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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5:1~6 사람이 어찌 의롭겠느냐? 2016. 6. 22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수아 사람 빌닷의 말로 욥을 공격하던 세 친구들의 말이 끝이 납니다. 빌닷의 말이 아주 짧아지고 그 다음으로 나와야 할 소발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왜 이렇게 말이 줄어들고 소발은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욥의 고집에 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해도 소용없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논리의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한계에 부딪혔지만 욥처럼 중보자를 요청하지 않고 그저 말을 마감합니다. 이것은 욥의 인내에 이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논리를 욥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마지막을 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빌닷이 마지막으로 욥에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과 높으심을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욥의 친구들도 욥도 우리도 다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높으신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는데 욥이 지금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내용은 22장에서 이미 봤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면 너도 화평한 삶이 될 것이라는 그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시하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방법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음을 이들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느냐고 합니다. 이 말은 자기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화평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욥을 향하여 너는 하나님께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교만하다는 책망을 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빌닷과 욥의 친구들의 공격에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욥처럼 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은 인간의 의로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음을 알기에 빌닷의 말이 우리에게 너무나 합당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욥은 항복하지 않습니다.

 

3절입니다. 그의 군대를 계수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군(萬軍)의 여호와라고 합니다. 만군이란 일만의 군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군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유(萬有)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이란 크고 많음과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를 헤아릴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천사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높고 위엄이 있으신 하나님이 그 광명을 비추면 피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4절입니다. 그런즉2~3절의 논리 전개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과 높으심과 그의 능력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겠느냐고 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이 어떤 죄인인지를 드러냅니다. 인간이 의롭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빌닷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찌 여호와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란 유한하고 연약함을 말합니다. 그런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빌닷의 이 말은 인간이 이러한데도 욥이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빌닷은 인간의 무력함을 더 드러내고 있습니다.

 

5~6절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과 높으심 앞에서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합니다. 옛날 번역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마다 이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달과 별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데 감히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 어떻게 의롭다고 주장하겠느냐고 합니다.

 

우리가 빌닷의 이 말을 인정하십니까? 구더기 같은 사람이며 벌레 같은 인생을 인정하십니까? 구더기는 여름철에 옛날 재래식 화장실에 보면 가득 덮여있습니다. 썩은 것, 더러운 것들을 양식으로 살아가는 구더기를 감히 사람에 비교를 합니다. 또한 벌레 같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화를 냅니다.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보느냐고 말입니다. 북한에서는 최고의 존엄을 손상하면 큰일 납니다. 수련회 때 말씀드렸지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질 때에 인류의 미래는 멸망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국정부와 구글과 NGO 단체에 시뮬레이션 해 본 결과 동일한 결과였다고 말입니다. 인간이 지구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렇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서로 암묵적으로 지구든 우주든 신이든 인간을 위하여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이사야 14:11절입니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이사야 선지자 당시에 세계 최고의 제국인 바벨론의 왕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바벨론의 왕이 얼마나 영화롭게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스올이란 무덤을 말합니다. 즉 죽은 자들이 가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 스올에 비파 소리도 함께 떨어진 것입니다. 왕을 찬양하는 악기조차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다고 합니다. 세상 최고의 제국의 왕의 영광이 이렇게 됩니다.

 

이사야 41:13~14절입니다. “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데 그 이스라엘을 무엇으로 부르십니까? 버러지 같은 너 야곱이라고 부릅니다. 전에 한글개역에서는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하였습니다. 버러지, 지렁이, 구더기란 다 땅에 속한 것들을 파먹고 삽니다. 이러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속은 우리의 어떤 자격이 아닙니다.

 

그런데 빌닷이 인생을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라고 한 것은 자기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과 같은 자들은 지금 욥과 같은 재앙을 당하지 않기에 자신들은 평소에 의롭고 경건하며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인간으로는 더 이상 재앙이 없을 정도의 재앙을 당하는 모습을 보니 너는 틀림없기 거룩하고 높으신 하나님 모든 세상을 다 살펴보시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고 단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더기 같고 벌레 같은 인생 주제에 무엇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 하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찌 의로울 수 있느냐는 말이 율법의 정죄가 되기고 하고 복음으로 안내하기도 합니다.

 

욥기 4:17~20절입니다. “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8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엘리바스가 한 말이지만 오늘 본문의 빌닷과 같은 말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고 하는 말은 욥을 향한 정죄의 말입니다.

 

욥기 15:14~16절입니다. “14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이 말도 엘리바스기 한 말입니다. 욥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을 공격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와 빌닷이나 소발은 그 표현이 다르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결국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욥과 같은 고난이 없기에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말입니다.

