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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6:12~19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2017. 3. 8

 

12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13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을 하며 14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15 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 16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주인인체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에게 잘 보여서 내가 덕을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주여! 주여! 부르면서 많은 일도 하고 큰 능력도 행하지만 여전히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으면 그동안 열심히 하던 것들을 대체적으로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온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알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상대가 갑이고 내가 을일 경우에 주인의 기분을 맞추어주려고 갑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헤아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해서 부모가 시키는 것을 하는지 부모의 잔소리가 싫어서 시키는 대로 하는지 부모가 되면 압니다. 타락한 우리 인생도 우리의 자녀를 보면 아는데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겠습니다.

 

12~16절을 봅니다. “봉독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야구가 생각이 났습니다. 야구 감독이 선수들에게 말도 하지만 눈짓과 발짓과 손짓으로 사인을 보냄으로 상대방을 속여서 승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은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게임에 도루(盜壘)가 있습니다. 주자가 투수와 포수와 상대방의 감독을 속이고 베이스를 도둑질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규칙이 정당화되는 야구는 비신사적인 운동이라고 해서 유럽은 축구를 좋아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축구도 상대방을 속입니다. 온 몸으로 상대방의 수비수를 속이고 공을 몰고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 , 발이 다 동원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입니다.

 

본문 12절의 불량하고 악한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이들은 그릇된 말을 하고 눈짓 발짓 손짓으로 서로 신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쁜 짓을 하려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근원은 비뚤어진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인하여 항상 악을 꾀합니다. 이것은 이미 타락한 인생의 실상입니다. 창세기 6:5절과 8:21절을 보시면 사람의 마음의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항상 악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라는 것이 악한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만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도 이런 마음이기에 아귀(餓鬼)다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아귀(餓鬼)라는 말은 불교용어입니다. 불교의 지옥은 여러 곳인데 아귀도에 빠진 자는 아()자가 주릴 아()자이기에 이곳에서는 늘 배가 고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생된 의미가 염치없이 먹을 것이나 탐하는 사람. 성질이 사납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귀다툼에서 자유롭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교회에 이런 다툼이 없습니까? 시기와 경쟁과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들이 가득하다면 이런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들과 사는 장소는 재앙이 갑자기 닥침으로 멸망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살릴 길이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윤리와 도덕도 사람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착하고 바르게 살면서 남을 도와가면서 살아야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노력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보자고 합니다. 이런 말을 반대하면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만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남편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우리의 자녀가 세상에서 잘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인천 상륙작전이라는 윤태호씨의 만화가 다음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만화책을 사 봐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잘 만들었습니다. 해방이후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대국들에 의하여 38선이 그어지고 북한은 소련이 신탁을 하고 남한은 미군이 신탁을 합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를 싫어하기에 친일파를 더 신뢰합니다. 그 과정에서 친일한 사람들이 미군정에 줄을 서는 내용이 여러 사료를 근거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본순사의 앞장이 노릇을 한 동생이 밉지만 밥을 먹고 살게 하여 주니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아 삽니다. 그 장면의 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천지가 욕망에 쌓여있다만화가도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부추긴다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12절입니다. 불량하고 악한 자는 마음이 이미 타락한 상태이기에 온 몸으로 나오는 것이 다 악한 짓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량하고 악한 자를 건달이나 세상의 악한 사람 정도로 보면 성경을 윤리도덕 수준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량하고 악한 자라는 단어가 어떤 사람들에게 사용되는지 성경을 찾아보면 성경에서 불량하고 악하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13장에서 불량한 사람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쫓아가게 하는 자들이 불량하고 악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선지자나 꿈꾸는 자로 나옵니다. 즉 계시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말한 대로 이적과 기사기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따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하는 길로 인도하는데도 그 기적을 보고 따라가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시는지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량하고 악한 자란 온갖 표적과 기적을 이루어 내면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 곧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여 내신 것을 부인하게 하는 자들이 불량하고 악한 자들입니다.

