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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3:1~24:25 어찌하면? 2016. 6. 15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22장은 엘리바스가 마지막으로 욥에게 말했습니다. 23장과 24장은 욥의 답변이지만 엘리바스의 말에는 별 대꾸도하지 않습니다.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갈 것이냐고 합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세 번을 들어보아도 늘 같은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회개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욥의 친구들의 말은 정말 재앙을 주는 헛된 위로 자들입니다. 그래서 독백처럼 하나님께 하소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답변 후에 빌닷이 아주 짧게 욥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욥의 답변은 엄청 길어지면서 소발의 공격은 없습니다. 이 세 친구들의 논리가 일반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지만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기에 더 이상 말이 없게 됩니다.

 

본문 1~2절을 봅니다. 욥이 대답을 합니다. 새 번역으로 2절을 봅니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욥 자신의 탄식할 상황은 욥 자신이 까닭 없이 재앙을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친구들이 위로한다는 것이 오히려 재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절하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욥은 이렇게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는데도 하나님은 아랑곳없이 그 무거운 손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3~5절입니다. 이런 처절한 고통의 탄식 속에서 자신이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갈 수 있는지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어찌하면?’ 입니다. 어찌하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가갈 수 있겠느냐는 말은 자신이 당하는 이 현실에 대하여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면 하나님 앞에서 호소하고 변론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그 앞에서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면 무슨 말로 나에게 대답하여 주시면 좋겠다는 탄식입니다.

 

6~7절입니다.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하소연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큰 권능으로 나와 더불어 다투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친구들은 욥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공격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크신 하나님께 자신이 변론을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무죄하다고 해 주실 것이기에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8~9절입니다.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하나님 앞에 나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말을 하고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여 주실 것인데 문제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식으로 말하면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다 돌아봐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면 하나님을 뵙고 자신의 사정을 아뢸 수 있을지 탄식을 합니다.

 

10~12절입니다.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1)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0절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거의 기억을 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이 말로 위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자신의 답답함을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욥의 발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따랐다고 합니다. 자신의 입술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합니다. 정한 음식이란 일정하게 먹는 음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욥은 일정한 음식을 먹는 것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정한 음식보다 더 중요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있습니까? 욥은 일정한 음식을 먹는 것보다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지만 하나님을 뵐 수가 없다는 하소연입니다.

 

13~17절입니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이 일정하시며 반드시 자기의 뜻을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능히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에 있어서 사람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을 욥에게 이루시는 것은 알겠는데 그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과 이루어지는 과정은 욥이 전혀 예측할 수도 없고 욥의 뜻대로 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두렵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둠이나 흑암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의 이런 상황보다 더 두렵고 떨리는 것은 바로 앞에서 본 대로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24:1절입니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새 번역으로 봅니다. 어찌하여 전능하신 분께서는, 심판하실 때를 정하여 두지 않으셨을까? 어찌하여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 받을 날을 정하지 않으셨을까?” 욥의 안타까움이 이런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을 하시는 것은 알겠지만 그 때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심판 받을 때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 받을 날을 정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탄식들이 나올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그렇게 악하게 산 것도 아닌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가 하는 말들을 세상 사람들도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이런 말들을 합니다. 내가 교회의 다른 사람들보다 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나에게 오는가 하는 말들을 합니다. 그래서 늘 달고 다니는 말이 어찌하여?’ 입니다. 자신이 욥처럼 의롭지도 못하면서도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그런 원망들이 가족에게로 이웃에게로 화살을 돌립니다. 이런 모습들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원망입니다. 그런 이웃을 배치시켜 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24:1절을 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여 놓으시지 않았느냐고 항의를 합니다만 하나님의 때는 이미 다 정하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때와 방식이 아니기에 어찌하여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욥은 친구들의 공격은 이미 안중에도 없습니다. 친구들의 논리들은 자신도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 어찌하면 하나님을 만나서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하소연을 합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하나님의 때를 정하여 놓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악인이 형통하는데도 그대로 두시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데도 그대로 두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뜻을 세워두셨습니다. 모든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뜻이 정하여져 있습니다.

