물이 흘러감처럼 흘러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면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 희망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욥에게 더 늦기 전에 회개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빌닷의 설교입니다. 아주 확신에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에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혹 그렇게 보일지라도 우리가 잘 몰라서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욥에게 말하기를 네가 정말로 회개한다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설교를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듣다가 정작 우리자신에게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면 이런 설교가 무용지물이 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신다는 설교를 듣고 그렇게 수십 년을 교회생활 했지만 정작 자신에게 큰 일이 일어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이도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으니 화도 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시겠습니까?

 

뉴스 엔조이에서 목회자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를 경기도 가평에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뉴스에 보니 한완상 박사가 강의하는 시간에 세월호 유가족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을 초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세월호 유족 중에 세 사람이 말한 내용을 옮겨보겠습니다. 자유 게시판에 전체를 올려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를 잃은 한 어머니는 언론이 세월호 유족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것처럼, 교회도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시간 지났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마음이 처한 상황은 2014년 사고 당일부터 변한 것이 없다.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 언론은 '돈 더 받으려고 저런다, 종북이다' 같은 말도 안 되는 기사로 부모들을 묘사한다. 아이 잃은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분의 마음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그날부터 변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의 발언입니다. 아이와 함께 참석한 한 젊은 목사가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겪고 계신데 신앙이 현실을 버티는 데 힘이 됐는가. 힘드시겠지만 실제 경험을 알려 주시면 앞으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이 말에 대한 답변입니다.

 

"별로 도움이 안 됐다. 교회 안 다녔으면 오히려 마음대로 화내고 다녔을 거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슬퍼도 안 슬픈 척하고, 화내고 싶어도 화내면 안 된다고 배웠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 기도 들어주시는 하나님, 능력 있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치지만 고통의 현장에서는 다 도움이 안 됐다. 버틸 수 있던 이유는 딱 한 가지. 교회에서 자살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자살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월권이라는 걸 배웠기 때문에, 이걸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교회에서 배웠던 모든 것은 다 교회 건물 안에서만 적용되던 것이었다. 오십 평생을 의지했던 하나님이 힘을 못 주시더라. 사고 후 교회는 박차고 나왔지만 하나님을 떠나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며 힘을 얻었다.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또 다른 하나님이었다. 분향소 기독교 예배실을 찾아 주시는 많은 분들이 꼭 위로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그냥 옆에 있어 주기 위해 오셨다. 그게 큰 힘이 됐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그분들을 통해 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오늘 설교에 이 사람의 글을 인용한 것은 이 사람이 오십 평생 교회에서 배운 내용이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기도 들어주시는 하나님, 능력 있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지만 고통의 현장에서 아무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박차고 나왔는데 하나님을 떠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기들을 위로하려고 오신 분들과 꼭 위로하려고 오지 않아도 그냥 옆에 있어 주기 위하여 우신 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그들을 통하여 봤다고 합니다. 이 유족의 말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욥기를 보고 있는 내용과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유족 중에 여전도사가 한분 있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니다. “고통의 현장에 있으면서, 오히려 자신이 과거 남을 위로할 때 뱉은 말을 되새겨 봤다고 했다. 그는 고통의 한복판에 있어 보니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했던 수많은 위로의 말들을 물리고 싶었다. 들은 말 중에 가장 큰 상처가 된 말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었다. 심지어 장례식장에 와서 '아이들이 좋은 곳으로 갔으니 이제 울지 말라'고 하더라. 그게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알았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답이다. 같이 우는 가운데 우리와 함께 우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다

 

전도사나 목사가 얼마나 쉬운 위로를 남발하였는지 자신이 유족이 되고 고통의 현장에 있어보니 알겠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에 너무 쉽게 위로한 그런 말들을 물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되 물릴 수 없는지 한번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전도사는 앞으로 쉬운 위로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함부로 말하지도 못할 것이며 거저 좋은 곳으로 갔으니 울지 말라고 하는 것도 함부로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배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답이라고 한 것입니다. 같이 울어주는 자가 있을 때 우리와 함께 우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 후에 그날 강사인 한완상 박사는 구조 악을 해체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성도나 목회자들이 예와 아니오 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인용한 것은 지금 욥기와 연결하여 보기 위한 것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고통당하는 욥에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한 유족이 50평생 다니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들은 내용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를 다니면서 들어온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슬퍼도 슬프지 않는 척 해야 하고 화내고 싶어도 화를 내지 않는 척 해야 한 것입니다. 슬퍼하고 화를 내면 믿음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외식만 늘어갑니다. 그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정성을 바치고 기도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들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한국의 많은 교회가 기적이 일어나도록 기도했습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성당이나 절에서도 그렇게 빌고 빌었습니다. 유족들은 얼마나 더 간절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러할 때 소발이 내가 알려주겠다고, 내가 답을 하겠다고, 내가 하나님을 뜻을 알려주겠다고 말한 것이 욥에게는 오히려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구단 외우듯이 인생의 답을 쉽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도 여러 사람들이 상담을 요청합니다. 가장 많은 내용이 교회 소개하여 달라는 내용입니다만 삶이나 신앙의 내용에 상담을 하면 성경 몇 구절 인용하여 주는 정도 외에는 할 상담이 없습니다. 저의 어쭙잖은 상담이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유족의 말에서 무엇이 하나 빠져 있습니다. 오십 평생을 다니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잠깐 언급한 내용 중에 나오지 않을 수 있지만 교회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전하였는지 돌아봐야 하는 발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부르짖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외면하신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살리시는 일임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천사들도 몰랐고 사탄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인생의 문제는 어떤 인간도 시원하게 해석하거나 풀어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 년에 미성년자와 성년을 포함하여 실종자가 약 26천명이며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가 약 5천명입니다. 이 뿐 아니라 수많은 질병으로 인하여 사망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고통들을 우리는 그 가족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위로하고 옵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까지 장례식을 두 번이나 치르면서 또 많은 위로를 남발하고 왔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자기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일 것입니다. 유일하게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살과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으로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할 때에 정말 우리가 큰 환난과 재앙을 당하였을지라도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보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유일한 답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은 세상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밖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세상이 끝이 났다고 십자가 안으로 피하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저주 받아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인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