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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9:1~29 육체 밖에서 2016. 5. 11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2)마음이 초조하구나

 

오늘 말씀은 빌닷의 두 번째 공격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빌닷은 욥의 현재 상황을 보고 아주 확정적으로 너의 죄로 인하여 재앙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이제는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빌닷의 첫 번째 말에서 그 유명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조건이 있습니다. 욥기 8:5~6절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정결하고 정직하면이 조건을 충족시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 한 말입니다. 빌닷만이 아니라 엘리바스와 소발도 이 원칙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도 어려운 이유가 엘리바스나 빌닷이나 소발과 같은 원칙들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들어있습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타락이란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 유혹의 모습이 욥기 시작할 때에 천상회의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부분을 다시 봐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근원에는 인과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욥기 7장에서 찾아본 대로 이러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이며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도 다 이런 인과율입니다.

 

욥기 1:9절입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하나님께서 욥의 신앙을 자랑하실 때에 사탄이 대답한 내용입니다. 이 사탄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탄의 요구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욥의 모든 소유가 다 날아갑니다. 그럼에도 욥은 예배하고 찬송합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며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탄이 까닭 없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는 말이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말이 틀렸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다시 도전합니다.

 

욥기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하나님의 이 말씀에 사탄은 욥의 몸을 치면 주를 향하여 욕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험에서도 욥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기서부터 사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탄의 말로 욥을 공격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욥의 친구들이 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말이 그동안 우리가 세상에서 배운 원리이며 대부분의 설교내용이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사탄의 생각이었는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21~24절입니다.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른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제 삼일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당장 말리고 나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일이 무엇입니까? 의로우신 메시아 하나님의 일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하나님의 일이 성취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 까닭 없이 예수님이 죽으셔야 되는지 베드로는 아직 모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셔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바른 신앙고백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생각이 바로 사탄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사탄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기부인은 무엇입니까? 인과율을 부인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렇게 따랐으니 나는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 차지해야겠다는 이 생각이 인과율입니다. 이런 문제로 제자들이 시기질투하면서 따라간 것입니다. 십자가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이들이 알지 못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4~6절입니다.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핍박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일 오후에 경상 장로회 순회헌신예배 때에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인과율에 사로잡혀 자신의 공적을 많이 쌓은 사람이라면 굉장히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가 되려면 어느 정도 공적이 있어야 장로가 되기에 모두가 걸려 넘어질 내용이 사도가 전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 우리의 인과율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무엇과 싸우는가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과 생각입니다. 이런 이론과 생각을 사탄과 욥의 친구들과 베드로에게서 찾아본 것입니다. 이런 이론과 생각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런 복종이 성도 안에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할 것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게 하면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고 하면서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빌닷의 공격까지 하면 다섯 번입니다. 그런데 열 번이라고 한 것은 항상 공격한다는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야곱이 자기 삼촌 라반이 자기의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거나(31:7)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는(14:22) 것은 항상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욥의 친구들은 항산 이런 논리로 욥을 공격한 것입니다.

 

4~6절입니다. “4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욥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내가 허물이 있다고 하여도 나만 있겠느냐고 합니다. 사소한 허물들로 인하여 이런 재앙을 당한다면 너희도 예외가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자만하여 나에게 수치스러운 것이 있다고 증언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욥의 말이 그들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 없는 자에게 이런 재앙을 내리는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지 않고 있기에 욥의 말을 알 수 없습니다.

 

7~12절입니다. “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1)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아무른 응답도 도움도 없습니다. 그러니 정의도 없다고 탄식을 합니다. 도움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영광을 다 거두어 가버리시고 사면으로 헐고 희망을 나무 뽑듯이 뽑아버렸으니 자신은 죽은 자와 같다고 탄식을 합니다.

