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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1:1~40 욥의 최후진술 2016. 8. 3

 

38 만일 내 밭이 나를 향하여 부르짖고 밭이랑이 함께 울었다면 39 만일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출을 먹고 그 소유주가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40 밀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오늘 본문은 그 형태가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하는 내용과 비슷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하는 것은 마치 검사가 추궁하는 것처럼 욥을 죄인으로 몰아 부칩니다. 정확한 증거를 가지고 고소를 못하는데 욥이 현재 당한 일을 보고 죄로 인한 것이라고 유추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이런 재앙을 받는 것은 반드시 인과율적인 이유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욥이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끝까지 그들의 고소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말을 그치자 이제 욥이 최후진술을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40절을 보시면 욥의 말이 그치니라 말이 최후진술로 보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최후진술을 검색해보니 법정에서 검사의 논고가 끝나고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최후로 진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억울함을 호소 할 수도 있고, 잘못을 시인하고 선처를 호소할 수도 있습니다. 최후진술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에 달린 답 글은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인식한다고 하면서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그런 말을 하라고 조언을 합니다. 그런데 욥의 최후 진술은 끝까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최후 진술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오늘 본문을 다른 사람의 욥기 연구를 참고하여 언약적인 구조로 봅니다. A. 체결된 언약(1~3). B. 주어진 도전(4~6), C. 언약적 성실성의 목록(7~34), B`. 거듭된 도전(35~37), A`. 보증된 언약(38~40). 이렇게 언약으로 보는 이유는 1절에서 약속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조로 보면 언약에 자신이 얼마나 충실히 행하였는지를 말하면서 만약 언약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땅에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는 말로 욥의 최후 진술이 끝이 납니다. 그리고 법정의 용어처럼 자신의 최후진술서에 서명을 하면서 자신을 고발 하려면 고소장을 쓰라고 합니다.

 

그런데 언약으로 보려면 언약을 맺는 당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욥의 최후진술은 마치 독백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욥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모습이 이미 언약 체결된 자의 모습으로 전제하면 이런 진술이 언약체결에 의한 진술일 수 있다고 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체결을 하는 그런 형식은 없지만 이런 진술자체가 언약의 형태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언약에 충실하였다는 최후진술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욥의 세 친구들도 듣고 있습니다. 최후진술 후에 등장하는 엘리후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최후진술을 듣습니다.

 

욥기 22:4~11절을 먼저 봅니다. “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6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7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8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9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10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엘리바스가 욥을 공격한 말이지만 욥의 세 친구들도 다 이러한 말로 욥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러한 말들에 대한 욥의 최후진술을 들어보겠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3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4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욥은 자신의 눈과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스스로 한 약속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피시고 계시고 자신의 걸음을 다 세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분깃과 기업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만약 내 눈이 처녀에게 주목하는 그런 불의를 행하였다면 환난이 오고 불행이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백입니다. 욥은 최후진술에서도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죄를 지은 결과로 이런 재앙이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5~8절입니다. “5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 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6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7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8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

 

자신에게 불의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만일 자신의 걸음이 정도에서 벗어났거나 자신이 마음이 자신의 눈을 따라 갔다면 벌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눈을 따라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죄의 유혹이 눈으로부터 옵니다. 보암직한 것들이 눈으로 들어오면 마음이 작동을 합니다. 우리도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마음이 그러한 눈의 유혹을 따라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9~12절입니다. “9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10 내 아내가 타인의 맷돌을 돌리며 타인과 더불어 동침하기를 바라노라 11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 12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기를 바라노라자신은 처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웃의 아내에게도 유혹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아내가 타인의 종이 되고 타인과 더불어 동침을 하여도 마땅하다고 합니다.

 

13~15절입니다. “13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14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15 나를 태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남종이나 여종이 자신과 쟁론할 때에 그들의 권리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나 종이나 태속에서 지으신 이가 한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종들도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16~23절입니다.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17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19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 본 체 했다면 20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21 만일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22 내 팔이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 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가난한 자의 소원을 물리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가난한 자로 대변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자신이 얼마나 잘 돌보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고아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고 어려서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먹을 것을 나누고 자신의 양털로 그들의 몸을 따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재판을 하는 곳에서 고아와 같은 약한 자를 위하여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권력을 표현할 때에 팔로 비유를 합니다. 만약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하였다면 자신의 팔이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자신의 팔뼈가 부스러지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4~28절입니다. “24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25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26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27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 맞추었다면 28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여기서는 두 가지 죄를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물질주의와 자연숭배의 죄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소망을 두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히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의 소망은 자나 깨나 돈 벼락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재물의 풍부함이 있었지만 그것을 소망하거나 의지하거나 기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해와 달을 보면서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그것들을 경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배의 대상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욥의 행사가 범사에 이러하였습니다.

 

29~32절입니다. “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30 실상은 나는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 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 31 내 장막 사람들은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는가 32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나를 미워하는 원수가 세상에서 형통할 때에 정말로 함께 기뻐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욥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가 재난 당함으로 즐거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장막 안에 사람들은 주인의 고기로 배 불렸다고 합니다.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않도록 행인에게 자기 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교회당에 혼자 있을 때에 구걸하는 자들이 오는 것이 귀찮아서 문을 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이지만 율법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욥의 행위들은 율법에 다 나와 있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에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33~34절입니다. “33 내가 언제 다른 사람처럼 내 악행을 숨긴 일이 있거나 나의 죄악을 나의 품에 감추었으며 34 내가 언제 큰 무리와 여러 종족의 수모가 두려워서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잠잠하였던가바리새인들은 자타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면서 저주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위선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고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악행을 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죄악을 품에 감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잠잠히 숨어 있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의 죄도 말합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범죄 하였을까하여 속죄의 제사도 지냅니다. 그러므로 죄악을 행하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속죄한 것입니다.

