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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1:1~34 헛된 위로 참된 위로 2016. 6. 1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3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 34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

 

광주모임에서 만난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 다니면서 무언가 잘 된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수 십 년을 했더니 권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도 자식들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자신은 온갖 병이 다 들었습니다. 늘 한숨만 나옵니다. 병원에서 화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복은커녕 고생만 하고 있으니 어디에 하소연 할대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겨우 버틴 것은 시편 73편의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말씀이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의인이라는 확신도 없기에 한숨만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에게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은 위로가 아니라 앞에서 본 대로 재난을 주를 위로 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보면 헛된 위로일 뿐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봉독 욥의 말입니다.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2절의 번역이 모호합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을 보면 너희가 내 말을 자세히 들어주는 것이 나의 위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문맥으로 보면 이 번역이 자연스럽습니다. 우선 나의 말을 자세히 듣고 나서 그 다음에 나를 조롱하려면 하라는 말입니다. 이 본문을 표준 새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1 욥이 대답하였다. 2 너희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말아라. 너희가 나를 위로할 생각이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내게는 유일한 위로이다. 3 내게도 말할 기회를 좀 주어라. 조롱하려면, 내 말이 다 끝난 다음에나 해라.” 우리도 욥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4~6절입니다. “4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5 너희가 나를 보면 놀라리라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6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욥의 원망이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하여 지금까지 부르짖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어떻게 까닭 없이 이런 고난이 닥칠 수 있느냐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 입을 가리는 것입니다. 욥은 이것을 기억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온 몸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욥을 위로한다고 한 말이 오히려 재난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세상을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보아도 악인이 형통함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7~13절입니다. “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8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9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10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11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12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3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느냐고 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말합니다. 악인들은 후손도 번성하고 집은 평안하며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소들은 새끼를 배고 낙태하는 일도 없다고 합니다. 저의 집에서 기르던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젓을 물리지 않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미 소가 외모도 사나워 보였는데 성격도 그러하였습니다. 자기 새끼에게 젖을 물리지 않고 발로 차내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저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수요일 가지도 않는데, 작은 개울을 건너서 가는 교회당까지 수요일도 갔습니다. 그리고 기도 하였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다 용서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어미 소가 송아지의 젓을 먹일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미 소가 젖을 주지 않아서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악인인 집에서는 소가 낙태도 안하고 새끼를 잘 낳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자녀들은 다복하게 자랍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 부자라서 어려서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랍니다. 억지로 시키는 과외가 아니라 집안 환경자체가 아주 자연스럽게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악기를 배우며 연주하는 정도의 집안입니다.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도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사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처럼 죽을 때에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잘 죽더라는 말입니다. 욥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욥의 친구들이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말을 반박하기 위하여 하는 말입니다.

 

14~15절입니다. “14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15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악인이 형통하게 살다가 평안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악인의 형통이 어떠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 자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신을 섬기며 기도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미 자신들이 인간의 복이라고 하는 것들은 다 누리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모호한 번역이라서 표준 새 번역을 14절부터 봅니다. “14 그런데도 악한 자들은, 자기들을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 이렇게 살면 되지,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가 무엇이냐고 한다. 15 전능하신 분이 누구이기에 그를 섬기며, 그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한다. 16 그들은 자기들의 성공이 자기들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을 용납할 수 없다.”

 

좀 더 분명하게 뜻이 드러납니다. 형통한 악인들은 자기들의 성공이 자기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살아갑니다. 욥은 그런 생각을 용납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자신은 끝까지 하나님께 구하겠다고 합니다. 악인은 형통하니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능력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욥과 같이 의롭게 살다가 이렇게 망해버리면 이런 하나님은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구합니다. 성경에서 이런 고민들에 대하여 그동안 시편 37, 73, 하박국서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예레미야와 말라기를 통하여 이런 고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12:1~2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의 질문입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을 무슨 까닭이냐고 묻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렇게 장성하고 열매를 맺었는데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깝지만 그들의 마음을 멀다고 합니다.

 

말라기 3:13~15절입니다.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예레미야나 말라기시대에도 이런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현실에서는 심판 받는 일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본문 17~21절입니다. “17 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18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날려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 19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0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할 것이니라 21 그의 달수가 다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17절은 악인이 벌을 받는 다는 것이 희박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뒷부분은 악인이 벌을 받을 것이라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새 번역으로 보면 좀 더 분명합니다.

 

“17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18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된 적이 있느냐? 폭풍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된 적이 있느냐? 19 너희는 "하나님이 아버지의 죄를 그 자식들에게 갚으신다" 하고 말하지만, 그런 말 말아라! 죄 지은 그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제 죄를 깨닫는다. 20 죄인은 제 스스로 망하는 꼴을 제 눈으로 보아야 하며,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한다. 21 무너진 삶을 다 살고 죽을 때가 된 사람이라면, 제 집에 관해서 무슨 관심이 더 있겠느냐?”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지거나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는 의문문으로 번역함으로 그런 일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진노로 고통에 빠지거나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폭풍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된 적이 있느냐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악인이 벌을 받는 것이라고 욥에게 말하고 있기에 욥은 악인이 벌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되느냐고 항의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에 대하여 우리도 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비의 죄를 자식들에게 갚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도 잘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본인이 잘 못했으면 본인이 벌을 받아야 자기 죄를 깨달을 것이 아니냐고 욥이 말합니다. 이 말은 욥의 친구들의 논리가 틀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인들이 살아생전에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죽을 때도 평안히 죽어버린다면 그 사람이 죽고 나서 자기 집에 무슨 관심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그 뒤의 일을 알기나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22~26절입니다. “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23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24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25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26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이곳도 새 번역으로 봅니다. “22 하나님은 높은 곳에 있는 자들까지 심판하는 분이신데, 그에게 사람이 감히 지식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 23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기력이 정정하다. 죽을 때에도 행복하게, 편안하게 죽는다. 24 평소에 그의 몸은 어느 한 곳도 영양이 부족하지 않으며, 뼈마디마다 생기가 넘친다. 25 그러나 어떤 사람은 행복 하고는 거리가 멀다. 고통스럽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다. 26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은 다 함께 티끌 속에 눕고 말며, 하나같이 구더기로 덮이는 신세가 된다.”