 

사사기 19장에는 에브라임 지파에 사는 레위 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 첩이 바람을 피우고 친정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 남편이 그 아내를 데리고 오는 중에 여부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무도 나그네 영접을 하지 않는데 한 노인이 이들을 영접하자 그 밤에 그 마을의 불량배들이 레위 인을 끌어내어 상관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첩을 내어주고 그 첩은 밤새 윤간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여기서 상관하려고 몰려온 자들을 불량하고 악한 자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레위 인이 첩을 구한 것이나, 여부스 사람들이나 모두가 다 불량한 자들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불량하고 악한 자들입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불량하고 악한 자로 나옵니다. 이들은 여호와께 드려야 하는 제물을 자기들이 먼저 가로채 갑니다. 그리고 성막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음행도 행합니다. 이러한 짓을 행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불량한 아들을 엘리 제사장은 거저 소문이 좋지 않다고 하는 정도로 말합니다. 결국 이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갔다가 그 언약궤 앞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언약궤를 빼앗겨 버립니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불량하고 악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세상에서 통용되는 불량배와 건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사무엘상 25장에서는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불량한 자로 나옵니다. 다윗의 도움을 입었지만 다윗에게 도움을 주기를 거절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주의 계집종이라고 무릎을 꿇습니다. 여기서 나발이 불량한 사람이라고 아비가일이 말합니다. 다윗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불량한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여호와의 전쟁을 하는 자임을 아비가일이 안 것입니다. 이런 자가 지혜자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의 두 아들이 갑자기 죽었듯이 나발도 아내를 통하여 다윗이 오다가 돌아간 이야기를 듣고서는 몸이 마비되어 죽어버립니다. 즉 다윗 언약을 무시한 자가 불량하며 악한 자입니다.

 

사무엘상 25장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블레셋 땅 시글락에 아기스 왕의 허락을 받고 기거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아기스 왕이 다윗도 부릅니다. 그러자 블레셋의 다른 장관들이 반대하여 시글락으로 돌아와 보니 아말렉 군대가 다윗의 식솔들과 가축 떼를 다 약탈하여 갔습니다. 추격하는 중에 피곤하여 따라가지 못한 2백 명을 시냇가에 남겨두었습니다. 4백 명이 끝까지 추격하여 대승하고 모든 것을 되찾아 돌아오는 중에 낙오한 자들에게 처자식만 주어서 내 보라고 하는 자들이 불량하고 악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전쟁을 모르고 자신들의 공로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들을 책망하면서 전쟁에 참여한 자나 못한 자나 참여한 자나 동일하게 전리품을 나누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무엇이 불량하고 악한 자인지 선명해 집니다. 하나님의 공로를 모르고 자기 행위의 공적을 말하는 자가 불량하고 악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열왕기 상 21장에서는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이세벨이 불량한 자 두 사람을 고용합니다. 이들은 나봇이 여호와와 왕을 모독하였다는 거짓 증언을 함으로 나봇이 돌에 맞아 죽게 합니다. 왕비의 청탁을 받고 거짓 증인이 된 것이 불량하고 악한 자입니다. 물론 이들은 평소에도 그렇게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불량하고 악한 자이지만 이를 사주한 이세벨이 더 악한 자입니다. 물론 이세벨의 배후는 사탄입니다. 배후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입니다.

 

지금까지 성경 여섯 곳에서 불량하고 악한 자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량하고 악한 자들과 우리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의 모습입니까? 아니며 나와 상관이 있는 내용입니까? 우리가 끔찍하게 살인한 자가 아닌데 너무 심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라도 여호와의 전쟁에 대하여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자의 모습을 봅시다. 자신은 죽을힘을 다하여 전쟁에 나섰는데, 가다가 피곤하다고 머문 자들과 똑 같이 전리품을 나누라는 다윗의 말에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꽃샘추위로 추운 이런 수요일 날까지 나온 우리하고 집에서 드라마나 보고 있는 사람하고 상이 똑 같다면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씀을 듣고 주님을 아는 것 자체를 복이라고 여깁니다.

 

오늘 본문 16~19절입니다. 12~15절까지 불량하고 악한 자가 어떤 자인가를 다시 반복하여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 눈짓, 발짓, 손가락질로 그 불량하고 악한 짓을 합니다만 그 불량하고 악한 짓을 하는 것은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로 항상 악을 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몸의 지체를 언급하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문제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손과 발과 지체를 언급하지만 실상은 전인(全人)의 문제입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나오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됩니다.

