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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6:6~11 게으름에 대하여 2017. 3. 1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지난주에 담보와 보증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게으른 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게으름에 대하여는 세상에서도 수많은 교훈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서 교과서에서 배운 개미와 베짱이에 대한 내용도 전형적인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대한 교훈입니다. 뜨거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먹을 것을 준비하는 개미와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노래만 하는 베짱이의 그림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겨울이 닥치자 개미는 따뜻한 집에서 먹을 것이 가득한데 베짱이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기 직전에 개미의 집으로 가서 도움을 받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게으르지 말고 근면성실하게 살라는 교훈입니다.

 

세상에서도 수없이 많은 이런 교훈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라는 성경이 기록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교훈들도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잠언과 같은 지혜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담보와 보증을 서지 않는 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단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만 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은총을 말하고 자연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피조세계에 밝히 보이게 하셨지만 타락한 인생들은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고 한 결과가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볼 때에 일차적으로 문자적인 의미를 보고나서 성경 전체의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 6~8입니다.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개미가 하는 것을 배우라고 합니다. 개미는 감독도 없는데 전혀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일을 부지런히 합니다. 개미는 먹을 것을 여름과 가을의 추수기에 준비를 하여 둡니다. 저도 점심시간에 대방동 체육공원을 한 바퀴 산책할 때에 한참이나 개미를 보곤 합니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입니다. 어떤 감독도 없는데 개미들은 부지런히 일합니다. 생물학자는 이런 개미의 활동을 자율성이라고 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소설은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개미의 이런 자율성과 부지런함은 누가 준 것입니까?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생은 개미보다 못한 모습들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17:9). 그러므로 사람이 개미에게 가서 보고 배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본문 9~11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주로 누워 지내기를 좋아합니다. 게으름은 잠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공부를 해야 할 아이가 게임에만 빠져 있는 것도 게으름의 다른 모양입니다. 게임에는 열심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일어나라고 하거나 게임을 그만하라고 하면 당장 나오는 말이 조금 만 더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고 하면 빈궁하게 되고 곤핍하게 되는 일이 강도같이 군사같이 임하게 된다고 합니다. 저도 이 말씀을 청소년기에 노트에 자주 써 두었습니다. 낮에 10시간 넘게 일하고, 저녁에 값싼 식사를 급하게 먹고,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가장 큰 싸움이 졸음입니다. 그래서 졸음을 이기려고 이 말씀을 써 두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졸음이 얼마나 힘이 센지 눈이 천근만근이라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피곤하여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게을러서 좀 더 자자고 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에 대한 말씀을 봅니다.

 

잠언 10:4절입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앞에서는 저의 이야기를 했지만 이 말씀으로는 저의 부친의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보았기에 이런 말씀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친은 제가 보기에 그렇게 부지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일을 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하시고 저녁때는 해가 져서 사물이 잘 보이지 않을 때라야 일을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호롱불을 켜고 새끼를 꼬았습니다. 농한기에는 집에서 두부도 만들었습니다. 저도 그런 일들을 거들어 드리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지런하게 일하셨지만 늘 가난했습니다. 그러면 잠언서의 이 말씀을 문자대로도 적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 좀 커서야 이런 문제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 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에 금 수저 흙 수저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미 구조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는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공평한 출발이 안 되는 세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가도 가기 전에 부모로부터 집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유산은커녕 대학도 아르바이트 해가면서 학자금 대출 받은 사람은 장가가려고 해도 전세방도 얻지 못하여 사글세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 언제 집을 마련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단지 게으르면 가난해 지고 부지런하면 부자가 된다는 식의 문자적인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에 대한 내용도 이스라엘이라는 배경에서 일차적으로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경제정책은 율법입니다. 특히 토지의 문제는 사고팔고 할 수가 없습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으로 가나안 땅을 무상을 받은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물론 그들이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였지만 이들이 받은 땅은 자신들의 공적을 따라 많이 받고 적게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수대로 공평하게 제비뽑아 나누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토지의 공 개념이 확실하면 빈익빈 부익부가 나올 구조가 안 됩니다. 물론 살다가 어려워지면 경작권을 팔수가 있지만 언제든지 되 물릴 수가 있습니다. 본인이 형편이 안 되면 친척이 물려줄 수 있고, 친척이 없으면 희년 때에 자기에게로 땅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가나안 체제를 본 받아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부지런히 일해도 악한 자들이 착취를 하는 것입니다. 잠언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배경과 일반적인 게으름에 대한 내용까지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잠언에서 게으름에 대한 내용을 다 찾아봅니다.

