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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4:15~18 어리석은 자 2017. 7. 26

 

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 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18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잠언을 시작하면서 첫 시간에 잠언의 목적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1:1~6). 잠언의 목적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여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과 연결되는 내용이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를 잠언에서 아주 광범위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결론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자의 모습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데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를 어리석은 자로 봐도 됩니다. 그러면 어리석은 자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는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어리석다는 말은 생각이나 행동이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기꾼의 말을 분별 못하여 속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어리석은 자도 그 안에 탐심이 있기에 사기꾼들의 교묘한 말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다는 말과 비슷한 말로서 어수룩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수룩하다는 말은 약지 않고 순진하고 넉넉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저도 남의 말을 잘 믿는 편입니다. 그러면 어리석은 것입니까? 어리숙한 것입니까? 사람은 늘 자기를 좋게 보려고 합니다. 어리석든지 어리숙하든지 남의 말을 잘 믿어서 손해를 본 경우도 몇 번이나 있습니다.

 

그러면 슬기로운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는다는 말씀과 대비하여 보면 슬기로운 자는 아무 말이나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분별할 줄 알기에 자신의 행동을 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속이려고 왔다가도 그 말을 분별하여 행동을 삼가면 물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갖 말을 다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어리석은 자들은 아무 말이나 믿어서 낭패를 당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일에 어리석어서 낭패를 당하면 이 세상의 일로 끝이 나지만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아무 말이나 믿게 되면 이것은 영원이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내용을 들을 때에도 아무 말이나 믿는 것이 아니라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 봐야합니다.

 

사도행전 17:11~12절입니다.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바울사도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설교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하여야 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납니다. 이 말씀을 15절의 슬기로운 자와 연결하여 보면 아무 말이나 다 믿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삼간다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다 믿기에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고 하면서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자는 그 말을 분별하기에 자기의 행위를 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서 악을 떠나는 것은 언제나 여호와 경외와 연결이 됩니다. 우리가 여러 설교를 들을 때에 그것이 나를 좋게 하는지 하나님을 좋게 하는 말씀인지 분별하여야 합니다. 나를 좋게 하는 말씀만 챙겨듣는다면 악을 떠날 수 없습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16절을 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아서 악을 피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자신 만만 해서 조심할 줄을 모른다.”공동번역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조심스레 악을 피하고 어리석은 자는 멋대로 날뛴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움을 알기에 악을 피하지만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는 자신 만만 해서 조심할 줄을 모르기에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 한글 개역은 방자(放恣)하여 스스로 믿는다고 합니다. 방자하다는 말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꼭 이러합니다. 내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유라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권위를 다 무너뜨리는 것을 자유라고 여깁니다. 성경의 말씀도 믿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 영원한 생명과 심판에 대한 말씀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성경을 사람들이 지어낸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온갖 세상의 철학으로 무장하여 자신 만만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풍조만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나옵니다. 복음을 지식으로 습득하여 자유 한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성경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지 생각도 안하는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 5:13~14절입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율법을 일부러 어기는 것을 복음의 자유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유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우리 육체의 기회로 삼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의 완성 태인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한 자라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16~17절입니다.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이 말씀의 의미를 알려면 베드로전서 전체를 다 봐야합니다. 서신서는 장과 절로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간략하게 보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율법의 행위로서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가지고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전하면 마치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게 한다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율법이나 세상의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자유인이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라면 심지어 노예라고 하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노예화를 고착시키는 말씀들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시키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를 가지고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자유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다 버려버리고 자기가 편하고 좋은 것만 취하여 복음의 자유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자기가 좋은 대로 스스로 믿는 것이 됩니다. 이런 모습이 어리석은 자의 모습입니다.

 

본문 17절을 봅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됩니다. 분노를 속하게 하는 자는 평정심을 읽어버리기에 어리석을 일을 행하게 됩니다. 앞뒤 순서를 바꾸면 어리석은 자는 속히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질과 성격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기 의가 가득하기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분노합니다. 또 다른 모습은 복음으로 자유 한다면서 막사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분노를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시하여 보라고 합니다. 그럴 때에 저는 받은 은혜대로 살라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라는 말입니다.