 

35~36절입니다. “35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36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자신의 최후진술을 마치고 서명을 하였습니다. 서명을 그러므로 전능자가 자신에게 대답하여 주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만약에 누가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 고소장을 쓰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고소장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을 고소하는 내용이 있다면 얼마든지 밝히라고 합니다.

 

여기서 서명을 하였다는 것은 히브리어자음의 끝 단어인 타우라는 글자를 씁니다. 최종진술의 표로 서명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단어를 조금더 살펴보면 에스겔서 9:1~6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에서 행하는 가증한 일로 인하여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표가 없는 자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긍휼을 베풀지 말고 다 죽이라고 합니다. 그 시작을 성전 앞에 있는 늙은이로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표라는 단어와 욥이 사용하는 서명이라는 단어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최종진술에 서명을 했다는 것은 이제 욥의 말이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37~40절입니다. “37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38 만일 내 밭이 나를 향하여 부르짖고 밭이랑이 함께 울었다면 39 만일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출을 먹고 그 소유주가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40 밀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37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을 그분께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그분 앞에 떳떳이 서겠다. 38 내가 가꾼 땅이 훔친 것이라면, 땅 주인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라면, 39 땅에서 나는 소산을 공짜로 먹으면서 곡식을 기른 농부를 굶겨 죽였다면, 40 내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거나 보리 대신 잡초가 돋아나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겠다. 이것으로 욥의 말이 모두 끝났다.”

 

욥의 최후진술이 마쳤습니다. 만약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땅이 저주를 받아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초가 돋아나도 기꺼이 받겠다고 합니다. 땅에 찔레와 가시가 나는 것은 아담의 타락과 아벨이 흘린 피로 인하여 저주 받은 땅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언약의 저주로 인하여 이렇게 땅이 저주를 받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욥의 이 고백은 자신이 지금 당하는 이런 재앙을 당할만한 그런 악을 행한 일이 없다는 것이 욥의 최후진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욥의 고난은 왜 일어난 것입니까? 이미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대속적인 고난을 보여줍니다. 죄 없이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사람이 욥입니다. 그러므로 욥기 42장에 가면 욥이 욥의 친구들을 위하여 속죄하여 주고 기도하여 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욥의 이런 고난을 보면서 대속하는 고난을 생각하는 자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최종 확증이지만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대속의 고난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임을 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욥 자신은 그리스도의 역할도 하지만 그 고난을 통하여 대신 고난 당하시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도의 역할도 합니다. 성도란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용서 받았음을 믿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차원에서 사탄의 어떠한 송사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의 주장이 성도의 주장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다윗에게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시편을 볼 때에 어떤 때는 자신의 얼마나 모태로부터 죄인인지를 드러내는 부분도 있지만(51) 어떤 곳에서는 죄가 없다고도 합니다.

 

시편 17:1~5절입니다. 1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3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4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5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오늘 본 욥의 최후진술의 요약 같습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고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원수들이 둘러쳐 있기에 자신을 구원하여 달라고 이어지는 간구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15절이 이렇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이미 앞에서 욥이 고백한 육체 밖에서 주를 보리라는 내용과 같은 표현입니다. 성도가 까닭 모를 고난 가운데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욥과 다윗과 구약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최후진술을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도 최후 진술서를 작성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율법입니다. 그 율법이 우리를 고소하는 검사로 서 있습니다. 이런 율법은 모세가 받아 준 것이기에 고발 자가 모세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5:45절입니다.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모세가 고발한다는 말은 율법이 우리를 고발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시를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그들은 지킨다고 하였지만 그 율법의 속을 몰랐던 자들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입을 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라보게 하여야 하는데, 그들은 율법으로 자신을 치장하여 메시아가 오면 자신들의 의로움이 드러날 줄 알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을 고발하는 자가 모세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욥기를 통하여 욥의 최후진술이 바리새적인 진술인지 아니면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욥의 최후진술인지는 아직도 좀 더 가봐야 결론이 납니다. 욥의 판결은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게 말씀하시는 그 내용에서 보기로 하고 오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최후진술만 보겠습니다.

 

로마서 4:3~9절입니다.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심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일한 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일한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한 일이라고는 죄만 지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편 17편에서 본대로 자신은 죄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51편에서 죄만 짓는 인간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어느 고백이 바른 고백입니까? 둘 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바로 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전체로 보아야 합니다. 좌우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이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전체로 부분을 봐야 하고 부분으로도 전체를 봐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최종진술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최종 결론을 자신이 내리고 있습니다. 일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고, 한 일이라고는 불법을 행하고 죄를 지었는데 그 불법의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짐을 받는 자의 복을 말합니다. 여기서 욥기도 힌트가 주어집니다. 욥도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고난은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종진술이 무엇이어야 하겠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저의 최후진술은 다윗의 이 고백입니다.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짐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이 진술입니다.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진술로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진술은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 안에 있는 자들이 참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