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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5:1~35 너 몇 살이냐? 2016. 4. 13

 

7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8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9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욥기를 경기에 비유하면 오늘 본문부터 2회전이 시작됩니다. 13의 경기입니다. 욥을 두고 세 명이 돌아가면서 공격을 하고 욥이 방어를 합니다. 그동안 1회전의 경기를 마쳤습니다. 1회전을 마치면서 욥의 세 친구들의 주장들이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내용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욥은 좀 억지스럽고 고집이 강하다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우리가 욥의 고난의 시작과 결론을 알고서 이 내용을 보아도 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을 논박할 마땅한 말이 없습니다. 얼마나 논리정연한 말들입니까? 오래 축적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들과 심지어 계시를 받았다는 표현들까지 다 동원하여 욥이 까닭 없는 고난이 아니라 까닭 있는 고난이라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 명의 공격에 대하여 욥은 한 결 같이 답변을 합니다. 나도 너희들처럼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위로 하였지만 그러나 막상 내가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고 보니 우리가 말해온 그 체계로는 해석할 수 없는 일이 닥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까지 나는 너희들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이며 욥의 믿음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하여 까닭 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알아야 한다는 역설이 들어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욥의 세 친구들의 논리로서는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박영선 목사의 표현으로는 이렇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원칙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까, 원칙을 안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손 한번 들어볼까요. 정답을 맞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면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 좋습니까, 안 지키는 게 좋습니까?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원칙을 지키시면 우리는 다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떤 논쟁을 하다가 보면 그 문제가 진리나 복음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물론 교회사에서도 수많은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 논쟁이라든지 기독론이나 성령론에 대한 논쟁들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들을 통하여 서로 상대를 향하여 이단이며 자신들은 정통이라고 합니다. 결국 인간들은 논쟁 속에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동원합니다. 심지어 너 몇 살이냐고 합니다.

 

오늘 본문 7~10절을 먼저 봅니다. “봉독 엘리바스가 2차로 욥을 공격합니다. 엘리바스가 가장 연장자로 보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네가 처음 태어난 사람이냐고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머리 흰 사람도 있고 너희 아버지나이보다 많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무언가 논쟁을 하면 논쟁의 내용과 상관없이 너 몇 살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이를 묻는 사람들은 논리성에서 부족할 경우 나이로 상대방을 누르려고 합니다. 오늘 제목을 너 몇 살이냐고 한 것은 이 본문을 보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19:32) 말씀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4번 타자로 나온 엘리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32:9). 시편 119:99~100절입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주의 말씀을 늘 묵상하는 자의 명철함은 그의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그저 세상의 경험과 연륜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의 지식을 바로 아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이런 말을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하여 까닭 없는 은혜를 설명하기 위하여 욥이 고난을 받는 내용 중에 하나가 너 나이가 몇 살이냐는 말을 듣는 것이 예수님에게도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8:56~59절입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이 아브라함이 자손이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고 보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이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합니다. 여기서도 나이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말씀에 돌을 들어 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2:41~46절입니다.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였는데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다윗의 시편 110:1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이 말씀 앞에 사람들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그날부터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과 다윗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니 사람들이 너 몇 살이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욥이 공격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건방지고 교만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이 받는 고난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겠다고 할 때에 형들이 다윗이 건방진 놈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말한 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형들은 어린 다윗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교만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자신의 나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세월만큼 죄를 더 많이 지은 것을 인정하고 조용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은혜로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네가 세월을 얼마나 살아왔는데 하면서 자신의 이력과 경험과 전통을 내세우는 것은 제대로 십자가 앞에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3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엘리바스아 욥을 두 번째로 공격하면서 하는 말이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고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은 지혜로운 말로 했는데 욥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욥의 말이 동풍으로 그 배에 채우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동풍이란 팔레스타인에서 보면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기에 비를 주는 바람이 아니라 오히려 풀과 채소를 말려버리는 바람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말이 도움도 안 되고 무익한 변론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4~6절입니다. “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인데 욥의 말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을 엘리바스가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가 지금까지 살펴본 인과응보와 선악체계의 지식과 윤리와 도덕의 바탕이 되는 악인이 벌을 받고 의인이 상을 받는다는 체계가 무너진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공격은 욥의 말과 같이 의인이 고난을 받는다면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죄악이 욥의 입을 가르쳤기에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네 입술 곧 네 말이 너의 불리한 증인이라고 공격합니다.

