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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7~9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2016. 11. 9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제가 보는 성경에서 이 단락의 소제목을 결론이라고 구별해 놓았습니다. 물론 다음 주에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만 욥기의 그 수많은 논쟁들이 결국 오늘 본문으로 끝이 납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은 후에 자신이 한 모든 말을 거두어들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뵙는다고 합니다. 눈으로 주님을 뵙는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았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각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뵙게 되는 일이 신약입니다.

 

요한복음 1:14~18절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눈으로 뵙는다는 것이 구약적인 표현이지만 신약에서는 사도들이 친히 그들의 시각으로도 하나님을 뵌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태초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합니다.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분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일서 1:1~3절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사도들이 무엇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봤다고 합니다. 이 생명과 사귐이 가지는 것이 참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까닭모를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사도들처럼 하나님을 뵙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직 구약이기에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주님을 뵙고 만져보았다고 하는 그 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입니다.

 

오늘본문 7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한다고하십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은 욥이 잘못했다고 여출일구로 말해왔습니다. 욥의 재앙을 보고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지 모르겠다고 불평과 원망을 했을 때에 이들은 돌아가면서 욥에게 인과응보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 이런 재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꿈에도 까닭 없는 고난이 올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후에 대한 책망은 없는 것은 엘리후의 고난 해석이 이 세 명과는 달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인과율을 넘어서는 것이 엘리후의 고난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가리켜 한 말은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욥의 말은 인과율을 넘어선 것입니다. 욥도 인과율적인 사람이었지만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하여 인과율과 다른 하나님의 섭리를 결국은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욥과 세 친구들의 차이는 까닭 없는 고난의 유무에 있습니다.

 

여기서 내 종 욥이라는 말씀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욥기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내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의 온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 경외함을 자랑함으로 욥에게는 까닭모를 고난이 시작이 됩니다. 사탄이 시험을 하였지만 넘어가지 않는 욥을 향하여 하나님은 다시 내 종 욥이라고 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의 종이라는 말은 노예나 일반적인 종을 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종이라고 하심으로 여호와의 종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일로 부름 받은 모든 주의 종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이사야를 봅니다.

 

이사야 50:5~6절입니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고난 받는 종을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방금 읽은 이 말씀도 구약의 선지자들이 받은 고난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장차 당할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여주는 주의 종들입니다.

 

이사야 52:13~15절입니다. “13 보라 내 종이 2)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3)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 그가 4)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주의 종의 고난 받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존귀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난의 모습은 이어지는 이사야 53장에서 자세하게 나옵니다. 우리를 대신한 고난인데 사람들을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사야 53:4~6절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주의 종의 고난은 이렇게 대신 고난 받는 대속적인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을 보여주는 것이 욥이 까닭모를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오늘 본문 8~9절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고 합니다. 번제를 드리고 욥기 기도한다는 것은 제사장이 할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온 자들을 향하여 기도를 하듯이 욥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여호와께서 욥을 받아주심으로 욥의 친구들을 받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욥이 분명한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대속적인 고난을 보는 것입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8~9절을 봅니다. “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9 그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니, 주께서 욥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욥의 고난과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속 적 고난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볼 내용은 욥이 병이 나았을까요? 낫지 않았을까요? 다음 주에 볼 내용입니다만 10절을 보시면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켜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욥에게 와서 욥의 기도를 받아야 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이것이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지금까지 자신들이 주장한 내용은 욥의 이런 재앙은 욥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공격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신들은 욥과 같은 재앙이 없기에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직도 온 몸이 병들어 있는 그런 욥에게 가서 기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대통령이나 그 비리에 연루된 측근들이 잘못했다는 시늉을 하고 있습니다. 검찰청에 가서 팔짱 끼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더욱 경악을 합니다만 이들의 비리가 드러나기 전에는 얼마나 오만하고 방자하였는지 국민을 개와 돼지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에 정말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억울하게 피해당한 자들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라고 하면 하겠습니까? 죽을지언정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도 자신들은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재앙을 하나도 당하지 않았기에 의롭다고 여기는 자가 누가 봐도 재앙을 당하여 온 재산이 날아가고 자녀들이 다 죽고 온 몸에 병이 든 자에게 제물을 가지고 가서 기도를 받겠습니까?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 역사 속에 나탄다면 그것은 곧 심판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까지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복음이 증거 됩니다. 까닭모를 재앙으로 인하여 완전히 망해버린 욥에게 제물을 들고 가서 기도를 받으라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이 빌립보서의 말씀과 연결이 된다고 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심판하시면서 자기 백성만 불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조금 전에 본 이사야 53장의 5~6절을 다시 봅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우리는 다 각자 제 길로 간 자들입니다. 언제 한번이라도 바른 길로 간 적이 없이 자기 좋은 대로 살아온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이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인과율의 세상에서 이 대속 적 고난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이사야 53:1~3절입니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대신 고난당하는 이런 복음의 내용을 누가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멸시한 그 분을 믿는 것은 오직 주의 은혜로만 됩니다.

 

히브리서 5:7~10절입니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이 말씀 안에 욥의 탄식도 담겨있다고 봅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의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이 담겨진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신데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대속 적인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 없다면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들을 자기 품에 안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 곧 믿는 자의 구원의 근원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인내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5:7~11절입니다.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는 욥을 인내로 말합니다. 그래서 농부가 씨를 심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서로 원망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원망이란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원망을 한다는 것은 아직 종말의 확정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십자가로 완료된 사실을 안다면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완료된 종말이 이 현재를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십니다. 이 역사의 문고리를 잡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모든 선지자들이 고난 중에 오래 참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욥을 말합니다.

 

욥의 인내와 욥에게 주신 결말이 무엇입니까? 욥의 인내는 원망을 하면서도 주님의 답변을 기다렸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 중보자와 대속자를 기다린 것입니다(16:19, 19:25). 그 인내의 결국은 욥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욥이 그렇게 기다린 중보자와 대속자를 그의 고난 속에서 본 것입니다. 그 악의 실체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실 것을 고난 가운데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재앙으로 보이는 그 까닭 없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이러한 욥의 인내는 결국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로 인하여 성도는 믿음의 길을 갑니다(딤전2:5). 그 중보는 자신의 피 뿌림으로 이루신 새 언약입니다(12:24). 그 새 언약의 백성들은 이미 확정된 미래를 알기에 세상의 그 어떤 요란함에도 흔들릴 이유가 없이 생명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의 결론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악체계와 인과응보에 빠진 우리를 그의 대속으로 생명을 주시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