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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10~17 욥이 죽었더라 2016. 11. 16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 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 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 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20151223일에 시작한 욥기 설교가 오늘로 마칩니다. 오늘까지 44회에 걸쳐 욥기를 봅니다만 그동안 욥기 하면 남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욥기를 마치면서 욥에 대하여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되어 우리의 몸이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기에 소화가 되었다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씀을 읽고 해석하여 나의 소유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해체하셔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 완성의 자리는 이 역사 속에서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두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11~13절입니다.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는 자와 주 밖에서 죽는 자로 나누어집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는 받은 자들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주 밖에서 죽는 자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였기에 짐승에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사람이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666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자는 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심판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둘 다 죽음으로만 보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봅니다.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고 합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욥이 죽었더라는 제목을 택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욥기를 생각할 때에 고진감래로 생각을 합니다. 마치 동화책의 결론처럼 여러 가지 고생을 많이 하다가 마침내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결론입니다. 이러한 동화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줍니다. 그런데 동화의 주인공들이 정말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그래서 어른들이 읽는 소설들은 열린 결말이거나 비극적 결말들이 많습니다. 동화와 같지 않음을 살아보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한동근씨의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쓰려고 해라는 노래도 인기가 있습니다. 네가 떠나버린 비극적 결말이 싫어서 그 소설의 끝을 다시 쓰고 싶다는 말이겠지요!

 

본문 10~16절까지 보면 욥의 결론도 겉으로 보면 동화의 결론과 같아 보입니다. 고생 끝에 모든 것이 회복될 뿐 아니라 재산이 두 배로 늘어나고 자식은 처음의 자녀처럼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습니다. 떠나간 사람들도 다 돌아와서 축복합니다. 그런데 아내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한 그 아내가 욥이 회복되자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호세아와 고멜을 생각하면 욥도 얼마든지 그런 아내를 다시 받아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40년을 더 살면서 자손 사대를 보았습니다. 이런 것이 고생 끝이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욥은 처음부터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양 칠천과 낙타 삼천과 소 오백 겨리와 암나귀 오백이라면 얼마나 거부입니까! 이것이 배로 늘어난 것이 복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던 자녀들 10명이 죽는 그 고통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재산이 두 배 늘어나지 않아도 이런 재앙이 오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뿐 아니라 결국은 욥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십니까?

 

욥기는 욥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욥을 이렇게 쓰시고 계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허락 하에 욥에게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그 일에 사탄도 도구로 사용됩니다. 욥은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끝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닥친 까닭 모를 재앙을 통하여 처음에는 원망을 하지 않지만 곧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그러자 위로하고자 찾아온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인과율로 욥을 책망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고 교회에 헌신충성 봉사를 하여 복을 받으라고 하면서 성경까지 인용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하면서 하나님을 인간의 종교적인 거래대상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바친 만큼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쳐서 받고자 하는 복이 썩어질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입니까? 대부분 둘 다를 말합니다. 그런데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을 섞는 것이 이미 다른 복음이 됩니다.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하여 인과율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1:9~10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면 욥이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욥기의 마지막 말씀이 욥이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욥이 죽었는데 그가 받은 재산들이 남아 있습니까? 그의 자녀들이 남아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욥에 대비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결론도 죽었더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이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동안 그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믿었느냐는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미 본문을 보면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만 몇 곳만 찾아보려고 합니다.

 

욥기 19:25~27절입니다.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은 죽는 것이 더 나을 만큼 극심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고난 가운데 터져 나온 고백이 자신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며 마침내 땅위에 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을 뵐 때에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초조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물론 친히 얼굴을 뵙는 것이 아니라 폭풍이 속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습니다.

 

욥기 42:1~6절입니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이것이 역사 속에서 고난 중에 여호와를 뵙게 된 자의 고백입니다. 이러한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한 자가 인과율로 공격한 자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는 제사장의 역할을 합니다.

 

욥기 42:7~9절입니다.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지난주에 본 내용입니다. 욥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자신을 욕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욥기도 결국 구약의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이 자신을 증거 한다고 하였습니다(5:39). 그러면 욥의 이러한 고난은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것이며 성도에게는 연관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동일한 고난의 길을 가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까닭 없는 고난이 반드시 성도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그런데 사람들은 욥을 공격한 욥의 친구들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자기 죄로 인하여 저렇게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닌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셨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스데반집사처럼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합니다. 이것이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임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성도라면 이 세상에서 까닭 모를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처음에 찾아본 요한계시록 14:12절만 다시 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성도들의 인내를 말합니다. 성도가 된 자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이 역사 속에서 인내하는 자들이 됩니다. 인내라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과 이루신 일들을 통하여 성도가 무엇을 믿고 인내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가 오실 때 까지 기다렸습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성령이 임하게 되면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와 연결이 됩니다.

 

야고보서 5:7~11절입니다.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의 결론을 신약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이미 보았습니다. 성도란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이 역사 속에서 고난을 통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고난 속에서 들을 때에 주님에 대하여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처럼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이 고난 가운데서 오래 참았습니다. 오래 참은 결말이 무엇입니까?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만약 주께서 오래 참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다 심판을 받아도 벌써 받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고난 가운데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인내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견딘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자신의 의가 다 깨어집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말을 거두어들이고 회개하게 됩니다. 결국 욥의 인내는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연결됩니다.

 

로마서 9:21~24절입니다.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야고보의 욥의 결론이 인내로 인하여 주의 긍휼과 자비를 입은 것으로 말하고 있듯이 바울사도도 주의 오래 참으심을 주의 긍휼을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1:13~17절입니다.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이 알지 못할 때에 즉 자신의 율법적인 의로 흠이 없다고 여겼을 때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방과 박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비방과 박해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욥이 자신의 의로움으로 가득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의 정점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너의 의로움으로 나를 악하다고 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욥이나 바울이나 주의 긍휼과 자비를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주의 오래 참으심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심으로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의 본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로마서 5:1~11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기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아직 환난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된 자들이 이 세상의 헛된 영광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은 필수 코스가 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환난을 통하여 연단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나타나는 자들은 무엇을 알게 됩니까?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어 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정된 그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사랑임을 아는 과정이 고난입니다.

 

베드로후서 3:7~10절입니다.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성도는 장차 불살라 질 것들이 지금 이 역사 속에서 환난을 통하여 불살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11~16절입니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언제 바라보겠습니까? 환난 중에 바라보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하늘에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 바울, 베드로가 다 무엇 때문에 주의 오래 참으심을 말하게 되었습니까?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이 역사 속에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성도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이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고 성경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다 한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18절입니다.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지 그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그 영원한 영광에 참여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 죽기 전에 그 은혜가 담겨져야 합니다. 그 은혜가 담기는 과정은 고난입니다. 고난의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됩니다. 이 진리가 우리 안에 담겨지면 이 역사 속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옥에 갇혀도 기뻐하고(바울), 내일 죽는다고 해도 옥에서 깊이 잘 잘 수 있습니다(베드로). 그러므로 욥이 죽었더라고 하는 것도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죽음이기에 복된 죽음입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