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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8:1~21 언제 말을 끝맺겠느냐? 2016. 5. 4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텔레비전에서 시사문제로 토론하는 내용을 보면 사람들마다 자기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다시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면서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그 말을 이어서 반대토론을 합니다. 우리가 욥기를 보면서 이런 관점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토론자가 네 사람입니다. 그런데 13의 토론입니다. 모두 3차에 걸친 토론을 하는데 지금은 2차 토론의 중간지점입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가 살펴보니 노선이 분명해집니다. 욥 한 사람을 두고 세 사람이 공격을 하는데 세 사람의 공격을 한마디로 줄이면 인과율입니다. 욥의 답변은 그런 인과율로는 자신의 고난을 해석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늘에 호소합니다. 이러한 욥을 공격하는 세 명은 자기들끼리도 공격을 합니다. 욥 한 사람을 말로 제압을 못하느냐고 하면서 자신이 욥을 제압하겠다고 나섭니다.

 

본문 1~2절을 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을 하는데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가라는 복수를 사용합니다. 빌닷이 욥을 공격하면 네가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복수를 사용한 것은 욥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엘리바스와 소발도 함께 포함을 시킵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느 때에 말의 끝을 맺겠느냐고 하는 말은 자기가 욥을 제압하겠으니 너희는 나를 지켜보라는 식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일상에도 나타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 때에 그 결론은 항상 내가 내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자기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상대방이 말을 하고 있어도 무시하고 더 큰 소리로 자기의 말로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 되고 싶어 하는 죄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이제부터는 욥에게 초점을 맞추어 공격을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자신의 동지로 말하기에 우리라고 말하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고 합니다. 이 말은 이미 욥이 한 말을 되받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욥기 12:7절입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소발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지만 욥은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말을 다 들은 후에 이 말을 한 것입니다. 너희가 하는 말은 짐승들도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빌닷이 들었을 때에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다가 엘리바스가 2차 공격을 하고 욥이 그에 대한 답변을 하자말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본격적으로 욥을 공격하면서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미 앞에서 욥이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동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빌닷은 네가 아무리 분노하고 자신을 찢는다고 하여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거나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고 합니다. 이 말은 욥이 옳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네가 혼자 분노로 자신을 찢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만약 네가 정말 의로운 자라면 하늘과 땅도 너를 도와줄 것인데 땅도 바위도 그대로 가만히 있다는 것은 네가 잘못한 것이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슬프고 힘든 일을 만났습니다. 세상이 다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해가 영원히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어김없이 찬란한 해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나 혼자 밤새도록 울분을 토하여 머리카락을 쥐어 뜯어보았자 세상의 풀 한 포기도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지지 않더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빌닷이 욥에게 공격하는 말이 이런 식입니다. 네가 대단한 존재도 아닐뿐더러 네가 의롭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울분을 토하며 자기 몸을 찢을 정도로 분노하지만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으며 바위가 그 자리에 옮겨지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5~6절입니다. “5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6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이렇게 절별로 끊어볼 것이 아니라 21절까지 전체를 한꺼번에 다 보는 것이 좋습니다. 봉독 이렇게 전체를 보면 바람이 가득하게 들은 풍선의 주둥이를 놓아버린 것처럼 말을 쏟아냅니다. 이제 내 말을 듣고 너희의 말을 끝내라는 식입니다. 이 전체의 말은 전부 한 가지의 말입니다. 욥이 지금 당하는 이런 일은 악인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절에 악인은으로 시작하여 21절에서 불의한 자는 이렇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욥의 지금 상황이 악인이라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이런 악인인 주제에 무엇이 의롭다고 하느냐며 공격을 합니다.

 

다시 본문 5~6절을 보시면 욥이 악인이라는 증거를 빛이 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힘껏 살아낸 자들을 불꽃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욥은 불 꺼진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을 꺼질 것이라고 합니다. 욥이 이렇게 망하기 전에는 언제나 불빛이 환한 집이었습니다. 등불만이 아니라 욥의 선행으로 인하여서도 칭찬이 자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불이 다 꺼졌으니 욥 너는 악인이기 때문이라고 빌닷이 공격을 합니다. 지금 욥의 상황이 악인임을 증거 한다는 말입니다.