 

어떤 질문이 카톡으로 왔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하니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부활한 이후는 내 안에 성령이 계심을 믿고 어떤 일을 행할 때 내 생각인지 주님 생각인지 갈등하지 말고 100% 성령님이 행하신다고 믿고 의심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인지 주님 뜻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전에 제가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자기 부인으로 이끄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부인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의 인도가 어떤지 질문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이 없습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내 뜻인지 어떻게 구별합니까?

 

이런 답변을 했습니다. 넓고 크게 보면 죄와 사망의 법과 의와 생명의 두 법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죄와 사망의 왕 노릇하는 곳에서 해방되어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 있기에 권세의 개념으로 보면 백퍼센트 성령의 인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세개념과 묵시적 개념으로 보면 로마서 5장대로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하늘에 앉혀졌지만 역사적으로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갈등 속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의 갈등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갈등이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이런 갈등도 없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우리가 실제로 죽을 때 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성령의 소욕은 이런 우리 육체의 소욕 곧 우리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는 이런 우리를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히 분노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자기 법으로 가득 무장이 되어 있거나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기에 분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의 집단적인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반발합니다. 반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지 못하도록 가장 반발한 자들이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자 무엇이 죄 인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오래 참으심이 무엇인지 알기에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도 오래 참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성령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다시 17절을 봅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만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겉으로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만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속에서 요리조리 더 교묘하게 계획을 세우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겉으로 속히 분노하는 자나 교묘하게 악을 꾀하는 자나 간에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이겠습니까? 사람에게 받는 미움이야 그 사람이 죽거나 내가 죽으면 끝이 나지만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것은 죽어도 끝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서가 세상의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경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거룩한 말씀입니다.

 

시편 36:1~4절입니다. “1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2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4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인간의 죄악 된 모습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이 이러함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어리석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세상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였습니다(4:6).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율법을 주셨지만 그 율법의 뜻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면류관으로 삼는다는 말은 참된 지식이란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언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표현하자면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만 한다면 반쪽 지식입니다. 공경하는 것은 그 분이 하신 일을 알고 믿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자들입니다. 지식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런 지식을 바른 지식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호세아 6:1~7절입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하나님께서 원하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9:10~13절입니다.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호세아서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인용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율법지킴이나 율법의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의를 가진 자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죄인으로 취급을 받는 세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비난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받은 자라면 자신이 죄인 됨을 알기에 정말 주님 앞에 입을 가릴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몇 가지 복음의 지식을 안다고 그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합리화 시킨다면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49:6~13절입니다.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 그러나 그들의 속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13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이것이 어리석은 자의 종말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의 유업으로 삼은 것들이 결국은 섞어질 것들이며 생명을 속하지 못할 것들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재산을 자기 앞으로 등기등본으로 해 두어도 그것으로 생명을 속하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어리석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율법적인 의로 자기 의를 삼는 자도 어리석은 자들이지만 이 세상의 것을 의지하는 자도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고린도전서 3:16~20절입니다.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거룩한 영이 임한 자는 자기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임을 압니다. 이런 자들은 성전을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음행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행을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으로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음행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음행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고린도 교회 안에 세상 사람도 행하지 않는 음행이 있었기에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전자만 강조하게 되면 육체의 음행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게 됩니다. 후자만 강조하면 윤리도덕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만 말하고 육적인 것은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기에 자기 백성들을 거룩함으로 인도합니다. 거룩함이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전인을 말하는 것이지 영과 육을 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5:1~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1)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날마다 책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망을 통하여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3~14절입니다.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전에 어두움에 있던 일들이 빛 안에 들어와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빛 가운데서 책망을 받으면 그 책망 받음으로 노출되어지기에 이것이 빛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의 책망에 노출될수록 자신의 전존재가 어두움이었음이 들통 납니다. 이렇게 들통이 나서 완전히 자신이 어두움이었음을 아는 자는 주님의 빛이 비추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망이 싫어서 자기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이 기업이 됩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렇게 책망을 받아 드러나는 것만큼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이런 책망을 받지 않으려고 하지만 슬기로운 자는 이런 책망을 마땅히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 앞에서 전적인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 슬기로운 자들입니다. 자신의 율법적인 의로움이나 복음을 안다는 지식으로 자신을 합리화하지 마시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남으로 오직 그리스도로만 옷을 입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어떤 지식으로 자신을 존재 화 하여 고착화 해 나가면 그것이 우상숭배자이며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죽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