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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0:1~29   법대로 하면 2016. 5. 18

 

27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8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빌닷이 욥을 공격한 후에 욥이 답변한 내용이었습니다. 욥은 여전히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런 재앙이 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지난주에 본 대로 죽고 부활하여 본다는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한계 밖에서 주님을 뵙게 되리라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절대타자이기에 우리가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을 이 역사 속에서 감지할 수 있으려면 정말 죽음과 같은 고통과 절망과 고독 속에서 잠시 잠깐 인과율을 넘어서는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문자가 왔습니다. ‘목사님 진짜 내 뜻대로 안되어서 죽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 뜻대로 되고 있는 거지요?’ 답을 보냈습니다.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땅의 티끌인 나에게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고 괴로울 때에 그 상황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나며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나의 주인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주됨이 확장 발전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 내가 잘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하여 신에게 정성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바탕입니다. 지금 욥을 공격하는 자들의 논리가 이와 같습니다. 욥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망한 것은 분명히 욥의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박은 지금까지 보아왔지만 앞으로도 더 계속됩니다. 그러면 욥기서는 왜 이렇게 길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늘 이 논리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를 믿는 것이 타락한 인생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20:1~3절입니다. “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3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욥의 말을 듣고 있던 소발이 자기의 마음이 초조하다고합니다. 그 이유는 욥이 너무나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욥의 말과 태도로 인하여 소발의 마음이 조금하다고합니다. 욥의 말이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책망으로 들렸기에 자신의 슬기로운 마음이 자신으로 하여금 대답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주 본 말씀에서 욥도 마음이 초조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뵙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미 인과응보를 넘어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욥의 친구들과 같이 생각한 그 하나님이 아니기에 마음이 초조(焦燥)하다는 것입니다. 그을릴 에 마를 자입니다. 애를 태워 마음이 졸여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도 욥과 소발의 내용이 다릅니다. 욥은 인과율을 넘어선 하나님 만나기를 애를 태우지만 소발은 자신의 하나님을 욥에게 설득시키기 위하여 초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초조합니까?

 

우리가 처음 복음을 접하면 참으로 낯섭니다. 우리의 본성과 너무나 반대되기에 낯선 복음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볼 때에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이 고백하는 하나님이 낯선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발은 자신이 알고 믿는다는 그 하나님에 대한 체계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흔들리면 자신들이 평생토록 알고 믿어왔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기 때문에 자신들은 어떻게 하든지 욥을 공격하여 욥도 자기들의 사상에 동조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흔들리면 자신들이 흔들린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자기들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욥이 아주 고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발은 욥이 이렇게 재앙이 닥치게 된 것은 악인이 잠시 형통하지만 곧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로 욥을 공격합니다.

 

본문 4~11절입니다. “4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6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7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8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9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10 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11 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이 말이 옳은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옳은 말입니다. 악인이 아무리 형통하여 보여도 그것은 잠시 잠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하여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친다고 하여도 잠시잠깐후면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잠시잠깐 후면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에 있느냐고 할 것이면 그 모든 영광이라는 것들이 다 꿈과 같이 지나가고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자녀들도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할 것이며 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여도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울 것이라고 합니다.

 

소발의 이 말을 보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아무리 지금 번성하고 형통하여 보여도 얼마가지 못하는 인간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누구도 공감하는 말입니다. 물론 권력이나 영광이라는 것들이 평생을 가는 사람들도 있고 대를 이어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들도 강산에 비하면 허무한 것입니다. 더구나 영원에 비추면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식들이 사람들마다 다 들어있습니다. 약자들은 이런 말로 위로도 받습니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에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는 시편 37편과 73편을 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편 37:9~10절입니다.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본문 9절을 보시면 시편 37:10절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한때 존귀와 영광스러움이 있었지만 그것이 졸지에 망한 것을 보니 너는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37편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악인은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하여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를 기뻐하면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 37:35~36절입니다. “35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36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오늘 본문 6~7절을 봅니다. “6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7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이런 말씀을 대비하여 보면 욥이 큰 세력으로 있다가 졸지에 거름더미에 뒹구는 신세가 된 것은 누가 봐도 욥이 악인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에 비추어보아도 욥의 잠시 잠깐 형통은 악인의 형통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너를 다시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시편 73:20절을 봅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본문 8절입니다.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욥의 현실을 보면 누구도 이런 말씀에서 벗어난 답을 찾을 수 없어 보입니다. 욥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렇게 졸지에 망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을 하여도 욥의 친구들에게 먹히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들에게도 먹히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 안에 이미 법체제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항변보다 욥의 친구들의 말이 우리에게 더욱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본문 12~19절입니다. “12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13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14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15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16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18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19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욥의 한 때의 형통이 악으로 되었다는 것을 거듭 주장합니다. 악을 사탕처럼 달다고 입안에 넣고 먹지만 그러나 그 악이 결국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대로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이 5.18 36주기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인터뷰가 보도되었는데 자신은 발포명령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스스로 토해내지도 않습니다. 이 외에도 권력을 쥔 자들과 재물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이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우리 눈앞에서 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마음도 우리 안에 선악체제라는 법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공격하는 그런 악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악인들이 졸지에 망하는 그런 모습으로 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을 보면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법 체제로 해석을 하고 단죄를 하는 것입니다. 지은 죄가 있으니 그렇다고 단정하고 보는 것입니다. 욥을 보니 그렇게 해석하는 길 외에 다른 해석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친구들이 권면한다고 하지만 실상 욥은 그들의 권면과 위로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재난만 주는 위로 자들입니다. 욥이 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자 이제는 없는 말까지 만들어 냅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리고,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욥은 그렇지 않다고 이미 앞에서 말하였고 그들도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법 체제 외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으니 욥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20~23절입니다. “20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21 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22 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 23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공격합니다. 욥의 행복이 오래가지 못하고 졸지에 망한 것을 보고 이렇게 공격합니다. 욥의 이런 현실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로 일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24~29절입니다. “24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 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25 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 26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 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27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8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빌닷 만이 아니라 욥의 친구들이 욥의 고난을 해석하는 틀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살펴본 시편 37편이나 73편에서도 악인이 형통하여 보여도 그 형통은 잠시잠깐이며 곧 멸망할 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하박국 선지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는데 어떻게 악인이 더욱 번성하는데 그대로 두고 보시느냐는 항의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방치하고 계시니 율법의 해이하여 진다고 항의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어떤 답을 주십니까? 시편과 다른 표현이 나옵니다.