 

이 말은 우리가 제대로 인생을 해석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아주 논리정연하게 그들의 역사와 전통과 경험으로 악인은 벌을 받는 것이며 의인이 복을 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막상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해 보니 그렇게 인생을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자신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욥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고 보니 악인이 형통한 채로 살다가 죽을 때도 평안하게 잘 죽는 자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이런 사정을 모르기에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르치는 자들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부터 보시면 욥이 고난당하기 전의 시각이 교정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아직 이런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 까지 기운이 충실하고 안전하고 평안하며 그의 그릇에 젖이 가득하고 골수는 윤택하게 살다가 죽음도 평안하게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평생 행복을 맛보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은 다 함께 티끌 속에 눕고 하나같이 구더기로 덮이는 신세가 됩니다. 욥의 이 말은 악인이라고 하여도 이 땅에서 그 보응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27~33절입니다. “27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속셈도 아노라 28 너희의 말이 귀인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이 살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 하는구나 29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30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 31 누가 능히 그의 면전에서 그의 길을 알려 주며 누가 그의 소행을 보응하랴 32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33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앞서 갔으며 모든 사람이 그의 뒤에 줄지었느니라이곳도 새 번역으로 봅니다.

 

“27 너희의 생각을 내가 다 잘 알고 있다. 너희의 속셈은 나를 해하려는 것이다. 28 너희의 말이 "세도 부리던 자의 집이 어디에 있으며, 악한 자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느냐?" 한다. 29 너희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닌 견문 넓은 사람들과 말을 해 본 일이 없느냐? 너희는 그 여행자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느냐? 30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아라.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항상 살아남는 사람은 악한 자라고 한다. 31 그 악한 자를 꾸짖는 사람도 없고, 그가 저지른 대로 징벌하는 이도 없다고 한다. 32 그가 죽어 무덤으로 갈 때에는, 그 화려하게 가꾼 무덤으로 갈 때에는, 33 수도 없는 조객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고, 골짜기 흙마저 그의 시신을 부드럽게 덮어 준다고 한다.”

 

욥의 친구들의 속셈을 욥이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욥을 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을 해하려고 한다는 말은 지금 욥이 악인이기에 벌을 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견문이 넒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항상 살아남는 사람은 악한 자라고 합니다. 인재(人災)든 천재지변(天災地變)이든 일어나면 누가 살아남게 됩니까? 평소에 악하게 살아서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안전한 곳에 삽니다. 그런데 인재든 천재지변이든지 일어나면 당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나름대로 양심껏 살아서 가난한 자들이 더 많은 재앙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악한 자들을 꾸짖고 징벌할 자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죽어 무덤에 갈 때에도 화려한 무덤에 수많은 조객들이 따르고 흙마저 그의 시신을 부드럽게 덮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게 살다가 죽을 때도 평안히 죽고 무덤도 잘 꾸며 놓았다는 말을 함으로 욥의 친구들의 인과응보적인 생각이 틀렸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 34절을 봅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새 번역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빈말로만 나를 위로하려 하느냐? 너희가 하는 말은 온통 거짓말뿐이다.” 욥의 친구들이 하는 위로라는 것이 헛된 위로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이 거짓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욥기 21장을 통하여 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한 것은 지금 그들의 가치관을 고수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그들의 위로가 빈말이 되고, 헛된 위로가 되며,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논리와 그들의 경험과 그들의 전통으로는 참된 위로를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참된 위로입니까?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모든 생각과 뜻이 드러나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의 속셈이 드러나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들이 다 드러나야 합니다. 인과응보 사상이 우리들에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간관계든 하나님과 관계든 저울질 하면서 거래하려고 합니다. 한 순간인들 계산기가 우리 머릿속에서 돌아가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과 이론들이 말씀에 의하여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야 합니다.

 

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4절의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으로 벌거벗겨 짐으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큰 대제사장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이 분은 승천하신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십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벌거벗겨 져야 이 예수님을 굳게 믿게 됩니다. 이 분만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욥의 고난의 현장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이 욥과 같은 시험과 고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로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받았고, 받고 있고, 받을 것입니다.

 

디도서 2:11~13절입니다.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자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방금 앞에서 본 히브리서 4장의 말씀처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가져다주실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구약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 그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또한 성령이 임함으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복음이 성도에게 유일한 위로이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았기에 성도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우리는 늘 말씀에 의하여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최종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사는 자들은 영원한 은혜를 가져다주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참된 위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