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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2:1~30 하나님과 화목하라 2016. 6. 8

 

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24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26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29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30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방금 함께 읽은 이 말씀의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욥기라는 배경이 없이 이 말씀만 주어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말씀에 틀린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한 관계가 된다면 복이 네게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앞에서도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 이런 말씀으로 목사님이 권면을 한다면 우리는 당장 하나님과 화목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느냐며 말라기의 말씀을 끌어 올수도 있고, 우리와 하나님이 사이에 죄가 가려져 있어서 복이 오지 않는다는 말씀도 합니다.

 

지금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이 말이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어온 설교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져야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겸손하게 돌아가면 네가 회복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하라고 합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쌓았다면 그것을 내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며 가장 좋은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이 너의 보화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 적용할 좋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았다는 것은 결국 자본을 척도로 말합니다. 칼뱅도 직업 소명 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재산이 증식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욥과 비슷한 재앙을 당한다면 그 사람에게 무언가 불의한 재산이 축적되었을 것이라고 본인이든 타인이든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에 엘리바스가 말한 이 논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세 친구들이 이렇게 집요하게 네가 죄인이기에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라고 하지만 욥은 수긍하지 않습니다. 엘리바스는 이러한 욥에게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여 지면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갚을 수가 있고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너의 길에 빛이 비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얼마나 교만해 보였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성경적인 말씀입니까?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며 멸망의 선봉입니다. 그래서 겸손하여지면 죄인이라도 건지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과 함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구체적인 적용거리들을 성경을 인용하여 전하면 우리는 그 말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인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여러 성경을 인용하면서 실천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화목이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이전보다 더 큰 부자가 되게 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욥을 인용하여 설교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환난을 빨리 벗어나서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 그런 말들에 아멘하면서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복을 받지 못하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런 질문에 답할 수많은 말씀들이 또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였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였다고 하면 아직 잔이 채워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때가 있다고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까?

 

본문 1~4절입니다.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엘리바스가 세 번째 욥에게 하는 말이며 마지막 말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욥에게 말하고 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말과 욥의 답변도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의 말에 단 한 마디도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욥의 말을 인정하게 된다면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원칙이 무너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한 말들을 인용하면서 욥을 지독하게 몰아 부칩니다. 욥이 자신이 당하는 이런 고난은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원인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욥이 악인이 형통하게 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까지 들은 엘리바스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도움과 기쁨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의롭다고 하여도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과 도움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복을 받았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대단한 도움을 드렸기에 보상차원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기 의로움으로 복을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인과율입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재앙을 당하고 나서 자신이 의로운데도 하나님이 이런 재앙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런 말에 엘리바스가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의 경건함으로 인하여 너를 이렇게 책망하고 심문하느냐는 말을 합니다.

 

엘리바스와 욥의 친구들은 이런 체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네가 경건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앙이 왔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다우시겠느냐는 말입니다. 무언가 죄를 지은 것이 있기에 이런 재앙이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말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답답하지만 끝까지 견디고 있습니다. 이것을 욥의 인내라고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욥의 손을 들어주십니다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시각으로 보면 세리와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세 친구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한 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과율에 빠져 있는 인간의 실상임을 욥기는 보여줍니다.

 

본문 5~9절입니다. “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6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7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8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9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엘리바스가 욥의 악이 크고 죄악이 끝이 없다고 하면서 구체적은 죄의 목록들을 늘어놓습니다. 욥이 동방의 의인으로 재산도 많아졌다면 털어서 먼지날 것이라는 말로 아주 세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엘리바스가 말하는 이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욥기 31:16~23절입니다.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17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19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 본 체 했다면 20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21 만일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22 내 팔이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 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욥의 자기 의로움에 대한 변호를 이 본문에서 자세히 보겠습니다만 지금 엘리바스가 말하는 그런 죄를 지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였기에 그 하나님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재앙이 닥친 것에 대하여 욥도 지금 미치고 환장할 지경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을 좀 해 주시면 좋겠다고 항변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이런 욥이 교만해 보이는 것입니다. 감히 피조물인 주제에 어디서 감히 높으신 하나님과 막 먹으려고 그러느냐며 책망하는 것입니다.

 

본문 10~12절입니다. “10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12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별이 얼마나 높은가욥에게 엘리바스가 그러므로라는 말로 공격을 합니다. 욥 네게 아무리 의롭다고 하여도 너의 그 의로움이 크고 높으신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분명히 하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욥의 친구들이 한 말들이 있습니다. 여자에게서 나온 자가 어떻게 깨끗하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와 달도 맑지 못한데 하물며 흙에서 나와 흙에 나온 것을 먹고 흙으로 돌아가 구더기들이 들끓게 될 땅의 티끌 주제에 무엇이 의롭겠느냐는 말입니다. 욥의 악이 크며 그 죄가 끝이 없다고 책망합니다. 이러한 욥의 죄로 인하여 이런 재앙이 왔다고 책망을 합니다.

