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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6:1~5 재난을 주는 위로 자들 2016. 4. 20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두 번째로 엘리바스가 욥을 공격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바스의 공격에 대한 욥의 답변이 16장에서 17장까지입니다. 욥기나 다른 성경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알리시는데 그 뜻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욥을 통하여 성도의 고난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도 함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욥기의 이런 내용은 옛날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하여 참으로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 까닭 없이 고난당하심으로 우리가 까닭 없이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중첩되어 있기에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재난을 주는 위로 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욥의 답변 전체를 드러낼 수가 없어서 두 번에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을 재난을 주는 위로 자들이라는 제목으로만 5절까지의 말씀을 상고하여 보고 다음 주는 욥과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도의 고난을 보겠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 기댈만한 것을 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후세계에서 좋은 곳에 가려고 종교를 택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힘을 얻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을 얻기 위하여, 문제 해결을 위하여, 사람들과 사귀기 위하여, 장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목적들을 가지고 이런 저런 종교를 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길은 욥과 같은 길이라고 하면 누가 따라 가겠습니까? 그래서 욥의 이야기도 하지만 제 빨리 욥의 결론으로 가 버립니다. 지금 고난을 받아도 나중에 두 배로 받는다고 하거나, 하늘에서 많은 복을 받는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고객확보가 되지 않기에 이렇게 말한다면 그런 곳은 종교로 장사하는 곳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봉독 욥이 엘리바스에게 말합니다. 엘리바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내가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란 지금까지 욥에게 한 세 친구들이 한 말들입니다.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엘리바스가 말을 하였기에 욥이 하는 말이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경상도 버전으로 하면 고만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미 많은 들은 이야기를 다시 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 자들이라고 합니다. 욥이 지금 재난을 당하고 있는데 욥의 친구들이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오히려 재난이라는 말입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 자들이라는 말이 다른 번역으로는 번뇌케 하는 안 위자라고 하거나 하나 같이 나를 괴롭게 할 뿐또는 자네들이 준다는 위로라는 것이 기껏해야 괴로움을 줄 뿐이라고 번역합니다. 욥이 당하는 이런 고난을 세상의 경험과 지혜와 종교적인 말로는 결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엘리바스의 말로도 욥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위로들은 다 헛된 말이라고 합니다. 이런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을 것인가 라고 하면서 도대체 무엇에 자극을 받아서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럴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다고 합니다. 머리를 흔든다는 것은 저주 받은 자들에게 대하여 조롱을 가하는 표현입니다.

 

시편 22:6~8절입니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다윗의 시편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십자가에서 그대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다윗과 같은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 하는 것이며 동시에 성도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다음 주에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욥이 자신도 욥의 친구들처럼 할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이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입장이 되고 내가 너희의 입장이 되었다면 나도 너희들처럼 고개를 흔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고난을 당하고 나니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욥의 입장은 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모를 일입니다. 5절의 표현이 좀 모호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다른 번역을 보면 앞의 내용과 연결되어 나도 너희들처럼 입에 발린 말로 하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욥 자신도 고난을 당하기 전이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재난을 주는 위로 자,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 자들에게 대하여 두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나는 뉴스 엔조이에 어제 나온 기사입니다. 제목이 기도 안 해서 배에서 못 나왔다고...’ 이 기사는 세월호의 희생자 어머니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기사는 뉴스 보시면 되기에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4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교회에 올인 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욕심이 있어서 딸 넷을 낳고 막내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 희생된 아이가 넷째 딸입니다. 교회 다니던 사람 중에 세월 호 사건의 피해자가 된 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났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온 교회와 성당과 절에서도 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래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열심히 다니니 다른 유가족들이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래서 자신은 믿는다고 하였답니다. 여러 가지 체험도 많이 해서 하나님 없다고는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원망은 많이 했다고 합니다. 원망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믿지 않는 사람인데 결혼하면 같이 교회 잘 나가겠다고 하고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이 사람의 믿음이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만 남편 사업으로 제주도에 가서 살면서 더욱 열심히 교회를 다닌 것입니다. 아들 욕심도 있고 남편이 안 믿는 집안사람이라서 기독교 가문도 만들고 싶어서 두 딸을 낳았는데 다시 임신을 하고서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기도 갔다고 합니다. 믿는 대로 된다고 해서 정말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딸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식이 4대째 믿는 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배신감이 들어서 막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딸인 것 감사하면서 살라고 하더랍니다.