 

하박국 2:1~4절입니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이런 현실을 하나님께서 모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코 거짓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루어지기는 하는데 더디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게 보이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 37편과 73편과 하박국과 같은 자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계시느냐는 질문에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발이나 빌닷이나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습니까? 네가 죄를 지었으니 그런 재앙을 받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너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인과응보로 하나님을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의 논리에 승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왜 이렇게 더디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의 눈앞에 바로 바로 나타나면 하나님을 잘 믿을 텐데 왜 이렇게 더디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베드로후서 3:7~10절입니다.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노아 홍수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물로 멸망하였습니다. 세상은 망하지 않는 줄 알고 살다가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세상은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하여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이 아니라 주의 택한 백성들에 대하여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너희를 대하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법대로 다루시지 않고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벧후3:15).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법대로 다루신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아직도 법에 묶여 있습니다. 권선징악이라는 이 법으로 욥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시편 130:1~3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누가 설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 자기 의로 설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살펴보실 때에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십니다(53:3). 욥의 친구들만이 아니라 욥도 하나님 앞에 자기 의로 설수 없습니다. 욥도 하나님 앞에 입을 가릴 뿐입니다(40:4).

 

시편 130:4~8절입니다.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법대로 하면 하나님 앞에 설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의 용서를 바라는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가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십니다. 사유하심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기를 통하여 법으로 하면 얼마나 인간이 잔인해 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얼마나 자기 의를 붙들고 사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법으로 하면 다 심판을 받지만 그 법을 넘어서는 용서를 고난 중에 보게 됩니다.

 

월요일 광주에서 요나서의 말씀을 나누고 왔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이 일어나고 물에 던져짐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합니다. 물고기 뱃속을 스올이라고 합니다. 스올은 음부 곧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며 확대하면 지옥으로 말합니다. 이런 곳에 쫓겨났을지라도 자신은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만에 살아나옵니다. 법대로 하면 이미 죽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로 음부에서 살아나왔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하라고 합니다. 부득불(不得不) 전하기는 하지만 대충전합니다. 이 성이 40일 만에 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도 안합니다. 사흘 길을 하루만 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회개가 일어납니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회개가 일어나서 짐승까지 금식시키며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요나서 4:1~3절입니다.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이며 남 유다도 위협한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이 싫어서 도망갔다고 합니다. 주께서 은혜로우시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도망갔다고 하면서 이제 사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죽다가 살아나도 인간이 안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인애로 살아난 자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죽어도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4~7절입니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어떤지 잘 보여줍니다. 죽다가 살아온 요나입니다. 법대로 하면 이미 물속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록 쫓겨났을지라도 주를 바라본다는 그 믿음으로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이미 법을 넘어서는 은혜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니느웨성이 용서 받는 것을 보고 죽어도 마땅 하다고합니다. 이런 요나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실물 교육을 다시 시키시기 위하여 박 넝쿨을 자라게 하십니다. 요나가 니느웨 성이 망하는지 보려고 성 동쪽 언덕쯤에 앉아서 기다립니다. 아무 것도 가릴 그늘이 없는데 박 넝쿨이 그늘이 되니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박 넝쿨을 벌레가 갉아먹게 하셔서 시들에 버리게 합니다.

 

8~11절입니다.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에 요나는 아무 말도 못합니다. 이것으로 요나서는 끝이 납니다. 요나 자신이 율법으로 하면 이미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데 물고기 뱃속 곧 음부에서 회개합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회개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 음부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비록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 쫓겨났을지라도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하는 그 믿음으로 살아납니다. 이것은 법을 넘어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데도 살아나서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서 심판을 돌이키시는 것을 보고 죽어도 좋다고 하는 자가 바로 요 나입니다.

 

이런 요나와 같은 자가 욥의 친구들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오늘 우리들의 모습니다. 법대로 하면 이미 멸망 받아 마땅한 자들인데도 어쭙잖은 자신의 의라는 법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세상 만사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죽고 싶어 합니다. 하룻밤에 났다가 말라 버리는 박 넝쿨과 같은 것들로 인하여 자기가 괴롭다고 죽을 정도로 성 내어도 마땅하다고 여기고 있는 자가 요나이며 이스라엘이며 욥의 친구들이며 우리들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건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왜곡된 법 체제가 우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조롱을 받고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로마서 1:16~17절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는 복음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복음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 사람이라면 법대로 합시다!’ 라는 말을 합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입이 닫혀 질 것입니다. 요나가 유구무언이 되듯이, 욥의 세 친구들만이 아니라 욥조차 하나님 앞에 입을 닫듯이, 우리가 법대로 하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로 담당하시고 자신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그 한량없는 십자가의 은혜와 긍휼이 날마다 새로워질 지고 또한 흘러 차고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