 

11~13절입니다. “11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12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13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엘리바스는 1차 욥을 공격하면서 자신이 은밀한 지혜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에 네게 작은 것이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엘리바스를 향하여 욥의 태도가 어떻다고 합니까?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눈을 번뜩 거린다고 합니다. 사람이 무언가 불만스러우면 눈동자를 아래위로 굴리려 번뜩거립니다. 그런 태도로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고 합니다. 바로 앞에서 네 나이가 얼마냐는 식의 말처럼 나이도 어린 것이 이런 태도입니다.

 

14~16절입니다. “14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엘리바스의 이 말을 적어도 복음을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죄인, 쓰레기, 똥 덩어리, 없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이렇게 합당하게 여겨지는 말도 결국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 사람의 말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이런 논리로 까닭 없이 고난당하는 욥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이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7~19절입니다. “17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18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9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엘리바스가 욥에게 내가 본 것을 설명하겠으니 들으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인데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로운 자들의 땅 곧 지혜로운 자들의 영역에는 외인들이 왕래하지 못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지혜는 아무에게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듣고 알고 보았기에 너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20~24절입니다. “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21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22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23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24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오래된 지혜로 욥을 공격하는 내용은 욥이 고난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떻게 여인에게서 난 자가 깨끗하여 죄악을 물 마시듯 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런 재앙을 만난 것은 너의 죄로 인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반대한다면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25~26절입니다. “25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26 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27 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28 그는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주하였음이니라 29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30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죄인인 주제에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여 교만하여졌기에 한 때 부요하고 강하게 보였지만 그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증식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욥이 이렇게 된 것을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렸고 하나님의 입김으로 불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허무하게 멸망하는 것이 욥이 하나님을 대적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1~35절입니다. “31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32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33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34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35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욥이 이렇게 된 것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욥이 허무한 것을 믿었다는 말은 하나님은 악인은 벌을 주시고 의로운 자는 상을 주시는데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 엘리바스가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이 욥을 공격하는 모습은 바로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서도 늘 볼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우리도 어떤 교인이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무언가 세속적으로 형통해 보이는 삶을 살다가 갑자기 큰 어려움이 닥치고 그 어려움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도 자신들이 하나님께 무엇인가 잘 못한 것이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됩니다. 그런데 주변에서도 그런 시선으로 봅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목회자가 찾아와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욥처럼 범사에 경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에 항변할 말도 없는 자들입니다.

 

제가 최근에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기도해야 된다고 해서 기도원에 갔고 기도원에서 만난 사람이 기도를 해 준다고 하면서 곧 사업장을 옮기게 될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기도 중에 어떤 건물을 보고 나중에 그곳을 보았을 때에 놀랐다고 합니다. 자신이 기도 중에 보았던 그 건물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사업장을 이전하자 얼마나 사업이 잘 되었는지 십일조를 수 백 만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남편을 불러서 지금 하는 십일조를 배로 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그 아내에게 이 말을 그 당시에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남편이 하는 말이 기도해서 소원대로 이루어진다면 자신이 월급을 주고 기도하는 사람을 고용하겠다고 하였답니다. 기도의 제목만 주고 기도하게 하면 기도하는 사람 월급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얻도록 기도하게 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복음을 듣고 지금은 열심히 일하면서 빚을 조금씩 갚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는 우리가 욥을 공격한 엘리바스의 말이 우리의 종교성에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있다면 신이 자기에게 정성을 바치는 자를 돌보아 줄 것이라는 이 말에 누가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어디에서나 통합니다. 오늘 선거를 한 사람들 중에도 여러 곳에 치성을 바치러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을 하고 실패를 하게 되면 정성이 부족하여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더욱더 치성(至誠)을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지극한 정성보다 강한 것이 치성(致誠)입니다. 지성(至誠)이란 이를 를 사용합니다만 치성은 내 던지고 맡기는 한마디로 죽기내기로 매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십자가는 전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로마서 4:4~8절입니다.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의 체계에는 자신들이 일한 삯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자들은 은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말로는 은혜라고 해도 그들의 공적사상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복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다고 고백을 합니다.

 

로마서 5:1~5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1)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신약의 성도도 동일한 고난과 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욥의 환난을 압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구약을 통하여서 성도가 가는 길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나 우리나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내는 줄 압니다. 환난을 통하여 소망이 아닌 것이 떨어져 나가고 참된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시면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 온갖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욥이 받는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꼴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세상의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망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5:6~8절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우리가 연약할 때에 죄인 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의 확증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확증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이 역사를 살아내게 됩니까?

 

로마서 5:9~11절입니다.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놀라운 사랑과 복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신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영원 전에 택한 자기 백성들에게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