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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9:1~40:5 입을 가릴 뿐입니다.   2016. 10. 12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욥은 그 동만 말을 많이 했습니다. 재앙을 당한 후에 한 말도 많고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들과 논쟁하면서 한 말도 많습니다. 그 말들 속에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제대로 운영하시고 계시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은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말았으면 이런 꼴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욥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순전하게 살려고 했는데 왜 이런 재앙이 왔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원망은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의 이런 불평을 보면서 한영애씨가 부른 조율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욥의 질문과 연결하여 볼만한 가사라서 옮겨보겠습니다.

 

알고 있지 꽃들은 따뜻한 오월이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철새들은 가을하늘 때가되면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가는 곳도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었던 거야 지고지순했던 우리네 마음이 언제부터 진실을 외면해 왔었는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정다웠던 시냇물이 검게 검게 바다로 가고 드높았던 파란하늘 뿌옇게 뿌옇게 보이질 않으니 마지막 가꾸었던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끝이 나는 건 아닌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미움이 사랑으로 분노는 용서로 고립은 위로로 충동이 인내로 모두 함께 손잡는다면 서성대는 외로운 그림자들 편안한 마음 서로 나눌 수 있을텐데/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 내가 믿고 있는 건 이 땅과 하늘과 어린 아이들 내일 그들이 열린 가슴으로 사랑의 의미를 실천할 수 있도록/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자연과 인간관계가 자꾸만 나빠지는 현실을 보고서 하늘님이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한번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가사는 자연 환경을 회복하고 인간관계가 회복되어지기를 바라지만 지금 하늘님이 잠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도 있습니다. 이신론인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손을 놓고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만사가 조율이 제대로 된 것처럼 보입니까? 모든 악기는 조율을 잘 해야 좋은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보니 아무래도 조율이 잘 못된 것으로 보이기에 하늘님을 깨우는 노래입니다.

 

열왕기상 18:35~29절입니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유행가 가사와 성경말씀을 같이 인용하였습니다만 우리도 이 둘 사이에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니 하나님이 도대체 살아서 역사하시고 계시는지 의심이 듭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현실이 부조리해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엘리야처럼 응답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이 엘리야의 하나님이 아닌지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의 제물을 태우듯이 그런 분명한 응답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부르는 하나님이 바알처럼 무능한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알의 선지자들처럼 부르짖고 금식과 철야를 해도 응답이 없으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엘리야의 하나님이 맞는지 의심이 들지 않습니까? 욥처럼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신다면 말씀 좀 해 주시라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듭니다. 폭풍우 가운데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시는 내용을 계속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39:1~4절입니다. “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2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3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4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산 염소나 암사슴이 새끼를 낳고 새끼를 치는 때가 언제인지를 아느냐고 묻습니다. 집에서 기르지도 않는 야생의 짐승들이 새끼를 낳을 때의 괴로움을 우리가 언제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 새끼들이 강하여지고 빈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다고합니다. 새끼들이 자라 다시 다른 새끼들을 낳는 것이지요!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생의 염소나 사슴들이 새끼를 낳고 기르고 하도록 다 돌보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때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5~8절입니다. “5 누가 들 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6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 7 들 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8 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들 나귀들이 시끄러운 성읍을 떠나 자유롭게 다니며 사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잘 조율하여 가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9~12절입니다. “9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10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11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12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들소를 사람이 길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들소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기르십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

 

13~18절입니다. “13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6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17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날개가 있지만 날지도 못하고 지혜와 총명이 없는 것처럼 자기 알과 새끼를 돌보지 않는 타조이지만 말보다 빨리 달리게 지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느 한 부분만 보고 평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19~25절입니다. “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24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25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고대 전쟁에서 병거는 최고의 무기가 됩니다. 그런 병거를 몰고 전쟁터로 두려움 없이 달려가는 그 말의 힘과 용기를 누가 준 것이겠습니까?

 

26~30절입니다.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매와 독수리들이 어떻게 사냥하며 그 둥지를 어떤 곳이 트는지 말합니다. 그들의 시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공중에서 들쥐를 보고 잡아 채 갑니다. 그런데 이 본문 중에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이 한 구절 나옵니다.

 

마태복음 24:28절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미 유대인들은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생활 속의 이야기입니다. 들판에 동물의 사체가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위로 독수리들이 돌고 있으면 그곳에는 동물의 사체가 있는 것입니다. 고대 전쟁의 영화장면을 보면 전쟁이 끝나고 시체만 가득한 들판에 독수리나 까마귀들이 시체를 뜯어 먹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봤습니다. 주검, 시체, 독수리 이런 이미지들은 심판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4:23~27절입니다.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24장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멸망을 함께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말의 시기를 말하고 전쟁의 시기를 말하고 아메겟돈이니 제 3성전이니 베리칩이니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곳에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인자의 날은 번개처럼 번쩍하고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심판이 일어날 것을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일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칼빈과 몇몇 교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가 주는 양식을 먹기 위하여 오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것이 어김없듯이 예루살렘과 세상의 멸망은 분명하다는 말씀으로 봅니다. 그리고 독수리들은 부정한 짐승으로 죽은 사체를 뜯어 먹기에 생명이 아닌 곳으로 몰려드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욥의 질문과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틀림없이 집행이 된다는 말씀으로 봐도 됩니다. 욥은 세상이 어찌 이렇게 돌아가느냐는 원망과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욥에게 하나님은 세상이 무질서 하여 보이고 약육강식의 세상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다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자와 까마귀만이 아니라 산 염소, 사슴, 들 나귀, 타조, , 매와 독수리조차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봤습니다만 바다의 물고기조차 주님께서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우주와 그 모든 만물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로마서 11:32~36절입니다.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주일오후에 열왕기 서를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불순종하는 역사입니다. 이들은 심판을 받아서 독수리에게 다 뜯어 먹혀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모습입니다. 잠언서 30:17절입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이스라엘의 아비나 어미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조롱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의 눈은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힐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시체들이 즐비하게 된 역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심지어 그런 일들조차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어찌 우리가 측량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면서 찬송으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절입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그분이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십니다. 만물이 주의 손에 의하여 빈틈없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16:59~63절입니다. “59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16장은 이스라엘이 태어날 때부터 거리낌을 받아 탯줄도 자르지 않고 씻기지도 않은 채 들판에 버림받은 여자아이로 묘사합니다. 그런 아이를 긍휼로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공주처럼 자라게 하여 자신의 신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하는 짓은 창녀보다 못한 짓을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로 남 유다는 바벨론으로 멸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왜 다시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언약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영접하여 주시는 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여호와께서 이루신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맺기 전에 인물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욥은 신실하고 성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하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많은 말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호소하였지만 아무른 응답이 없으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폭풍우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시는 내용이 우리가38장부터 39장까지 본 내용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40:1~5절을 다른 번역으로 봅니다. “1 주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셨다. 2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3 그 때에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5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욥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아직 한 번 더 하나님께서 질문하시고 욥의 대답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하나님의 질문에 욥은 비천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감히 주님께 대답할 말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입을 막을 뿐이라고 합니다. 입을 막을 뿐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자신의 수많은 질문들은 아무른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사소한 일로 고민하고 다투고 있을 때에 정말 큰 일이 닥치면 지금까지 죽을 것 같이 고민한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일본의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집을 사고 청소를 하다가 화산재에 뒤덮여 진다면 도망가기 바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입을 막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논쟁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주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주서게 되면 우리가 입을 닫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자리이신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순교한 자라고 하여도 입을 닫고 그분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도 하나님의 질문 앞에 입을 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입이 닫아 지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