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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1~6 티끌과 재 가운데서 2016. 11. 2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마지막 장에 왔습니다.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한다고 합니다. 욥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회개를 하게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회개는 내가 잘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설교시간에 회개하라고 하는 말을 듣고 회개하는 내용들은 주로 내가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회개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 벌을 받는다는 말과 의무를 다 함으로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회개라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거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재앙을 당합니다. 욥은 자기에게 일어난 재앙을 모르지만 독자들은 그 이유를 압니다. 그러므로 욥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 가운데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왜 이렇게 하느냐는 원망과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욥은 자기에게 일어난 재앙의 이유를 몰랐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시기를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폭풍우 속에서 나타나셔서 폭풍처럼 질문하신 내용이 천지 만물의 모든 피조물들을 누가 만들고 다스리고 있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 질문 앞에 욥은 입을 손으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고 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38장부터 39장까지 수많은 피조물들을 말씀하실 때에 욥은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내용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욥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산과 들의 짐승들과 들풀 한포기 까지 하나님은 돌보시고 때를 따라 그것들을 위하여 비를 주신다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공중의 나는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한 새들과 들꽃 하나도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주일오전에 보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이미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를 책망하신 말씀이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내용을 다 듣고 나면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나병이 든 자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드러나면 예수님 안에서 온전해짐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욥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얼마나 완전하게 다루고 계시는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욥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까닭모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욥의 입장에서 부당하다고 여겨도 그것이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고난의 해석이 인과응보적인 것으로 해석이 안 됨을 보았습니다. 훈련을 위한 고난도 있으며 대속적인 고난도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신비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도 아담의 범죄이후의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적인 고난해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욥에게 네 의로움을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신약에서 연결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0:15절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천국을 포도원 주인이 일할 사람을 찾는 내용으로 말씀합니다. 아침 일찍 불려온 사람도 있고 낮에 불려온 사람도 있고 일 마치기 한 시간 전에 불려온 사람도 있습니다. 저녁이 되어 제일 나중에 온 사람부터 일당을 계산하는데 한 시간 일했는데도 하루 품삯을 다 주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고 자기는 좀 더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똑같이 주니 화가 난 것입니다. 그때 주인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게 네게 하루 품삯을 약속하였으니 네 것이나 받아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하십니다.

 

자기가 무엇을 했다고 하는 것이 있을수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욥에게도 자신의 의로움이 있기에 하나님께 따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욥에게 들짐승이 언제 새끼를 낳는지를 묻습니다. 우박창고를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이러한 질문 앞에 욥은 자기 손으로 입을 막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욥에게 하나님은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대하여 또 말씀하십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이 짐승들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짐승들입니다.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악조차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말씀 앞에 욥이 드디어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1~3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1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실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해석도 안 되고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는 악조차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말씀 앞에서 욥은 주님께서 못 하실 일이 없다는 고백을 합니다. 못하실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다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한 바를 완전하게 이루내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판단과 가치관을 따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함부로 말한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깨닫지도 못하고 말하였고 알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4~6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4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한글개역은 4절에서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여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번역은 주께서 하신 말씀으로 나옵니다. 함께 보면 욥의 질문에 하나님이 질문하시고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욥이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답변 속에서 욥은 지금까지 귀로만 들었지만 이제는 눈으로 뵙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합니다. 욥이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은 결국 악의 문제로 봐야 합니다. 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악을 완벽하게 다루고 계심을 듣고서는 자신의 말을 거두어들이고 회개한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본 마태복음 20장의 천국비유에서 주인의 선하심을 보고 악하다고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루 종일 일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면 세리와 죄인과 이방인들이 한 시간 일한 사람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긍휼을 베푸시는 일에 화가 나는 사람이 자신이 무언가 한 일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욥은 정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로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인 의로움인 것이지 욥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재앙이 닥쳤을 때에는 주신이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계속되면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하나님께도 원망과 불평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만 까닭모를 고난 앞에서 자기가 행한 의로움이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깨뜨리는 것이 까닭모를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 5~6절을 다시 봅니다.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모습이 자신의 말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한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회개하고 슬퍼하는 모습의 하나가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티끌이며 재와 같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창세기 2:7절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흙이 오늘 욥이 고백하는 티끌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도 히브리어에서 붉은 흙이라는 아다마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원재료가 티끌입니다. 이러한 티끌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흙도 욥이 고백한 티끌이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의 인간의 타락이후에 인간은 다시 티끌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티끌들이 자신들의 어떠한 행위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뜻을 보이신 것이 가인과 아벨입니다. 둘 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것은 받아주시고 가인의 것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을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설명을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둘 다 받아주시지 않으셔도 할 말이 없는 땅의 티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것을 받아주시자 가인이 분노하고 아벨을 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가 너의 앞에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하셨지만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티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의 정성을 받아주지 않느냐는 분노가 아벨을 살해한 것입니다. 자신이 티끌임을 모르는 소치가 이러합니다.

