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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4:1~37 우리끼리 알아보자 2016. 8. 24

 

1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2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4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지난주에 엘리후가 욥과 욥의 세 친구들에게 첫 번째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들도 대답이 없고 욥도 어떤 대답이 없습니다. 욥이 왜 아무른 답변을 하지 않았을까요? 욥의 세 친구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답변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입을 닫게 하였습니다. 물론 욥의 세 친구들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엘리후에 말에 대하여 답변을 하지 않은 것은 이미 욥의 세 친구들의 말과 같다는 의미로 더 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시각은 엘리후의 말이 맞는 말이기에 욥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봅니다. 어떻게 보든지 간에 욥의 친구와 욥이 아무른 대답이 없자 엘리후는 두 번째 연설을 합니다.

 

지난주에 엘리후의 네 번의 말에 대한 요약적은 주제를 다시 봅니다. 이처럼 고난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첫 번째 말). 다음으로 고난은 하나님이 자신의 교육 목표에 이르실 때 까지 오래 계속해서 사람을 시험하는 것일 수 있다(두 번째 말). 하나님은 그의 숭고하심 가운데서 스스로 목적을 정하시기 때문에, 사람은 참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고(세 번째 말), 겸손히 굴복하여 숭고하신 하나님께 경배 및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네 번째 말). 오늘은 두 번째 말의 본문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과 욥이 아무른 대답이 없자 엘리후는 두 번째 말을 시작합니다. 지혜 있는 자들과 지식 있는 자들에게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들으라고 하는 자들을 복수로 사용하고 있기에 욥과 세 친구들이 포함되며 동시에 우리도 포함이 됩니다. 먼저 말귀를 알아듣는 것이 대하여 입이 음식의 맛을 분별하는 것처럼 귀가 말을 분별할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끼리 알아보자고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선하심이 무엇인지 알아보자고 하는 이유는 욥이 하나님을 정의롭지 못한 분으로 선하지 않은 분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5~6절입니다. “5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6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7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8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9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재앙을 보고 욥이 지은 죄가 있어서 이런 재앙이 왔다고 하였지만 엘리후는 욥이 까닭모를 고난 중에서 욥이 한 말을 가지고 욥을 책망합니다.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엘리후는 욥의 고난이 단지 죄로 인하여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고난의 이해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하시는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고난을 주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서 더 연장하여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성도가 복음으로 인한 고난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욥을 책망하기를 욥이 한 말 곧 자신이 의로우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부인하셨고 자신이 정당하며 허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화살을 쏘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엘리후가 보기에 하나님을 비방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 패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욥의 이러한 원망은 욥만이 아니라 시편 73편과 하박국서에서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느냐는 질문을 욥 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73편과 하박국서는 즉각 답변이 나옵니다. 시편 73편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답변을 듣습니다만 욥기는 정말 오랫동안 답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망과 불평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욥의 그러한 말을 지금 엘리후가 책망을 합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말에 대한 해석이 둘로 나누어집니다. 엘리후도 욥의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보는 것입니다. 욥이 세 친구들보다 더 냉혹하게 말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엘리후가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선하심을 전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지금 두 가지 다를 함께 봅니다.

 

10~15절입니다. “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11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13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14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15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신다고 하시는 이 말씀 앞에 누가 온전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하여는 엘리후의 한계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의로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위대로 갚으시면 모두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그런 차원보다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는 것은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신다면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 앞에서 어느 누가 감히 항변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사야 40:12~17절입니다.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다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우상의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느냐는 책망을 하는 내용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엘리후도 이사야 선지자의 이런 입장에서 말한 내용으로 보면 욥의 세 친구들과 욥 자신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욥과 같은 고난도 아니면서 조금만 자신이 힘들고 어려우면 욥보다 더한 원망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정말 먹고 배부르고 나니 사람들의 욕망의 눈이 더 높아진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먹고 배부르고 나니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오늘날 이 땅의 교회라는 곳에서 어떤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까?

 

16~20절입니다. “16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17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18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19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 20 그들은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함을 당하느니라

 

16절부터 엘리후의 화법이 복수에서 단수로 바뀝니다. 15절까지는 욥의 세 친구들을 함께 말했다면 이제는 욥 개인에게 집중하여 말을 합니다. 욥에게 말하기를 네가 총명이 있다면 대답해 보라고 하면서 정의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라면 어떻게 너를 다루시겠느냐고 하십니다. 욥만이 아니라 세상의 왕이라도 하나님은 무용지물이라고 하시며 지도자도 악하다 하시는 분이시며 고관이라도 외모로 대하지 않으시고 부자라고 해서 가난한 자들 앞에서 낯을 세워주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나 다 하나님께서 지으셨기에 그들을 세상의 조건으로 특별대우 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권력자라나 일반백성이나 간에 한 순간에 죽고 사라진다고 합니다. 세력 있는 자라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가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결코 불의하지 않다고 합니다.