 

희생당한 넷째 딸은 그 다음해에 생겼는데 기사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이제 별로 아이에 대한 마음이 없었는데 들어선 거예요. '하나님이 미안해서 (아들을) 주셨나 보다' 싶었죠. 태교를 열심히 했어요. 근데 또 딸인 거예요. 정말 어이가 없었죠. 저번에 감사하면서 살라고 하셔서 뭐 원망도 못하고 그랬어요. 제가 너무 실망하니까 애 아빠가 늦은 밤에 어디서 노란 장미 네 송이를 사 왔어요. 그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죠.”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이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딱 두 가지로 기고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쓰시고 싶은 대로 쓰시라고 그리고 한 아이도 하나님을 떠나는 아이가 없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넷째 아이가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넷째 아이가 다른 아이들 보다 예뻤다고 합니다. 사진도 올려 져 있습니다. 아이와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참사 이후에는 정말 죽겠더라고요. 새벽 기도 가서 펑펑 울었어요. 도대체 왜 그러셨냐고. 두 달 정도 지났나. 아는 전도사님 소개로 유명한 금식 기도원에 갔어요. 기도원에 가면 왜 왔는지 쓰라고 하거든요. 거기에 솔직하게 다 썼어요. 나는 세월 호 유가족이라고, 하나님이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다고. 그 다음 날 목사가 강단에 서서 그러는 거예요.” “거기에 분명 살아 돌아온 아이도 있다. 살지 못한 아이는 부모님이 기도를 많이 안 해서 그런 거다.”

 

그 길로 나왔어요. 그때가 3일 금식한 상태였는데, 바로 국회로 가서 다른 부모님들과 단식투쟁에 들어갔어요. 12일을 더 금식했네요. 지금 다니는 교회에도 서운한 점이 많아요. 목사님이 어느 날 그러시더라고요. "세월 호는 정치적인 부분이 있어서 언급하기가 좀 그렇다".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했어요. 이 교회에도 희생자가 네 명이 있고, 그중 저희를 포함해서 두 명은 부모님이 함께 다녔거든요. 저는 당시 이 교회 온 지 9개월 정도밖에 안 됐고, 다른 한 가정은 20년 정도 다녔더라고요. 그분은 교회를 떠났어요. 작년 1주기 때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교회에서 세월호 유가족 위로 음악회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때 유가족들이 시행령 폐기를 주장하면서 삭발하고, 경찰과 대치하고 치열하게 투쟁할 때였잖아요. 싫다고 했어요. 그런 가슴에 스치기만 하는 위로는 싫다고. 하려면 세월호 얘기는 빼고 하라고. 아니면 나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음악회를 했는지 안 했는지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목사님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고요. 예전에는 목사님 말씀이면 껌뻑 죽었죠. 마치 목사님이 하나님인 것처럼 살았는데. 오히려 성경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지? 어떻게 사셨지? 근데 지금 교회는 왜 이러지? 돌아보니 사고 이전에는 정말 교회 일만 하면서 살았더라고요. 교회 일만 신경 쓰기도 바빠요. 교회에서 하는 일은 거의 다 참여하다 보니 만날 입이 부르터 있는 상태였어요. (두 손을 양 눈 옆에 갖다 대면서) 딱 이렇게 산거예요. 다른 데 시각을 돌릴 수도 없고 돌리지도 못하게 하고. 근데 '교회 안에만 신앙이 있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도 다 대한민국 사람인데, 대한민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 없고 교회 일만 신경 쓰는 게 과연 맞는 건가요? 저희 말고도 고통당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데. 교회 프로그램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비늘이 벗겨진 거죠. 교회 생활을 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투쟁하고 와서 또 수요 예배를 가야 하나? 녹초가 된 상태로 금요 철야 예배에 가야 하나? 구역 모임도 못해요. 제가 괜히 분위기 깨는 것 같아서. 그때부터 다른 건 다 정리하고 지금은 주일예배에서 성가대만 해요. 그래도 지성이 갈 때 교회에서 잘해 줘서 그거 때문에 다니고 있는 거예요.

