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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0:1~31 그러나 이제는    2016. 7. 27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욥이 고난 받기 이전의 때가 다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여 주셨던 때였습니다. 그 때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것은 욥이 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봐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의 의인이 받는 그런 복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봐도 저주와 재앙을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시던 그 때가 다시 오기를 기다립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고난 받기 이전의 그 시절과 비교하면서 그러나 이제는말로 시작을 합니다. 같은 표현이 9절에서도 16절에서도 나옵니다. 고난 받기 이전과 이제의 비교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몸 괴로운 것과 마음 괴로운 것 중에 몸 괴로운 것이 낫다고 합니다. 돈을 좀 더 잘 버는 직업인데 스트레스가 많은 것보다 돈을 좀 덜 벌고 몸이 고되어도 스트레스 덜 받는 일이 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욥은 몸도 마음도 다 괴롭습니다.

 

전에는 젊은이들이 감히 욥 앞에 나서지도 못하였습니다. 노인들이 일어서며 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입을 가리며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습니다. 욥의 말이 그들에게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욥 보다 젊은 자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장유유서가 엄격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욥을 비웃습니다. 물론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욥의 종들도 욥의 말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을 비웃는 젊은이들의 아비들은 욥이 보기에 자신의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 아비들의 처지가 이러하다면 그 아비들의 아들들은 더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비웃음을 욥이 당하고 있습니다. 그 아비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들인지 봅니다.

 

2~8절입니다. “2 그들의 기력이 쇠잔하였으니 그들의 손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3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인하여 파리하며 캄캄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4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먹을거리를 삼느니라 5 무리가 그들에게 소리를 지름으로 도둑 같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쫓겨나서 6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굴에서 살며 7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에 모여 있느니라 8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단순한 노숙자들이 아니라 도둑질 하는 거지들로 표현합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1 그런데 이제는 나보다 어린 것들까지 나를 조롱하는구나.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 축에도 끼지 못하는 쓸모가 없는 자들의 자식들까지 나를 조롱한다. 2 젊어서 손에 힘이 있을 듯하지만, 기력이 쇠하여서 쓸모가 없는 자들이다. 3 그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여서 몰골이 흉하며, 메마른 땅과 황무지에서 풀뿌리나 씹으며, 4 덤불 속에서 자란 쓴 나물을 캐어 먹으며, 대싸리 뿌리로 끼니를 삼는 자들이다. 5 그들은 사람 축에 끼지 못하여 동네에서 쫓겨나고, 사람들이 마치 도둑을 쫓듯이 그들에게 "도둑이야!" 하고 소리를 질러 쫓아 버리곤 하였다. 6 그들은, 급류에 패여 벼랑진 골짜기에서 지내고, 땅굴이나 동굴에서 살고, 7 짐승처럼 덤불 속에서 움츠리고 있거나, 가시나무 밑에 몰려서 웅크리고 있으니, 8 그들은 어리석은 자의 자식들로서, 이름도 없는 자의 자식들로서, 회초리를 맞고 제 고장에서 쫓겨난 자들이다.”

 

욥을 조롱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의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지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욥을 존경한 것은 욥이 힘 있는 자이기에 어쩔 수 없이 존경하거나 경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마음으로 우러나와 욥을 존경하고 욥의 말을 경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쫓겨나는 그런 도둑 떼와 같은 자들에게서 조차 욥이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그 조롱을 계속하여 봅니다.

 

9~15절입니다. “9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10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 11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12 그들이 내 오른쪽에서 일어나 내 발에 덫을 놓으며 나를 대적하여 길을 에워싸며 13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 14 그들은 성을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드는 것 같이 내게로 달려드니 15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

 

조롱하는 자들의 아비라는 자들이 욥의 양을 치는 개들 중에도 들지 못할 자들인데 그런 자들의 자녀들이 욥을 노래로 조롱을 합니다. 노래로 조롱을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노래라는 것은 그 시대에 먹혀들어야 불려 집니다. 욥을 조롱하는 말이 노래가 되었다는 말은 욥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욥을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욥을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욥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망설임도 없이 욥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욥이 이렇게 조롱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11절을 봅니다. ‘이는 즉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고 나를 곤고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활시위가 늘어나면 화살을 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정말 개보다 못한 자들의 조롱을 온 몸과 마음으로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기에 그 무리들이 욥 앞에서 굴레를 벗어 버리고 온갖 대적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식간에 공포가 에워싸고 품위는 바람 같이 날아가고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16~23절입니다. “16 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 17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18 그가 큰 능력으로 나의 옷을 떨쳐 버리시며 나의 옷깃처럼 나를 휘어잡으시는구나 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21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22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23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

