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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3:20~14:22 욥의 간구 2016. 4. 6

 

20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22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23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24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25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26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27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28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이 본문 앞의 설교제목이 나도 안다 그러나였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돌아가면서 욥을 공격할 때에 욥은 그들의 말에 일일이 반박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보는 말씀은 빌닷의 말에 대하여 욥의 답변입니다. 욥의 답변이 12:1~14:22절까지 상당히 긴 분량입니다. 그래서 중간을 잘라서 지난번에 보았습니다. 그들이 욥을 공격하는 그 모든 논리성과 인과율과 경험과 계시라고 하는 것들은 욥 자신도 이미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으로 알았지만 막상 본인이 까닭모를 고난에 처하게 되니 그런 것으로 해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내용이 얼마나 많은지 새롭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 욥의 답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 말하고 나서 이제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주님께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리하시면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않겠다고 합니다. 첫째는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고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주께서 손을 대시면 주의 그 위엄 앞에 마른 검불과 같은 자신이 말할 수도 설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나를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답하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주께 말씀하게 하시고 주님은 대답하여 달라고 합니다.

 

욥의 이러한 간구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물론 38장까지 가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욥이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기도하면 응답받는 다는 말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 것은 우리의 죄가 가려져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 응답을 빨리 받기 위하여 죄를 해결하는 방법도 알려줍니다. 가장 중요한 회개거리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거론합니다. 이미 지키지 못한 날들과 지키지 못한 헌금에 대하여 벌충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회개하라고 합니다. 마치 가톨릭의 보속의 내용과 같은 말이 됩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고 고해성사를 하게 되면 그 죄에 대한 벌칙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그 벌칙을 감당함으로 죄가 해결되었기에 이제 복을 받겠다는 안도감을 얻는 것이 종교성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방법론이 욥기를 통하여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욥기는 그런 방법론을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욥기의 내용은 방금 예를 든 이런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의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욥을 공격한 내용이 인과율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고 못 받고는 내 하기 나름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무언가 죄를 지은 것이 있기에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셔서 네가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러한 이야기가 아님을 자신이 까닭모를 고난을 통하여 벗어나고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두 가지 간구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욥은 계속하여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마치 독백처럼 들리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23~25절부터 봅니다.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말한 그런 죄와 허물은 없다고 이미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허물과 죄가 있다면 회개하겠사오니 제발 나의 허물과 죄를 알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계속 간구하기를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냐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날리는 낙엽과 같고 마른 검불과 같은데 이런 자를 놀라게 하시고 뒤쫓으시냐고 합니다.

 

26~28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신다고 합니다. 자신이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느냐고 합니다. 젊어서의 죄란 자신이 죄를 잘 분별하지 못할 그런 때의 죄를 받게 하시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형법도 미성년자의 범죄는 그 나이에 따라 경감됩니다. 그런데 그런 죄라도 욥은 이미 자신의 제사로 인하여 속죄함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욥은 모르지만 하나님도 욥의 이러한 신앙을 사탄에게 자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해석이 안 되자 우리식으로 말하면 조상이 잘못해서 내게 이런 고난이 오는가 하는 정도의 표현입니다. 주께서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다 조사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과 같다고 합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서 바짝 말라서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같고 마른 지푸라기와 같으며 썩는 물건의 낡아짐 같고 좀 먹은 의복과 같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한 결 같이 연약하고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하나님께서 무엇 하시려고 놓지 않으시냐는 항변의 간구입니다.

 

14:1~6절은 새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2 피었다가 곧 시드는 꽃과 같이, 그림자 같이, 사라져서 멈추어 서지를 못합니다. 3 주님께서는 이렇게 미미한 것을 눈여겨 살피시겠다는 겁니까? 더욱이 저와 같은 것을 심판대로 데리고 가셔서, 심판하시겠다는 겁니까? 4 그 누가 불결한 것에서, 정결한 것이 나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5 인생이 살아갈 날 수는 미리 정해져 있고, 그 달 수도 주님께서는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6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셔서 그가 숨을 좀 돌리게 하시고, 자기가 살 남은 시간을 품꾼만큼이라도 한 번 마음껏 살게 해주십시오.”

 

욥이 고난과 욥의 친구들의 공격을 통하여 이런 고백과 간구를 하게 됩니다. 사람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근원을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태어난 사람이란 그 한계성을 말합니다. 이런 인생의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앞의 단락에서는 인생을 날리는 낙엽, 마른 검불, 썩어서 낡아지는 것, 좀 먹은 의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 그림자와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미미한 것을 왜 눈여겨 살펴보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냐고 합니다. 이런 자를 심판하셔서 무엇 하시겠느냐는 말을 합니다. 누가 불결한 것에서 정결한 것이 나오게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인생의 날 수는 주님께서 다 헤아리시고 정하여 두셨으니 그러므로 나에게 향하는 눈을 돌리셔서 숨 좀 돌리게 하시고 품꾼이 하루 일을 마치면 저녁에는 편히 쉬는 것처럼 나로 품꾼 만큼이라도 한 번 살게 하여 쉬게 하여 달라고 간구를 합니다.