 

7~10절입니다. “7 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8 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9 그의 발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10 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 11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5절에서 악인 빛이 꺼진다고 하고 나서 매 절마다 가 나옵니다. ‘가 곧 이며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악인이기에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가미, , 올무, 함정이 길목에 있고 무서운 것이 사방에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가는 것이기에 지금 욥이 그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40:28~31절입니다.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빌닷이나 욥은 이 말씀을 직접 들어본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온 땅과 우주에 충만하기에 이런 내용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여호와를 바라보고 바라보지 않기에 피곤하고 힘이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욥의 힘이 다 빠지고 무능하게 된 것은 여호와를 앙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빌닷이 공격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피곤하고 무능하여진 자들에게 여호와를 앙망하여 힘을 얻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빌닷의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이미 멸망한 이스라엘에 대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40:6~8절입니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인생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게 하시고서 여호와를 앙망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베드로전서 1장에서 베드로사도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빌닷의 설교는 지금 기존의 있는 자신들의 힘이 계속 유지 확장 발전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성이라고 하고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체제에서는 까닭 없는 고난과 까닭 없는 은혜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 12~16절입니다. “12 그의 힘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13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14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5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16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17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욥이 지금 당하는 상황을 그대로 말합니다. 욥은 힘이 쇠하고 재앙이 닥쳤으며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고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고 있습니다. 그의 처소는 유황이 뿌려진 것처럼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뿌리가 마르고 가지가 시들며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집니다. 거리에서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악인의 모습이며 이들이 결국 지옥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선악과 이후의 모든 인간이 이런 가치관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 다는 생각은 보편적인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이 착함과 악함의 기준도 자신이 어디에 소속이 되었느냐에 따라 또 달리 해석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욥의 고난은 이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닷은 욥이 악하며 지옥으로 간다고 큰 소리 치는 것입니다.

 

18~21절입니다. “18 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9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20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21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빌닷이 욥을 공격하는 결론이 욥 너는 지옥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8절의 그란 곧 악인이며 욥입니다. 욥이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게 됨으로 동서로부터 오는 자가 깜짝 놀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참으로 불의한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불의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모델이 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불의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떻다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는 미국처럼 부강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들 곧 불교나 이슬람의 나라들은 가난하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 나라 대통령은 이슬람과 교역을 위하여 히잡까지 쓰면서 산유국들에 방문을 합니다. 일본은 온갖 잡신을 다 섬기는 나라이지만 일본이 강하기에 어떻게 하든지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위안부 합의도 정부에서 처리한 것입니다. 이러한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살면서 우리는 악인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세상이나 교회가 다 욥과 같이 된 사람을 악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원래 그렇지만 교회가 이렇게 되는 것이 세속화입니다.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인간의 탐심들을 채워주느라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올해가 종교개혁 5백 주년 되는 해라고 여러 가지 행사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개혁을 했습니까?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1세기부터 3세기까지는 예수 믿음은 곧 핍박이었습니다. 그런데 4세기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중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이러자 핍박받는 기독교가 힘을 가지고 군림하게 되면서 복음도 왜곡되어 간 것입니다. 이런 타락한 중세 천년을 개혁한 것이 개혁교회입니다. 그런데 개혁교회도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 중에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독일 사회학자 맑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에 대하여 몇 번 간략하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왜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발전하였는지를 연구하여 그 원인을 칼뱅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물론 다른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중세 가톨릭 사회는 신분사회였습니다. 거룩한 직업은 사제와 같은 성직자이고 다른 직업들은 세속적인 직업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하면서 마틴 루터는 만인 제사장설, 칼뱅의 예정설과 직업 소명 설은 개혁의 정신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중세 시대에 이런 말들들은 가톨릭의 사제체제의 근본을 뒤 엎는 일입니다. 그 중에 직업 소명설에 대하여 잠시 보겠습니다.