 

잠언 10:26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12:24절입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12:27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13:4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15:19절입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19:15절입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19:24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일반적인 게으름에 대한 책망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이 본문 강해에서 다시 봅니다.

 

20:4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씨를 뿌릴 때에 뿌리지 않고 가꾸지 않는다면 추수 때에 거두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의 토지를 조상으로 물려받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여호와의 전쟁으로 무상으로 분배되었기에 땅을 사고 팔 수가 없습니다. 살다가 형편이 어려워지면 경작권은 팔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친척이 물려주든지 희년이 되면 땅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땅이 있음에도 게을러서 밭 갈아 씨를 뿌리고 가꾸지 않는다면 추수 때에 구걸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땅이 없는 레위지파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어떻게 합니까?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돌봐야 하도록 율법에서 정하여 두었습니다.

 

그 외에도 잠언에서 게으른 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더 말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21:25). 심지어 사자가 밖에 있으니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고 하면서 일하러 나가지 않습니다(22:13, 26:13). 이런 자들은 핑계를 되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핑계입니다.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보면 표가 납니다(24:30~3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뒹굴 거리며 있습니다(26:14).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합니다(26:15).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깁니다(26:16). 게으른 자가 고쳐지지 않는 것은 온갖 핑계를 될 뿐 아니라 자신이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기에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앞에서 살펴본 경제체제나 구조에 대한 내용보다는 일반적인 게으름에 대한 경고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치면 그야말로 바른생활 책을 읽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에서 게으름에 대하여 다시 보겠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5장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기 위하여 바로 왕에게 왔습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러 가야 한다고 하였을 때에 바로가 어떻게 합니까? 짚을 주지 않고 전과 똑 같이 벽돌을 만들게 합니다. 감독자들이 왜 이렇게 하느냐고 바로에게 따지자 바로는 너희가 게을러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한다고 하면서 고역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로의 시각이 세상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한다고 주일에 쉰다고 하면 먹고 살만하니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교회에 가자고 하면 좀 더 먹고 살만한 것을 마련해 두고 가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좀 더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좀 더라고 하는 말은 죽을 때가 되어도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정말로 먹고 살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많을까요? 아니면 올 수 있는데 오지 않을까요? 올 수 있는데도 오지 않는 것은 영적인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게으름에 대한 설교 내용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개미를 보십시오. 그는 일어나면 날마다 서둘러 하나님의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들은 바를 음미하며 모든 것을 마음속에 새깁니다. 그는 탈곡장에서 모아들인 곡물을 안에 차곡차곡 쌓습니다.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들은 다음 교회에서 돌아오면 책을 골라 펴 들고 읽으십시오. 이 모든 것을 행할 때에 그것은 눈에 보입니다. 개미는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길을 걸으며 나르고 쌓습니다. 때가 되면 겨울이 옵니다. 겨울이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손실이나 사별이 있기 마련입니다. 개미가 먹을 양식을 안에 저장해 놓은 것을 모르는 이들은 아마 개미를 가련하게 여길 것입니다.’어거스틴은 개미의 부지런함을 생명의 말씀을 구하는 것으로 봅니다. 저도 이런 방향에서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들을 거둡니다. 그런데 잠언에 보면 게으른 자는 육체 곧 썩어질 것을 심는 것도 싫어하면 썩어질 것도 거두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면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하여 심으려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다는 말은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때에 그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의 길로 가게 합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도 이 땅에 사는 동안 마땅히 부지런하게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타락 이후에 사람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아갑니다. 우리말에도 땀 흘리지 않고 먹는 자를 불한당(不汗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썩을 양식을 준비하는 일은 누구나 부지런히 합니다. 그런데 썩지 아니할 양식에 대하여 얼마나 부지런하게 준비하십니까? 썩어질 것에 대한 부지런함의 백분의 일이라도 썩지 아니할 것에 대한 열심히 있습니까? 무엇에 부지런하고 무엇에 게으릅니까? 잠언에서 게으른 자들에게 개미에게 가서 보고 배우라고 합니다. 문자로만 보면 게으른 사람들이 개미를 보고 부지런해지라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다른 말씀들과 연결해 보니 우리가 영적인 일에 게으른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적용해 볼 수가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오늘 밤에 나의 영혼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부자가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즐기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그 쌓아둔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부요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자가 이렇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에게 부요하고 하나님께 인색하다는 말씀은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들의 삶의 목적이 이런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악이며 고통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이스라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란 실상은 한 가지로 인하여 나온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 결과로 사람들은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물을 저축하려고 하여도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무엇을 마련하려고 하여도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의 영광에 빠진 타락한 인생은 아무리 부지런하게 웅덩이를 파고 저축한다고 하여도 만족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모습이 하나님에 대하여 게으른 것입니다. 그러면 택한 백성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레미야 7:13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여호와께서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듣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멸망 직전부터 여호와의 말씀을 부지런히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열심이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 몇 곳만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11:7~23~26절입니다. “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5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26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을 거역한 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냅니다. 끊임없이 보냅니다. 출애굽한 날부터 오늘까지, 예루살렘의 멸망직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이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냅니다.