 

다시이제는이라고 합니다. 욥의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혀 조롱당하지 않아야 할 자들로 인하여 조롱을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이 자기 속에서 녹는다고 합니다. 환난 날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기에 밤이 되면 뼈가 쑤시니 그 아픔이 쉬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게 타격을 가하신다고 합니다. 그가 큰 능력으로 욥의 옷을 떨쳐 버리시고 옷깃처럼 나를 휘어잡는다고 합니다. 사람을 공격할 때에 옷깃을 잡듯이 하나님이 욥을 휘어잡아서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티끌과 재 같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부르짖었지만 돌아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잔혹하게 힘 있는 손으로 대적하시면서 바람에 불려가게 하시고 무서운 힘으로 자신을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24~31절입니다. “24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25 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26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27 내 마음이 들끓어 고요함이 없구나 환난 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28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도 검어진 피부를 가지고 걸으며 회중 가운데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29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30 나를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구나 31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

 

욥에게 닥친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해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조롱 받을 일을 한 적이 없는 욥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고난을 허락하셨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든 사람들이 다 가는 그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손을 펴는 것이 인지상정이며 재앙을 당할 때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른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자신의 선행을 근거로 도움을 청합니다.

 

25절부터 보시면 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자신은 울었다고 합니다. 빈궁한 자를 위하여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고아와 과부와 빈민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권력자들에게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자들을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복을 바랐더니 오히려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는데 흑암이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마음이 들끓고 고요함이 없다고 합니다. 환난이 닥치는데 메마른 땅에 노출되어 검어진 사람이나 짐승처럼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처럼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속과 겉이 다 타버린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금은 통곡이 되고 자신의 피리는 애곡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해석을 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이런 재앙이 온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욥은 모릅니다. 욥기가 끝나도 욥은 재앙의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 욥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죄 없이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림자로 욥이 보여줍니다. 욥도 자신의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님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난을 대속을 위한 고난이라고 합니다. 대속적인 고난이란 대속을 하시는 분이 죄 없이 대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욥이 조롱받는 장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욥의 양을 치는 개들 중에도 들지 못할 자들이 욥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심지어 서슴지 않고 그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이런 조롱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 받으시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연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은 욥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다 당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치고 고난당하지 않은 자들이 없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문서 선지자들만이 아니라 문서를 남기지 않은 선지자들도 한 결 같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을 받은 이유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고함과 동시에 성도의 고난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22:1~16절입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들이 많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이런 시편을 탄식 시로 분류를 합니다. 그런데 욥의 탄식과 많은 부분이 겹쳐집니다. 그러므로 욥이나 다윗의 고난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하여서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게 됩니다. 만약 이런 부당하고 애매한 고난의 의미를 모르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헛수고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속을 위한 고난은 고난 받는 자가 죄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욥이나 다윗과 같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의 고난입니다.

 

마태복음 27:38~44절입니다.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예수님의 고난 받는 모습이 욥이나 다윗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 받은 고난의 모습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욥은 양을 치는 개들보다 못한 자들로 불리는 도둑 떼들로 인하여 조롱을 당합니다. 다윗은 개들이 에워쌌다고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만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강도들도 예수님을 욕합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나중에 주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그 강도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이른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한 사람으로 자신을 보십니까? 욥과 다윗처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을 나타내기 위하여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 속하여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두 강도처럼 예수님을 욕하고 있습니까? 마가복음 14:65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침을 뱉습니다.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누가 너를 때렸는지 선지자라면 알아보라고 합니다. 하인들도 예수님을 손바닥으로 칩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한 자들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나를 이 모양으로 이끌어 가느냐는 항의가 나오지 않습니까?

