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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3:1~33 파수꾼 2012. 8. 29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3 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4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 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5 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6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에스겔 3:16~21절에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의 반복이지만 지금 다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에스겔이 파수꾼 역할을 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파수꾼이 되어 백성들을 경고하였습니다. 에스겔은 온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지를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이나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이나 간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늘본문 1~9절을 봅니다. 파수꾼의 역할이란 적이 오면 나팔을 불어서 경고하는 일입니다. 파수꾼이 적이 오는 것을 보고서 나팔을 불어 백성을 경고하는데 나팔소리를 듣고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의 죄악으로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았기에 적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죄악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지만 그 죄는 파수꾼의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에스겔을 하나님께서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역할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전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신의 죄악으로 죽을 것이지만 그 피를 선지자의 손에서 찾겠다고 합니다. 반대로 선지자가 악인에게 그 악에서 돌이키라고 전하였는데도 그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만 선지자는 그 생명을 보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파수꾼을 세워진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자기 생명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보다 거짓 선지자가 절대적으로 많았음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미가야 선지자 때에는 거짓 선지자가 400명이었고 참 선지자는 한명이었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는 850:1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수 속에서 안전을 찾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마 이 많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다 틀렸겠느냐며 거짓 선지자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거짓 선지자들의 선포는 그들이 평소에 좋아하는 희망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런 선지자들에 비하면 예레미야나 에스겔은 매국노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보기에는 거짓 선지자들은 참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그 심판의 말씀을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자조적인 말입니다. 에스겔 33:10절입니다.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에스겔의 하나님 말씀의 선포는 죄악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고발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로 그 가운데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겠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자조(自嘲)적입니다.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런 상태에서 회개하고 돌이킨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것입니다.

 

11~20절입니다. 11절을 봅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죄에 대한 책망을 받고서 과도한 절망과 자조적인 말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직 심판의 소식이 전해진다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심판의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돌이킬 기회마저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이 범죄 하면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며 악인이 돌이켜 떠나면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의인을 향하여 너는 살리라고 하셨는데 그 의인이 자신의 공의를 스스로 믿고서 죄악을 행하면 그의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고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인간의 자기 공적 쌓기가 됩니다. 그런 의를 스스로 믿고서 적당한 악을 행하는 자들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들의 머릿속 계산입니다. 그런데 악인에게 너는 죽으리라고 하였는데 그 악인이 회개하고 돌이켜 자신의 죄악에서 떠나면 그 범한 죄가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자들은 생명의 율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생명의 율례란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에는 복과 저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서 그 언약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임하지만 언약에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습니다. 그 생명의 율례를 이웃과의 관계에서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것을 저당잡고 돌려주지 아니한 것과 탈취한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것은 이러한 언약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17절을 봅니다. 주의 길이 바르지 않다고 합니다. 죄의 책망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포로로 잡혀온 것은 하나님의 과도한 심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와 허물에서 어떻게 살겠느냐는 말은 자조적인 말임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말이 들어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길이 바르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 되면 하나님 탓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틀린 것입니다.

 

21~22절을 봅니다. “봉독” 에스겔이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에스겔에게 와서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것이 B.C 586년의 일입니다. 그 도망한 자가 에스겔에게 왔을 때에 여호와께서 에스겔의 입을 여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한다고 전하였지만 도저히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입이 열려 말씀을 전합니다. 에스겔이 전한 심판의 말씀을 듣고서 첫 번째 반응이 과도한 절망과 자조적인 푸념으로 여호와가 잘못 되었다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잘못된 낙관적인 신념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반응입니다. 23~24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4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이 말은 예루살렘의 남아있는 자들의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받았는데 우리가 이렇게 많은데 이것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처럼 의로운 자라고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이들은 세상의 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사는 언약 백성의 모습이 아니라 이방인보다 더한 죄악의 모습들이었습니다.

 

25~29절입니다. “봉독” 언약에서 금하고 있는 것들을 행하면서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은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받았는데 자신들의 수가 많으니 더욱 이 땅을 차지하고 살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잘못된 신념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기에 에스겔을 통하여 이런 말씀으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을 칼과 들짐승과 전염병으로 죽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산들은 황폐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그 땅이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함으로 여호와인줄 알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황무지가 되어 70년 동안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과도한 낙관론에 빠져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행함으로 복을 받자는 이상한 교리들도 무장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들은 예수를 믿었기에 구원을 받아놓았다고 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이란 나를 죽이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구원인데 자신이 펄펄 살아서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를 이용하면서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들이 이렇습니다. 한국의 교회가 이렇게 많고 세계 최고의 교회들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교회당 건물의 크기와 사람의 수로 가늠하는 것이 신앙적인 잣대가 아닙니다.

 

오늘 오전에 서울에서 어느 집사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서울에서 아주 큰 교회에 다녔고 아주 열심히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말씀을 찾다가 저희 교회 홈페이지 까지 찾아와서는 에스겔서 말씀을 듣고서는 감사하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이 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니 기존에 알든 사람들이 이단에 빠졌다고 하더랍니다. 물론 본인도 얼마 전까지 이렇게 큰 교회와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있는 것으로 이 땅이 복을 받았고 또 앞으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니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 큰 교회를 나와 작은 교회당에 간다고 합니다.

 

심판의 말씀에 대한 반응의 세 번째는 쇼를 보는 자세입니다. 30~31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자들이 말씀을 듣는 자세가 어떻습니까?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 들어보자며 오기는 합니다. 백성이 여호와의 성회에 오는 것처럼 모양은 그렇게 와서 앉아서 에스겔의 말을 듣지만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듣는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이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좋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그 마음에 좋은 것은 과도한 헌금과 헌신의 부담감을 벗어버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까? 결국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따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32~33절입니다. “봉독” 여호와 하나님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들의 이익을 따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연예인이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수많은 매체들이 발달하였습니다. 전 세계의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얼마든지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채널에서 고정이 됩니까? 자신을 이롭게 하고 자신의 즐거움을 채워주는 채널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의 이 말씀을 늘 기억하여야 합니다. 도대체 지금 내가 예배당에 들락거리는 것이 쇼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닌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복음 잘 들었다. 이제 더 좋은 복음을 구경하러 가자! 어느 목사가 더 좋은 복음을 말하는지 들어보러 가자! 이런 모습으로 다니는 자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에 이렇게 반응하는 자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심판이 이루어졌을 때에 그들이 한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의 말씀이 되지만 자조적이며 잘못된 낙관론과 자기의 여흥을 위한 자들은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