 

어느 정도의 고난이 와야 이런 고백을 하겠습니까?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침 삼킬 동안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이런 나를 돌보아 주셔야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외면하시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여 주시는 것이 구약 제사장들의 축복기도였습니다(6:24~27). 그런데 주께서 얼굴을 향하여 주시는 것이 구원만이 아니라 심판의 말씀도 있습니다. 지금 욥은 주님께서 자신을 향하시는 것이 심판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제발 좀 외면하여 주시면 안 되겠느냐는 간구를 합니다. 이런 탄식과 간구는 고난 중에 나오는 것입니다. 욥의 이러한 탄식의 간구를 시편 90편에서도 보게 됩니다.

 

시편 90:1~12절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1)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편은 표제어에 모세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이런 시를 남긴 것은 그의 고난을 통하여 주님이 영원한 거처가 됨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나 모세나 간에 인생은 고난 중에 자신의 근원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그 고난 가운데 인생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알게 됨으로 영원하신 주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이 욥이나 모세처럼 이렇게 인생의 근원을 헤아려 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올수록 이를 갈면서 하나님과 이웃과 세상에 대하여 원망하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만 고난을 통하여 인생의 유한함과 무능력을 절실하게 알고 인간의 고난 그 너머를 바라보게 됩니다. 시편 90편은 욥기서의 압축과 같습니다.

 

시편 90:13~17절입니다.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그 고난의 끝에 주의 인자하심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에 행하신 일로 기뻐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주의 은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욥의 현실은 고통입니다. 욥기 14:7~12절입니다. “7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나무는 죽어도 그 뿌리가 살아남으면 다시 살아나지만 사람이란 한 번 죽으면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지금 죽음과 같은 고난 속에 있다고 탄식하며 간구합니다.

 

이어지는 13~15절입니다. “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극심한 고난 중에 주께서 자신을 감추어주시고 자신을 위하여 규례를 정하셔서 기억하여 달라고 합니다. 사람이 장정이라도 죽으면 다시 살수 없지만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며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면 주께서 나를 부르실 것이며 그렇게 부르시면 자신이 대답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될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16~22절입니다. “16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17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18 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19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20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 21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22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위의 단락에서 고난 중에 소망을 고백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절망과 탄식이 계속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살이 아프고 영혼이 애곡할 뿐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다 아프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을 새 번역으로 다시 봅니다. “16 그러므로 지금은 주님께서 내 모든 걸음걸음을 세고 계시지만, 그 때에는 내 죄를 살피지 않으실 것입니다. 17 주님께서는 내 허물을 자루에 넣어 봉하시고, 내 잘못을 덮어 주실 것입니다. 18 산이 무너져 내리고, 큰 바위조차 제자리에서 밀려나듯이, 19 물이 바위를 굴려 내고 폭우가 온 세상 먼지를 급류로 씻어 내듯이, 20 주님께서는 연약한 사람의 삶의 희망도 그렇게 끊으십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끝까지 억누르시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님 앞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21 자손이 영광을 누려도 그는 알지 못하며, 자손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 소식 듣지 못합니다. 22 그는 다만 제 몸 아픈 것만을 느끼고, 제 슬픔만을 알 뿐입니다.”

 

욥기가 어려운 것은 이러한 내용들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분은 소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부분은 다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돌보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것을 저는 부침(浮沈)이라고 말합니다.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잠시 살만하게 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살만한 날이 갑자기 죽음과 같은 고통이 덮쳐옵니다. 이것이 하루에 몇 번이나 부침을 거듭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형광등으로도 설명을 합니다. 형광등의 불빛이 늘 환하게 빛나는 것 같지만 일초에 수십 번을 깜빡 그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의 부침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부침을 통하여 잠간이라도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시편 11949~51절입니다. “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51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위급한 상황이면 119전화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는 시편 119편을 보라는 말씀을 전에 시편 강해할 때 드린 말씀입니다. 고난 중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고난 중에 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교만한 자들은 고난을 당하는 성도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고난 중에도 주의 법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도

욥과 연결이 됩니다. 욥을 공격하는 친구들이 죄로 인하여 이런 고난을 받는다고 할 때에 욥은 그들의 말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법을 떠나지 않는 것이며 욥의 인내라고 보았습니다.

 

시편 119:66~71절입니다. “66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고난 당함이 유익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하여 주의 유례를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72~75절입니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74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이런 말씀들이 욥기를 보기 전에는 좀 모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말씀이 더욱 분명하여 집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고난당하는 자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라고 합니다. 주의 말씀을 바라는 자에게 왜 고난이 오느냐는 대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고난당함을 통하여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 75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욥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결국 그 고난의 끝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배우가 됩니다. 주의 성실(誠實)하심이란 말을 이루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성실하게 이루어서 열매를 맺는 일은 이 세상에서 성도로 하여금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베드로전서 5:7~11절입니다.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2)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세상의 마귀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근시하고 깨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적 마귀는 세상의 염려를 자꾸 하게 함으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이 구조 속에서 성도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동일한 고난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끌어내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넣는 일은 고난이라는 길이기에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이 고난이라는 자기 십자가를 통하여 영원한 그 나라가 바늘구멍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반드시 고난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난이 올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셔서 그 터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 권능이 세세 무구하도록 우리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