 

뉴스 엔조이에서 기독교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회고록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IVP)에 대한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그 두 편의 서평 일부를 옮겨봅니다. <한나의 아이>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아내와 살면서 겪어야 했던 한 남자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기에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아내로부터 받았던 '고통'과 가정을 유지하려는 '책임감'을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유의미한 맥락으로 삼고자 하우어워스는 끈질기게 노력하고 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였건만, 오히려 하우어워스는 조울증에 시달리던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았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홀로 살아가던 전처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전화를 받게 되고,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녀가 (심장 질환으로) 텅 빈 집에서 죽은 지 여러 날 뒤에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나는 앤과 결혼을 했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우리가 부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대놓고 말하곤 했다. 또 종종 자기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잠자리를 하면 간통이 된다고 했고, 가끔은 내게 바람을 피우라고 권하기도 했다." (280)

 

"나는 그녀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저 삽화(episode)의 빈도를 조절할 길을 찾거나, 적어도 그녀가 그것을 원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앤은 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자신이 아픈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내가 자기 인생에서 빠져 줄 때 비로소 건강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건 앤의 입장에서는 방해거리에 불과했다." (339)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사람들은 내가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 (중략)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375)

 

하우어워스는 <한나의 아이>를 쓰면서 무엇을 배웠느냐는 질문에 "사실 내가 배운 것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다"(506)라고 답한다. 그리스도인의 일생을 배움의 과정으로 정의한 것인데, 그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되짚게 만든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375), "나는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데 평생이 걸렸다"(501)는 하우워어스의 말은, 우리가 평생 어떤 태도로 신앙해야 하는지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나는 평생을 교회에서 보낸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중략)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놀랍고 멋진 삶은 여전히 내게 과분하게 다가온다." (497)


상당한 부분을 인용하였습니다. 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은 평생을 교회에서 보내며 신학을 하는 사람이지만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합니다. 자신은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데 평생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그 놀랍고 멋진 삶은 여전히 내게 과분하게 다가온다고 합니다. 조울증의 아내를 만나서 참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 그가 배운 이야기를 말 합니다. 그의 책이 기계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있음이 매력이 있습니다.

 

욥기서도 기계적인 답변이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기계적인 답변을 합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인과율적인 답변에 승복을 하지 않습니다. 이 고난이 신비를 하나님을 통하여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욥이 질문하고 싶은 내용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창조의 세계를 제대로 아느냐는 말씀 앞에 입을 닫고 회개하는 모습이 욥의 질문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똑 떨어지는 답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재산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두 배가 아니라 천배가 되어도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므로 박영선 목사의 욥기 강해 소제목처럼 답이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딱 맞아 떨어지는 답을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답은 결국 인과율입니다. 그런데 욥기서나 성경은 그런 인과율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답이 없는 고난의 길을 가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만난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누가 찾고 믿겠습니까? 아무도 이런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십자가에서 달린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고난 가운데 만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더 이상 인과율로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그 답이 없는 고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야고보서 5:7~11절입니다.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농부들이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주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길이 참는 모델들이 주의 이름으로 마란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이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이들이 고난 받을 때에 잠잠히 오래 참은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항의를 했습니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아우성을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고난이 온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이 고난과 오래 참음의 길로 갔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이라고 합니다.

 

이미 한번 찾아본 말씀입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이 무엇입니까? 똑 떨어지는 답을 한 욥의 세 친구들이 답을 모르겠다고 항의한 욥에게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수학공식처럼 답이 나오는 길이 아니라 참으로 답이 없는 길을 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예측도 안 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하는지 잘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 답 없는 길처럼 보이는 그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길로 보여 질 것입니다.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라는 말씀은 우리 인생의 모든 수단과 방법들을 다 동원하여도 풀 수 없는 그 답 없는 길의 끝에서 발견되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길을 누가 스스로 찾아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길 되신 그 분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기에 우리가 그 길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나 이제는속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걸음입니다.

 

최근에 우리가 함께 배운내가 행하는 먼 길을 다간 후찬송 가사를 옮겨놓습니다.

 

1. 내가 행하는 먼 길을 다 간 후 검은 구름 없겠네 그때 주님의 빛 가운데 서리 영원한 날 밝아라

2. 당한 그 고생을 생각해 볼 때 주 예정함 알리라 그때 주 예수 큰 사랑 깨닫고 나 주 찬송하리라

3. 내가 행하는 먼 길을 다 간 후 이 괴로움 면하고 평안한 항구에 속히 이르러 나 주 얼굴 대하리

후렴: 가는 길 내가 다 지나간 후에 천국 내 앞에 보이네 가는 길 내가 지나간 후에 주 예수를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