 

칼뱅의 예정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들은 미리 예정 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정을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정된 것을 알 수 있는가 할 때에 직업 소명 설을 말한 것입니다. 사제들만 거룩하게 택함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세속적인 직업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칼뱅의 이러한 직업 소명 설은 세속적인 직업을 통하여 정직하고 성실하게 돈을 버는 것이 예정되어 있는 증거이며 신의 축복으로 본 것입니다. 물론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탐욕과 사치를 위하여 버는 것은 죄악으로 규정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여 좋은 일에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의 예정된 사람의 복으로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돈 맛을 알아버리면 모든 가치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오늘날 천박한 자본주의가 온 세상을 힘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은 미제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마이클 호튼이라는 사람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책도 내었습니다만 한국은 아직 대세가 미국제 복음주의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서부터 늘 듣던 말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잘 섬겨서 미국처럼 복을 받자고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은 주일성수와 십일조라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어왔습니다.

 

이런 주장에 일조를 한 사람이 칼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각으로 욥을 보면 욥이 저주 받은 것입니다. 저주 받은 욥에게 와서 위로한다고 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가 평생에 들어온 뻔한 설교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약하고 어려움이 오고 질병이 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못 섬겨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을 받고 평안하게 살다가 천국에 가서도 높은 자리 차지한다는 욥의 친구들의 말을 설교라고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설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금요일 차재승 교수의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다른 책이 ‘7인의 십자가 사상입니다. 그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십자가에 대해 논의할 때 십자가 그 자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에 내포된 신학적, 교회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십자가 그 자체는 세속주의와 기독교 제국주의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한다. 한국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학적인 경향과 무관하게 승리합시다!’라는 인사를 나눈다. 이런 인사는 세속적인 가치를 극복할 수 있는 영적, 종교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종종 성공, 명예, 권력의 쟁취를 포함하는 세속적인 가치 지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교회는 자주 세속 가치를 추구하는 도박장, 또는 타 문화와 타민족을 말살하는 호전적인 전투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본질적으로 획득과 죽임’(gaining and killing)이 아니라 상실과 죽임 당함’(losing and being killed)이다. 십자가 이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치게 빨리 전환될 때, 희생과 섬김이라는 기독교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기독교 세속주의와 제국주의를 초래하는 천박함은 십자가를 결과 중심적 틀속에서 이해할 때에 생긴다.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조차 예수님의 옷에 더 관심이 많다(19:23). ‘그 자체로서의 십자가는 우리 관심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시 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생명이 오로지 죽음 다음에 오기 때문이고(12:24), 죽음 없이는 생명이 결코 죽음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칼뱅의 이야기와 차재승 교수의 글을 함께 소개한 이유는 우리가 욥기를 보든지 오늘 이 세상을 보든지 간에 우리의 시각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를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나에게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평안한 것이 좋습니다. 이런 것을 선으로 여기고 삽니다. 그런데 반대로 마음도 육체도 쉼이 없고 힘들고 괴로우면 나 자신도 이런 삶이 지옥과 같은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고통을 당할 때에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원인을 생각해 봅니다. 대부분의 원인을 어디에 둡니까? 나는 왜 금 숟가락 물고 태어나지 않았느냐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또는 사회적 구조 악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이 싫다고 이런 시각을 가진 채로 종교에 귀의를 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종교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신과의 관계성 문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에게 잘 보여서 만사형통하라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이런 시각으로 보지 않습니까? 나를 중심으로 두고서 세상을 해석하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 세상만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정직하고 성실하게 잘 살아야 하고 또 신에게도 정성을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지금 빌닷이 욥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십자가 그 자체를 말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지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변론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빌닷이 그 친구들과 욥에게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고 하였지만 이 빌닷이나 욥조차 하나님 앞에서 그 입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자들입니다.

 

욥기 40: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하나님께조차 따져보고 싶었던 욥이 여호와의 말씀 앞에서 자기이 입을 가릴 뿐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16:59~63절입니다. “59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16장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가 한 일은 하나님께 반역한 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배반한 나라를 심판하십니다. 그리하여 남북이 다 망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언약 때문에 용서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용서 받은 자들의 특징은 입을 열리 못하게 됩니다. 욥과 같은 자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과 그 언약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자랑이나 자기변명의 입을 닫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지금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