 

여기까지만 인용을 하겠습니다. 뉴스 엔조이의 편집방향이 이런 시각을 교회에 심으려고 하는 의도성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만 이런 기사를 보면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에 목숨을 걸면서 도대체 무엇을 배운 것입니까? 4대째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을 믿었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자녀가 희생을 당하고 나서 교회와 목사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눈에 비늘이 벗겨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회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눈에 비늘에 벗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게 됨으로 세상의 가치 있고 자랑스럽게 여긴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눈에 비늘이 벗겨짐으로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함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염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과연 오늘 대한민국에 전하여지고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 잘 섬겨서 내가 소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희생자의 어머니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해도 자기의 자녀가 살아나지 못함을 인하여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하여 금식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금식 기도원에서 목사가 하는 말이 기도를 많이 안 해서 죽었다고 한 것입니다. 분명히 살아나온 아이들도 있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과 그 자녀들이 살아나오지 못한 것은 기도를 많이 안 해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그 기도원에서 나와서 국회로 간 것입니다.

 

이 유족이 4대째 믿었다는 하나님이 바로 그 금식기도원의 목사가 전한 그런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이라면 벌써 버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무언가 체험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흔히들 말하는 응답이라는 것들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또는 열심히 새벽기도하고 교회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늘 입술이 부르트도록 수고를 하였습니다.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자신의 자녀의 희생 앞에 그 뜻을 몰라 탄식하고 있을 때에 기도원의 목사는 위로 자가 아니라 재난을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족이 교회의 그 많은 일들을 정리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나서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일 예배와 성가대만 하는 이유는 그 딸의 장례식 때에 교회에서 잘 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사대 째 믿어 왔던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입니까?

 

오늘날 이런 유족이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 주변의 사람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오히려 재난이 되고 괴롭히는 말이 됩니다. 저도 목사로서 병원심방도 가고 장례식도 갑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전해주어야 참된 위로 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헛된 희망을 준다면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고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입에 발린 위로를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만 전합니다.

 

이번 주 월요일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모임에 오시는 분 중에 76세 된 권사님이 저와 일찍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성경 공부하기 전에 만났습니다. 전에도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권사가 되기까지 어느 정도 열심히 교회생활을 했는지는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남편의 일도 잘 되는 것이 없고 아들 둘인 자식도 뭔가 잘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전이 더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권사가 되고 76세가 되기까지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하고 애를 쓰도 교회에서 목사들이 말하는 그런 내용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사람이 잘 지내느냐는 안부전화에도 화가 난다는 겁니다. 본인이 힘들에 살고 있느니 그런 안부조차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병에다 고혈압 당뇨에 머리에는 혹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분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 삶 가운데 잠시라도 평안을 맛보신 적이 없습니까? 잠시 평안은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삶이 힘드니 시편 73편이나 욥기를 자주 보았지만 여전히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못 섬겨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내가 그래도 한다고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고 합니다. 이런 의문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그래서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다가 또는 기도하다가 또는 찬송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고 잠시 동안이라도 평안을 맛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조건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없는데도 원인도 이유도 없이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 안식, 소망, 위로, 감사가 있다면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희생의 공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것만 남기시려고 우리가 잡으려고 하는 다른 것들을 흔들어 버린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 아들의 희생으로 만들어내신 그 신령한 복들이 가득한 곳이기에 이 역사 속에서 맛을 본 자들은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5:7~10절입니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어떻게 사셨습니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금요일 성경공부하고 있는 내용이 이 부분입니다. 시편 22편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이 부르짖음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르짖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욥기서 13:15절 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는 말씀을 다르게도 번역할 수가 있다고 각주가 있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버림받음이 아버지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것이 바로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배웠다는 말씀이 고난입니다. 이 고난으로 순종을 배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 곧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자들은 예수님의 까닭 없는 고난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은 예수님이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 근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을 배우며 믿게 됩니다. 이 말씀 외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 받는 자들에게 줄 다른 위로의 말씀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4: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바로 앞의 말씀은 말씀의 운동력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벌거벗겨 져야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하여 들어갑니다. 이런 자들을 동정하십니다. 체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에 의하여 벌거벗겨 짐으로 대제사장을 바라보고 그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게 됩니다. 또한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환경과 사건들을 통하여 고난이 일어난다면 그 고난도 말씀에 의하여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궁극적인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정신과 의사도, 목사도, 가족도, 친구도 그 어떤 누구도 우리에게 참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재난을 주고 괴롭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고난 중에 바라볼 분은 죄 없으신 분이 죄가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유일한 위로이며 영원한 위로의 맛보기 입니다.

 

요한복음 14:25~27절입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를 통하여 주시는 이 평안은 지금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자리가 저주 받아 죽는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참된 위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