 

16절에서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숫자로 나타내는 것을 숫자 잠언이라고 합니다. 잠언의 다른 곳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이 여섯 개나 일곱 개 정도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다 싫은 것입니다. 얼마나 밉고 싫었으면 홍수로 온 세상을 멸하셨겠습니까? 앞에서도 잠시 보았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한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왜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 있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첫째 교만한 눈입니다. 잠언 21:4절에서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라고 합니다. 인간이 언제부터 눈이 높아졌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부터 눈이 높아진 것입니다. 유혹이 없었을 때는 선악과를 보아도 먹음직하거나 보암직하거나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혹을 받으니 갑자기 그렇게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따먹고 나니 실제로 눈이 높아졌습니다. 첫 유혹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이었기에 이제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이 안 됩니다. 그리고 이웃이 나보다 나아보여도 그냥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시편 101:5절을 보면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것입니다. 이것도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둘째는 거짓된 혀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자신에게 불리하면 당장 거짓말이 먼저 나옵니다. 이런 거짓말의 아비는 사탄입니다. 이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있는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국민의 대표가 모인 국회에서도 얼마나 거짓말을 하는지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 자들이 장관이 되고 청와대의 고위직에 있는 자들이며 대통령까지도 하는 자들이 다 거짓말을 합니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과연 개선과 개혁으로 고쳐지겠습니까? 새롭게 창조되기 않으면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새롭게 창조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길 뿐입니다.

 

셋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입니다. 우리의 손이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온갖 대중 매체가 발달한 지금은 손가락 몇 번만 까딱거려도 온갖 악을 행하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왜곡된 뉴스를 생산해 냅니다. 악한 댓글을 답니다. 저도 서울 충현교회 설교하려고 간 것을 가지고 온갖 음해를 다하고 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전화 한번만 해도 될 것을 알아보지도 않고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을 추측하여 글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을 주려고 손으로 만들어낸 것들이 오히려 인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넷째는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러한 지체들의 행동들이 사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우리의 전인의 활동을 하는 장소로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떠한지가 그 사람의 모든 언행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눈이 높고, 우리의 혀가 거짓을 말하고, 우리의 손과 발이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입니다. 우리의 발이 어디로 빨리 달려갑니까? 나의 재미와 이익과 만족이 있는 곳이라면 얼마나 발이 빨리 가는지 우리가 압니다. 우리를 책망하고 의로 교육하는 말씀을 듣는 일에는 게으릅니다. 우리의 죄악 된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에는 얼마나 열심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입니다. 증인을 잘 서면 억울한 자의 누명을 벗겨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사적인 유익을 위하여 거짓 증언을 하게 되면 죽일 자를 살리고 살릴 자를 죽이게 됩니다.

 

일곱째는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입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일곱 가지를 이렇게 목록으로 만들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성경전체에서 다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성경에서 그 뜻과 의미를 보지 않으면 그저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좋아할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을 본인이 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는 사람도, 자신은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하는 자들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여긴 자들도 인간의 전인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전적으로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인용된 말씀들이 다 구약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여호와 보시기에게 이렇게 악한 짓을 하는 자들입니다. 단지 여섯 일곱 가지가 아니라 인간이 전체적으로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인간이 이런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을 어려서부터 지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는 자신들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자들이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자들이란 유대인이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나 세리와 창기들과 이방 죄인들을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19~26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구약의 말씀들을 찾아보고 나서 신약의 이 말씀을 보고 나니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 집니다. 구약에서도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불량하고 악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있는 자들이 불량하고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잘 지켜서 흠이 없다고 여긴 자들도 여호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10:26~29절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믿은 것입니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룬 것입니다. 이 복음을 거절한다면 속죄를 거절 한 것이기에 무서운 심판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로 두세 증인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짓 밝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한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무겁겠는지 너희는 생각하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결론적으로 한 가지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라고 한 바울사도의 말대로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는 자를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그러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만을 향하여 너는 내 사랑 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3:17, 17:5, 벧전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