 

13~19절입니다. “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욥의 재앙이 극심해지자 그동안 욥의 도움을 받던 자들, 형제, 친척, 식객, 여종, 아내, 자식, 어린 아이들 까지도 미워하고 조롱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20~24절입니다. “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뿐이로구나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피골이 상접하여 겨우 잇몸만 남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생생한 고난의 표현입니다. 이러하기에 친구들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만 친구들이 마치 하나님처럼 욥을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이 말이 책에 기록되고 돌에 기록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욥의 이 말들이 기록되어 오늘 우리에게 읽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25~27절입니다.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2)마음이 초조하구나욥이 까닭 모를 고난을 당하면서 드디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의 대속 자가 살아계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대속 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입니다. 고엘의 사상이 룻기에서 잘 나옵니다. 나오미의 땅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끊어져버린 그 씨도 이어주는 것이 룻과 보아스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대속 자, 고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데 왜 욥은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늘 현세중심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가 현재 여기서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내가 현세에서 잘 되어야 전도가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내가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하면 전도도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룻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방 여인 룻이 나오미의 가정에 시집을 왔는데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고 동서의 남편도 죽는 그런 집안의 하나님을 목숨 걸고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를 위하여, 하나님을 영광을 위하여 내가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이런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자신의 대속 자가 살아계시며 그 분이 마침내 땅 위에 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땅이란 땅의 티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의 티끌로 만들어진 모든 인생들이 그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때에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산 사람들, 이 세상의 원리 곧 인과율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이 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욥은 지금 희미한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6절입니다. 욥은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 이 세상의 원리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인과율을 체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서 자신의 대속 자를 바라보게 될 뿐 아니라 그 분이 이 땅에 서실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합니다. 가죽이 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욥기 2장에서 사탄이 하나님께 참소하면서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몸이 죽는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욥이 죽는다고 하여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부활의 신앙으로 말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정확하게 어디를 말씀하셨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이런 욥기를 통하여서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때는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을 인용하여 주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사도행전 13:34~39절입니다.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지서와 다윗의 시편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준다는 내용은 이사야 53:3절의 말씀인데 이사야 선지자가 다윗 언약을 말합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여호와께로 돌아와 들으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시편 16:10절의 말씀으로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죽어서 썩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썩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으며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다윗이나 욥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 까닭 없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본문 26절을 봅니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합니다. 방금 신약을 찾아본 것처럼 분명한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것을 몸의 부활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우리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야 된다는 말씀도 함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육체의 죽음과 부활의 내용만이 아니라 인과율을 한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과 같은 고통이라는 내용을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저주 받았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죽음과 같은 고난입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욥이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이 낯선 분이 아니기를 그래서 욥의 믿음을 인정하여 주시는 그 하나님 뵙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마음이 초조합니다. 자신이 죽기 전에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초조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가 콩팥인데 성경은 사람의 장기 하나로도 사람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육체 밖에서라는 말이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라는 뜻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런데 드디어 욥의 이런 소망이 욥의 결론에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눈으로 본다고 고백함으로 육체 밖에서 즉 인간의 모든 이론과 논리를 넘어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8~29절입니다. “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지금 욥을 향하여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고 하는 자들이 욥의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아직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인간의 모든 이론과 사상을 넘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까닭 없이 주어지는 고난과 일한 것도 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에게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고 합니다. 결국 욥기에서 심판장이 나타나셔서 욥의 손을 들어줍니다.

 

욥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한 것이 부활의 신앙고백이 됩니다만 이것은 몸이 죽고 부활하는 내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육체의 한계, 우리 육체의 사상과 이론,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속아서 이세상의 풍조를 따라 사는 우리들이 이 한계를 벗어나는 길은 고난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몸의 부활도 소망으로 주어지기에 오늘의 고난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것은 몸의 부활만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의 모든 인과율과 세상의 이론들을 넘어서는 것이 육체 밖에서라는 말에 함의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2:19~21절입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전에 번역에서는 애매히 고난을 받습니다. 또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이런 고난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잘못 해서 매를 맞는 것이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애매하게, 부당하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이 길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십자가를 알 수가 없고 또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22~25절입니다.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고 우리가 길을 찾았습니다. 지금도 이 방법으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내가 세상의 힘을 가지고 보란 듯이 증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이론과 사상입니다. 제국주의적인 발상입니다. 이러한 기독교가 아님을 십자가가 보여주고 있음에도 십자가를 말하면서 세상의 이론을 넘어서지 못하고 인과율을 넘어서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육체의 한계, 세상의 이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 고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육체 밖에서, 세상의 논리 밖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몸의 부활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