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는 녹화와 녹음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에스겔 34:1~31 목자들과 한 목자 2012. 9. 5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5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6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조성기씨의 야훼의 밤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내용은 목자와 양의 관계로 조직의 관리가 되는 단체입니다. 본인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내용 중에 목자와 양의 관계가 많이 나옵니다. 양은 목자의 말을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어떤 사심이 없이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조직이 커지면 어느 단체이든지 조직 그 자체의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런 갈등들이 나오는 소설입니다. 이것은 비단 선교단체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덩치가 커지면 관리자가 나오기 마련이고 이들이 자의든 타의든 힘의 위계질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에 정말 참된 목자의 심정으로 양들을 돌보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조직 자체가 그 조직을 유지 확대 보존하려고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을 목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고대근동의 왕들을 목자로 부릅니다. 바벨론의 속담에서 ‘왕 없는 백성은 목자 없는 양과 같다’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목축을 하는 나라들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을 기르는 것은 양의 털과 젖과 고기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을 돌보지도 않고 이런 것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런 목자는 바른 목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자라면 우선 양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목자와 양을 말하는 것은 목축업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들과 제사장들과 성전의 종사자들은 목자로서 양인 백성들을 하나님의 법으로 잘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왕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백성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대로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목자 장이 되시고 왕은 목자의 장이 되신 하나님께서 임시로 맡겨둔 일입니다. 지난주일 다윗에 대하여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윗이 백성들을 잘 돌보면 선한 목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방인의 왕처럼 생각하여 자기 백성이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순간 간음과 살인을 하게 됩니다. 이방의 왕들은 그 백성들이 자기 소유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레미야 23:1~2절을 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에스겔을 통하여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란 목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멸하며 흩어지게 하기에 화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4:1~6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의 목자에 대한 책망입니다. 목자란 왕과 귀족들과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의 지도자라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자기만 먹이고 양을 먹이지 않습니다.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양떼들이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셔서 그 잃어버린 자들을 다 찾아오시겠다고 하십니다.

 

7~15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목자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다들 악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반복된 일입니다. 가끔 선한 목자인 왕이 나와서 잠시 양들을 잘 돌보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서 다시 양들을 돌보지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 목자들을 대적하여 그들의 손에서 자기 양떼를 찾으신다고 합니다. 흩어진 그들을 찾아서 치료하고 강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16~22절입니다. “봉독” 15절까지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16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런 목자들의 손에서 자기 양떼를 찾아오실 때에 양떼 사이에서도 심판을 하십니다. 백성의 지도자들만 못된 목자들이 된 것이 아니라 같은 양떼들 가운데서도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를 괴롭힌 것입니다. 그래서 양과 양 사이에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 심판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좋은 꼴을 먹고서 남은 꼴을 발로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양이 좋은 꼴을 먹고 좋은 물을 마셨으면 다른 양들이 먹도록 해야 하는데 자기만 먹고서는 남은 먹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런 양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들 중에서도 힘이 센 자들이 다른 약한 양들을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러하였기에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목자들을 폐하여 버리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목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 목자를 23절에서 다윗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죽었습니다. 다윗을 목자로 세우신다는 것은 목동인 다윗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 가장 목자다운 목자였습니다. 물론 단 한 사건인 간음과 살인으로 인하여 다윗도 온전한 목자가 될 수 없었음을 보여줍니다만 하나님께서 세우실 참된 목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목자가 세워지면 화평의 언약이 맺어지고 자연이 회복되며 평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23~31절입니다. “봉독”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이 그들 중에 왕이 된다고 합니다. 죽은 다윗이 어떻게 왕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 영원한 왕위를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신다는 사무엘하 7장의 그 언약의 성취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한 목자가 나타나면 악한 짐승들이 그 땅에 그치게 하며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평강이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로 인하여 산 사방에 복을 내리는데 그 복이 복된 소낙비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당하게 와야 농사가 잘 되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한 목자가 세워지면 복된 소낙비가 온다는 것은 생명의 풍성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의 풍성함을 그림처럼 밭에 열매가 맺히고 땅이 소산을 내며 그 땅에서 평안히 거할 것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멍에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줄 알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신실함을 통하여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한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목자와 양으로 말씀하신 것을 31절에서 양은 사람이며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합니다.

 

이러한 언약의 말씀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한 목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4백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언약하신 한 목자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한 목자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그 언약된 한 목자가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그 목자가 태어나신 곳이 짐승들의 먹이통인 구유였습니다. 이것도 우연히 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들은 짐승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짐승의 먹이통에 오셔서 짐승 같은 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선한 목자로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35~36절입니다.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한 목자로서 잃어버린 양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전도란 이런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6절입니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여 다시 말씀합니다.

 

7~18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양이 생명을 얻는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은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먼저 온 자들이란 율법의 의로 자기들의 의를 세운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의에 이르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의 의로 볼 때에 저주 받은 자로 보이는 그들을 불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참 목자가 누구신지를 알고 그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알고 양은 자기 목자를 아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아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16절을 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누구겠습니까? 이방인들입니다. 이들도 인도하여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한 목자임을 믿게 되는 자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목자의 희생으로 살아났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새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의 목자는 어떤 자세여야 합니까? 베드로전서 5:1~4절입니다.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장로들 곧 목자들에게 목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목양을 하는 것이 마땅하며 이렇게 할 때에 목자장이 나타나시면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이 영광의 관이 머리에 쓰는 관이 아니라 그 목자장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목자장이 나타나는 모습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7:13~17절입니다.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십니다. 자기 양들에게 그의 살과 피를 주시고 그의 영을 주셔서 지금도 친히 인도하십니다. 아버지가 예수 안에 예수가 아버지 안에 계시는 그 방식으로 오늘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목자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