 

이렇게 티끌이 된 인생들이 행한 일이란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방주를 예비하고 살아남은 자녀들이 각 지역으로 흩어집니다. 그냥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벨탑 사건 후에 흩어집니다. 그렇게 흩어진 자들 가운데 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여호와 앞에서 기도를 하는 내용이 자신은 땅의 티끌과 재와 같은 자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18:27). 이것이 은혜입니다.

 

욥기 2:12절입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욥의 친구들이 욥의 재앙을 보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립니다. 이것은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슬픔을 표현하지만 자신들이 땅의 티끌임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끝까지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까닭 없는 고난이 닥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한 욥이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욥기 19:25절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앞에서 이 본문을 볼 때에는 대속자에 대한 내용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대속자가 살아계시기에 마침내 그가 땅위에 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이 욥이 고백한 티끌과 같은 아파르입니다. 땅의 티끌로 사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대속자가 이 땅위에 서시면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알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신인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이 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이 땅의 티끌과 재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모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서 땅의 영광을 구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땅의 티끌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또한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시편 103:10~15절입니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리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분이지시만 그 공의보다 긍휼이 더 크신 분이심을 찬양하면서 우리의 죄악을 따라 심판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인자하심이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크시다고 합니다. 우리의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이 둘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죄과를 옮기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것처럼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신 것입니다. 우리의 체질이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15~19절입니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인생이 풀과 같고 들의 꽃과 같고 바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인자는 영원하시며 만유를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여호와의 다스림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여 보기에 늘 불평과 원망을 입에 달고 삽니다. 욥은 하나님도 인정하실 의로운 욥이었습니다. 이러한 욥도 까닭모를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 원망의 끝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만유를 다스리고 계심을 말씀하시면서 악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말씀 앞에 자신이 땅의 티끌이며 재와 같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티끌로 자신의 뜻을 위하여 마음대로 사용하신다는 말씀 앞에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9:18~23절입니다.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쌍둥이입니다. 그런데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는 미움을 받고 하나는 사랑을 했다는 것이 대하여 하나님께 허물을 돌리는 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토기장이와 진흙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바울사도입니다. 자신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한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잡아 죽이는 일이 여호와의 영광이라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욥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땅위에 서실 대속 자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 대속 자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은 그들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 곧 영광의 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2~14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누구위에 임하여 계시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낯선 고난이 찾아옵니다. 우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 닥칩니다. 이러할 때에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욥에게 닥친 고난과 같은 고난들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코스라고 야고보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낯선 고난을 통하여 성도는 자신이 티끌과 재임을 알게 됩니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어지는 15~19절입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난 받는 것은 개고생입니다. 그러나 악한 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고난을 통하여서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일차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시인 에드워더 실리토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이 시를 소개한 이유는 낯선 고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당신을 찾지 않던 우리가 이제야 당신을 찾습니다.

어둠을 뚫고 불타는 당신의 눈동자는 우리의 하나뿐인 별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이마에 난 가시 상처 자국이 꼭 필요하며,

상처투성이 예수님,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늘이 두렵습니다. 하늘이 너무나 조용합니다.

우주 어디에도 우리가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상처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향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 예수님, 당신의 상처를 의지해, 당신의 은혜를 구합니다.

 

다른 신들은 강했으나 당신은 연약했습니다.

사람들은 말을 탔으나 당신은 비틀거리며 보좌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에 하나님의 상처만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신도 상처가 없으며, 오직 당신만이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