 

본문 13~20절입니다. “13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14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15 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16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 17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18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 19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20 우리의 원수가 망하였고 그들의 남은 것을 불이 삼켰느니라 하리라악인의 형통함을 말할 때에 악인들이 이런 식으로 말한 것처럼 욥도 지금 이런 악인들처럼 하나님이 나의 사정을 모른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을 새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13 그런데도 너는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겠으며, 검은 구름 속에 숨어 계시면서 어떻게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 14 짙은 구름에 그가 둘러싸여 어떻게 보실 수 있겠느냐? 다만 하늘에서만, 왔다 갔다 하실 뿐이겠지!" 하는구나. 15 너는 아직도 옛 길을 고집할 셈이냐? 악한 자들이 걷던 그 길을 고집할 셈이냐? 16 그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사로잡혀 갔고, 그 기초가 무너져서 강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17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좀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전능하신 분이라고 하여 우리에게 무슨 일을 더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8 그들의 집에 좋은 것을 가득 채워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데도 악한 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나는 이해할 수 없다. 19 그런 악한 자가 형벌을 받을 때에, 의로운 사람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죄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비웃기를 20 "과연 우리 원수는 전멸되고, 남은 재산은 불에 타서 없어졌다" 할 것이다.”

 

지금 엘리바스의 말은 악한 자들이 형통할 때에 건방지고 교만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말은 악인이 형통하게 사는데도 아무른 벌도 없으니 점점 죄 짓기에 간이 커져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욥도 이런 악인들과 마찬가지라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게 살았는데도 이렇게 재앙을 당하였으니 하나님이 계시다면 말씀 좀 해 달라고 하는 욥의 모습이 하나님이 없다고 안하무인으로 살아가는 악인과 마찬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과정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악인과 욥이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본문 21~30절 새 번역 입니다. “21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22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여 주시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씀을 네 마음에 깊이 간직하여라. 23 전능하신 분에게로 겸손하게 돌아가면, 너는 다시 회복될 것이다. 온갖 불의한 것을 네 집 안에서 내버려라. 24 황금도 티끌 위에다가 내버리고, 오빌의 정금도 계곡의 돌바닥 위에 내던져라. 25 그러면 전능하신 분이 네 보물이 되시고, 산더미처럼 쌓이는 은이 되실 것이다. 26 그 때가 되어야 비로소 너는, 전능하신 분을 진정으로 의지하게 되고, 그분만이 네 기쁨의 근원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27 네가 그분에게 기도를 드리면 들어주실 것이며, 너는 서원한 것을 다 이룰 것이다. 28 하는 일마다 다 잘 되고, 빛이 네가 걷는 길을 비추어 줄 것이다. 29 사람들이 쓰러지거든, 너는 그것이 교만 때문이라고 일러주어라.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신다. 30 그분은 죄 없는 사람을 구원하신다. 너도 깨끗하게 되면, 그분께서 구해 주실 것이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세 번이나 걸쳐서 한 말의 결론입니다. 네가 지금 이런 꼴을 당한 것은 하나님과 불화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너는 의롭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너의 교만이라고 책망하면서 빨리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하는 말이 엘리바스의 결론입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말에 우리도 별다른 이의를 달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평소의 생각도 엘리바스의 생각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욥이 되어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참으로 가슴을 쥐어뜯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입니다.

 

어제 밤늦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니 미드에서 신의 뜻이라는 그런 제목이 보였습니다. 범죄 수사물이인데 한 가정의 남편이 바람을 피워 말다툼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래서 분위기 전환하려고 휴가를 갔는데 바람을 피운 그 여인이 화가 나서 이천사백 킬로미터를 쫓아온 것입니다. 남자는 그 여자를 만류하기 위하여 나간 사이에 범인이 와서 아이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이들 엄마가 온 몸으로 저항하다가 죽었습니다. 그 남편과 여자가 용의자로 체포되었는데 객관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이때 수사관들이 실제 범인을 추적하여 내는데 5년 동안 같은 날짜에 어린 아이들만 죽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범인은 오년 전에 지진으로 자기 아이가 죽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교역자로 일하다가 이런 일을 당하였기에 이런 신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이 죽은 그 날짜에 자기 아이 또래의 아이를 살해하면서 신에게 복수를 한 것입니다. 직업은 보안업체 직원으로 바꾸었기에 더욱 잡기 힘든 범인이었습니다. 일 년 동안 그 복수심을 참는다는 것은 정말 힘이 든다는 수사관의 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참았는가 보니 본인의 등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신에 대하여 복수를 한다고 오년 동안 그렇게 해 온 것입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한 여인도 오년 전에 그 지진으로 자기 남편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범인이 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을 때에 설득하여 아이를 무사히 구하고 체포합니다. 동일한 사건인데 어떤 사람은 신에게 복수하느라 오년 동안 그 날짜에 아이를 살해하고 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수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엘리바스와 같은 입장에 있다면 욥의 입장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이론 체계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을 자신들의 전통대로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일은 결코 우리의 원인이 투입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엘리바스 식으로는 결코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 5:14~17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육신을 따라 판단했습니다. 엘리바스가 욥을 보는 식으로 바울이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바울의 눈에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는 저주 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를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 하는 자들은 율법을 무너뜨리는 이단들이기에 이들은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잔멸(殘滅)하려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잔인하게 다 해쳐서 멸망시키려고 달려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제야 그의 눈에 구약의 수건이 벗겨지고 새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육신의 어떤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로 완성된 그 새 언약 안에 있느냐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18~21절입니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던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는지를 증거 하는 것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심으로 세상을 화목하게 하시는 방식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고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 화목제물이 되시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이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어 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 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와 저주로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화목이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