 

욥기 9:2절입니다.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14:1~4절입니다. “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의 말입니다. 욥은 욥의 친구들 보다 인간의 무능함과 연약함과 더러움을 더 잘 압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이 당하는 이런 일에는 분명히 인과율을 넘어서는 뜻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평가대로 욥의 인내라고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믿음 앞에 욥의 친구들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빌닷은 아주 짧게 앞에서 자신들이 말한 말을 요약하면서 마무리하는 내용이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느냐는 말로 마감을 합니다. 소발은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겸손해 보이는 이 말이 율법주의의 정죄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장애나 질병을 죄의 결과로 보기에 이런 장애가 자기 잘못인지 부모의 잘못인지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이 사람은 온전한 죄 가운데서 태어난 자로 보고 건강하게 태어난 자신들은 의로운 자로 보는 이런 바리새적인 시각이 욥의 친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욥과 같은 재앙을 당하지 않았기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재앙을 당하고서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아주 건방지고 교만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요한복음 9:39~41절입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욥의 세 친구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같은 입장임을 보여 줍니다. 자신들은 무언가 다 안다고 합니다. 다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들이 맹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맹인이라면 죄가 없었을 것인데 자신들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율법도 알고 복음도 안다고 합니다. 율법주의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언지 안다고 합니다. 욥의 이야기도 압니다. 욥의 결론도 압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자유 한다는 말도 압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 맞습니까? 복음으로 자유 한다는 말은 결코 우리 마음대로 한다는 자유가 아닙니다. 전에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유 하였습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것이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옮겨진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들은 이제 죄와 사망의 왕 노릇하는 그 권세에서 자유하게 되었지만 의와 생명이 주인이고 우리는 그의 종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의 갈등을 먼저 봅니다.

 

로마서 7:21~25절입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5장이 죄와 사망의 왕 노릇하는 곳에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옮겨진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의 왕 노릇하는 곳에서 죽었기에 이제 의가 왕 노릇하는 곳에서 산다는 말씀입니다. 래서 로마서 7장은 율법이라는 옛 남편이 죽고 이제 그리스도라는 새 남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두 다른 법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하면서 탄식을 하지만 이제 깨달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감사가 됩니까?

 

로마서 8: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욥의 친구들의 공격과 욥의 방어를 통하여 내려지는 결론을 바울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인 욥의 친구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안에서 두 법이 싸우는 것을 봅니다. 마치 욥이 율법적인 인과율을 자신도 알지만 그것으로 풀리지 않아서 고민한 욥처럼 바울도 이 갈등이 로마서 7장입니다. 그러다가 감사와 찬송이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의 결론입니다. 욥은 바울처럼 선명하게 알지 못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이것을 미리 내다 본 것입니다.

 

3~6절입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욥의 세 친구들은 율법주의라서 이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욥의 세 친구들은 육신을 따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사망의 길입니다. 그런데 욥은 고난을 통하여 육신 곧 법의 한계를 보고 그 율법 너머의 세계를 바라본 것입니다.

 

7~9절입니다.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육신의 생각은 율법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라고 계속하여 송사가 있습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한 것처럼 송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송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미 구약의 율법과 선지서에서도 율법보다 더 크고 높고 깊은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곳의 말씀을 보고 로마서에서 결론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4:5~7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금송아지 사건이후에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면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벌은 자손 삼사 대까지이지만 인자는 천대까지 베푸십니다. 삼사 대와 천대는 잠시와 영원의 차이입니다. 삼사 대는 고대의 한 가족의 구성원입니다. 삼사 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법대로 하면 전부다 진멸 당하여야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가 무궁하시기에 살아남는 것입니다.

 

스가랴 3:1~5절입니다.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불에서 끄낸 그슬린 나무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사탄이 참소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죄악을 제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참소를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하시듯이 그 죄를 제거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율을 넘어선 하나님의 긍휼이며 인자하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율법주의는 알지 못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이러합니다. 그러나 욥은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하여 인과율의 세계를 넘어가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어떠함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알게 되는 것이며 이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증언하며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8:29~30절입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욥기의 논쟁과 그 결말을 통하여 로마서로 연결하여 보았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온갖 참소하는 자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온갖 율법주의자들이 공격할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답변입니다.

 

31~39절입니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람이 어찌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가 할 수가 있겠느냐는 말로 욥이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욥의 친구들이 공격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저주 받은 죽음으로 보는 것이 율법주의자들이 보는 시각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을 세상은 정죄하고 송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송사나 정죄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