 

예레미야 32:31~35절입니다. “31 이 성이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나의 노여움과 분을 일으키므로 내가 내 앞에서 그것을 옮기려 하노니 32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모든 악을 행하여 내 노여움을 일으켰음이라 그들과 그들의 왕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제사장들과 그의 선지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다 그러하였느니라 33 그들이 등을 내게로 돌리고 얼굴을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며 내가 그들을 가르치되 끊임없이 가르쳤는데도 그들이 교훈을 듣지 아니하며 받지 아니하고 34 내 이름으로 일컫는 집에 자기들의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서 그 집을 더럽게 하며 35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렉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 하게 한 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일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에 얼마나 부지런한지 단 한 순간도 하나님께 순종한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죄 짓은 일에는 부지런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는 얼마나 게으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히, 끊임없이 자기의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36~41절입니다. “36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말하는바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긴바 되었다 하는 이 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37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것은 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한 없이 게을렀습니다. 죄 짓는 일에는 한없이 부지런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열심을 내었지만 그 마음 안에는 도둑의 심보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나라를 심판하시는데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이들을 다시 돌이켜 주시고 이들에게 복을 주시고 떠나지 않으시려고 영원한 언약을 세워주신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이 땅에 심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언약이 바로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게으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하나님의 열심과 부지런함이 새 언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9:7, 37:32).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심히 이루어내신 그 결과가 십자가의 다 이루심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지자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안에도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9~13절입니다.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랑, 우애, 존경을 하면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무엇에 부지런을 떨고 있습니까? 무엇에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까?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6~15절입니다.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잘 못 들은 자들이 임박한 종말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일하지도 않고 남에게 폐만 끼치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게으르게 행하는 자들은 사도들의 복음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오해한 자들 중에 이런 자들이 우리 가운데도 있습니다. 전에는 교회일이라도 열심을 내었는데 복음을 듣고 나서는 교회일이라고 하는 것도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특별한 교회일도 없는데도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일에 게으름을 부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일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조용히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도의 편지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수처럼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합니다. 복음을 오해한 게으름에 대하여 이렇게 심하게 책망합니다.

 

히브리서 6:9~12절입니다.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보다 더 좋은 구원에 속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구원 받지 못한 세상의 모습이 어떤 심판이 있는지를 앞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보면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를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인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자라면 하나님을 말씀을 받고 그에 따른 합당한 열매들이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열매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고 합니다. 게으르지 않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은 자들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그 오래 참음의 예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 결과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열심이 성도에게 나타나는데 성도가 게으를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1:1~3절입니다.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사도가 열심을 냅니다. 사도가 열심을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사도의 이러한 열심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종교사업이 아닙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냅니다. 중매쟁이로서의 열심입니다. 바울사도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가니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열심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게으르고 무엇에 부지런한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제 보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게으르고 무엇에 부지런한지 말씀으로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헛된 일에 분요하지 말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일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