 

이사야 46:9~11절입니다. “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1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본문은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책망하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옛적 일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이 하신 말씀을 이루어내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10절을 보시면 시초부터 종말을 알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시초라는 단어는 어떤 일의 시초를 말하지만 천지창조를 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부터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고 종말을 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창조는 종말이 목표이기에 종말이 창조보다 앞선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창조된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세상을 멸망시킬 목적으로 창조하였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심판과 구원을 말씀하시지만 더 넓혀보면 창조와 구원과 심판도 이미 시작 하실 때에 종말을 알리시고 일하는 분이십니다.

 

베드로후서 3:7~10절입니다.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말씀으로, 노아 홍수로 심판하신 그 말씀으로,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은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심판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심판을 믿는 자들에게 그 심판이 더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에 대하여 라는 말은 이 편지를 받는 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로 모였다고 하면서도 멸망할 세상의 것들로 인하여 울고불고 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 날과 그 때를 사모하며 사는 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태초로부터 세상의 멸망을 다 알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옛 창조는 새 창조가 목적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자라면 의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일이 우리 인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 고난을 당할 때에 물론 자기 자신이 잘못해서 오는 고생도 많습니다. 자신이 잘못하여 오는 고생을 고난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에게는 이유를 모르는 고난이 반드시 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하여 욥처럼 주의 날과 주의 때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시 24:1절을 봅니다. 어찌하여 때를 정하여 놓지 않았느냐는 욥의 항변입니다. 악인이 심판을 받고 의인이 보상을 받을 그런 때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에 탄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욥은 더 기다려야합니다. 고통과 신음 속에 더 기다려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소망이 조금 나옵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 때를 잘 알 수가 없지만 지금이 연단 중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악거린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자신의 때를 정하여 두시고 그 일을 우리와 의논하지 않으시고 이루어가십니다. 우리와 의논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비가 그 고치에서 나올 때에 얼마나 힘들게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고치 집을 조금 찢어 주니 나비가 쉽게 나와서 날아가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날지 못하여 그냥 추락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비가 그 고치 집에서 나오려고 고통 하는 그 시간이 날개에 힘을 기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해석이 안 되는 고난들이 있지만 그런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육체 너머를 봐야 하며, 이 세상 너머를 봐야 합니다. 이 세상은 끝이 있습니다. 불태워집니다. 이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24:2~8절입니다. “2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3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4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5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 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6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7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 8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악인들로 인하여 가난한 자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를 말합니다.

 

9~12절입니다. “9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10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11 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12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가난한 자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악인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부르짖음이 이렇게 가득하여도 하나님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13~17절입니다. “13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14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15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16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17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죽이며 간음하는 자들이 이렇게 횡행하는 세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어두움의 세력이라고 합니다.

 

18~20절입니다. “18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20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21 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욥도 악인들의 멸망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결론이 어떻게 될 것을 알고 있기에 악인의 최후는 심판임을 말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악인들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2~25절입니다. “22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23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24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25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

 

욥이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알게 된 것입니까? 욥의 친구들은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엄격한 바리새주의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 체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자신도 악인의 심판이 있을 것을 알고 또 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빈틈없이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작정한 뜻을 어느 누가 돌이킬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이런 고난 가운데서 어찌하면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을지? 어찌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지 탄식을 합니다. 이러한 탄식의 끝을 보겠습니다. 욥은 의인이라고 하여도 전혀 죄가 없는 자가 아닙니다. 나중에 욥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을 가리고 회개하는 죄인이지만 참으로 어찌하여를 부르짖는 의인이 있습니다.

 

시편 22:1~2절입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다윗의 시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는 부르짖음입니다. 이 부르짖음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27:46절입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르짖습니다. 버림받아서는 안 되는 유일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어찌하여 버리느냐고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 버리심이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에게 주시는 유일한 자리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천사들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죄 없이 하나님아버지께 버림받는 그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바라볼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뿐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멸망할 이 세상에서 뽑혀져 나오는 과정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수많은 고난을 당하고 삽니다. 그런데 택한 백성들은 고난을 통하여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고생을 통하여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남에게 보복을 하거나 자폭하거나 자학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까닭 모를 고난을 통하여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36~40절입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믿음을 따라 산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히브리서 12:1~2절입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구약의 허다한 증인들이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유익하다는 것은 그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앞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잠시잠간 받는 고난이 영원한 영광이 이루어지기에 답이 없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에서도 이런 말씀과 증인들로 인하여 우리는 오늘도 믿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구약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가는 길이 이 길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어찌하면?’ ‘어찌하여의 답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안에 들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