 

21~25절입니다. “21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22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23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24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25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하나님의 심판이 불의하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고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십니다. 시편 139편에 의하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과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까지 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은 오래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도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세상의 재판은 어떻습니까? 형사소송이든 민사소송이든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립니까? 그리고 세력 있는 자들은 전관예우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불의와 악함을 돈과 힘으로 덮어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십니다. 그런데 욥을 엘리후가 책망하는 이유는 욥이 세상의 그런 악행을 저질렀다기보다는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는 말에 대하여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26~30절입니다. “26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앞에서 치심은 27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28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29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30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공의롭게 공정하게 공개적으로 심판을 하신다고 엘리후가 말합니다. 부자라고 봐주고 가난한 자라고 불공평하게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하는 말은 주께서 왜 침묵하고 계시느냐는 말에 대하여 답을 합니다. 욥이 의롭다고 하여도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뵐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그는 민족이나 인류에게 동일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욥이 지금 하나님의 침묵하심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후에 욥에게 회개하라고 합니다.

 

31~33절입니다. “31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33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욥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엘리후가 책망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다시는 범죄 하지 않겠다고 했는가를 묻습니다. 욥은 까닭모를 고난 속에서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욥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다고 하였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러면 하나님께서 속전을 치러야 하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스스로 택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욥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우리가 1장부터 지금까지 봐 왔지만 욥의 세 친구들이 책망한 것처럼 인과율적인 고난이 임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정말 까닭모를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깊어지고 길어지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냐는 원망들이 나옵니다. 물론 이러한 부분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나오는 표현이라고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고난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한 부분은 욥 자신도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런 재앙을 당할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런 재앙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무언가 잘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습도 살펴봅시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에 불만이 없습니까? 내가 지금 처한 환경에 자족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면서 살아갑니까? 우리는 욥처럼 의롭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도대체 왜 이러실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더구나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무언가 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서 한탄할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원망을 못해도 간접적으로 얼마든지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으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원인과 책임을 타인에게 둡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정당함과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다면 엘리후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34~37절입니다. “34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35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36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7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슬기로운 자와 엘리후의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자는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말에 동의를 요청하기 위하여 한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시작할 때에 우리끼리 정의에 대하여, 선한 것에 대하여 알아보자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엘리후의 말에 전혀 말이 없음으로 엘리후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 엘리후는 아주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며 욥의 형편을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욥이 한 말에서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욥에 대하여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과의 논쟁을 하면서 하나님마저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이러한 욥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말로 보면 엘리후의 말이 옳습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엘리후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38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기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욥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욥은 엘리후가 회개하라고 한 그런 회개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엘리후가 하나님께 책망을 들은 욥의 세 친구와 구별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엘리후는 책망을 받은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엘리후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들어보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36장과 37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38장과 연결이 됩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한 말이나 하나님께서 엘리후에게 한 말씀이나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천지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에 대하여 욥은 한 마디도 엘리후에 대하여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4절처럼 우리가 정의에 대하여 선에 대하여 우리끼리 알아보자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듣기 전에는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서 엘리후가 말한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설득하거나 회개시킬 수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역사하시는데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시고 회개할 자를 회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거나 물을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욥과 세 친구들과 엘리후를 동원하셔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여줍니다.

 

욥기 38:1~4절입니다.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욥에게 나타나셔서 묻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내가 묻는 것을 대답해 보라고 하시면서 엘리후가 한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천지만물을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39장까지 말씀하신 후에 40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답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욥기 40:1~8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6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엘리후가 욥에게 한 말과 비슷한 말씀을 하나님이 친히 욥에게 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는 말씀을 38장에서 하시면서 39장까지 엘리후의 말과 연결되는 천지만물을 통하여 욥에게 대답해보라고하시면서 40장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욥이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게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엘리후가 한 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욥은 엘리후의 말에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끼리 정의와 선함에 대하여 알아보자고 한 그 말에 설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자신은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라고 합니다.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기독교 사이트에서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난무합니다. 모두가 자신들이 진리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말들이 성경을 그대로 인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끼리의 놀이터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모두가 자기주장과 자기지식과 변론으로 마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면 그 말씀 앞에 두렵고 떨게 됩니다. 그 말씀 앞에 두렵고 떠는 자를 돌보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 앞에 떤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그 앞에서 사람들의 주의와 주장들은 배설물과 해로운 것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십자가 앞에서 입을 가리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