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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4:1~9 지혜를 얻으라 2017. 1. 25

 

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3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4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조문도(朝聞道) 석사가의(夕死可矣)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가 한 말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하여 왕숙이라는 사람의 해석은 아침에 온 세상에 도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라는 공자의 탄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공자는 도를 알았다는 뜻이며 이러한 도가 온 세상에 행하여진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는 공자도 참된 길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 길을 알았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십자가의 도를 안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도가 온 세상에 증거 되고 믿어진다면 정말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는 자들이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그 사람의 삶의 방향성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의 방향성은 그의 생각과 말과 삶의 태도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당분간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몇 년을 지나고 몇 십 년을 지나면서 보면 그 사람의 삶의 방향성과 목표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영원한 것인지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것인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지 사람의 욕망인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지 이 세상이 불에 탈 때에 없어질 복인지, 죽음에도 상관없는 내용인지 죽어버리면 끝나는 것인지, 이런 구별들을 해야 하는 이유는 지난주에 본 대로 대조와 대비를 통하여 성경에서 지혜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본문 1절을 봅니다. 지금까지 지혜 자는 내 아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들들이라고 부릅니다. 단수가 아닌 복수로 부릅니다. 잠언 전체에서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23회가 나오는데 아들들이라고 복수로 부르는 것은 오늘 본문 1절을 포함하여 4회 나옵니다(5:7, 7:24, 8:32). 그러므로 잠언서는 지혜 자가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자들이 다 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지혜 자가 전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아들처럼 들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지혜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도 되지만 지혜의 아들들만이 이런 지혜의 말을 듣게 된다는 것도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라는 것은 지혜의 아들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도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야 위의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3:1). 그러므로 성경은 성도에게만 읽혀지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아비의 훈계와 명철은 선한 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아버지에게서 선한 도리가 나옵니까? 예수님께 사람들이 선한 선생이라고 불렀을 때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10:18). 예수님 자신이 선한 분이 아니라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너희가 선한다고 부르는 의미를 알고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선한 도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잠언서의 전달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세상의 처세술을 자신의 경험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기에 선한 도리라고 하면서 내 법을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율법의 선생역할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아버지입니다.

 

히브리서 12:5~11절입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이미 앞에서도 본 말씀이지만 다시 보는 이유는 아들들에게 권면하면서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받아들이시는 아들은 다 징계하신다고 합니다. 세상의 아버지가 징계를 하여도 받아들이거늘 모든 영의 아버지께서 징계하시는 것은 더욱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 아버지의 징계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징계를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를 징계할 때에 나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였습니다. 우리의 뜻이란 자기 이름의 영광이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세상의 영광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시는데 그 징계의 목적은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분리의 개념입니다. 우리에게 섞여있는 것들을 징계하심으로 분리하여 거룩하심에 참여하시게 하시는 결과는 의와 평강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솔로몬 자신도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어머니의 유약한 외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솔로몬의 지혜도 자기 스스로 깨우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도 하셨지만 솔로몬 자신의 특별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선생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전하는 내용이 마치 자기에게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계시를 받아서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다 나온 내용들입니다. 물론 성경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의 조명으로 말씀의 뜻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조명을 받았다고 해도 자기만이 아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성경해석의 역사를 보면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특별하고 신기한 것 좋아하지 마시고 이미 기록된 이 말씀들을 부지런히 상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4절입니다. 내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자기 뜻대로 전하고자 하는 가문의 전통이나 성공의 비결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것을 지키면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이 말씀을 지키고 얻으면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율법의 조문이 아닙니다. 율법의 조문을 다 지켜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은 있지만 그 율법의 조문을 스스로 지켜서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라고 하는 말씀은 율법의 뜻과 의미까지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지혜를 얻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은 지혜가 곧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아들들만이 지혜를 얻으라는 말씀에 아멘하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고 합니다. 지혜와 명철을 평행구절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혜(智慧)와 명철(明哲)은 우리가 연구하여 스스로 깨우치는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같은 단어라도 세상에서 통용되는 지혜와 명철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잘 압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자녀들이 공부 좀 한다고 하면 판검사가 되라는 말을 했습니다. 판검사가 되면 신분상승도 되고 부와 권력을 가진 자가 된다는 의미로 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명철과 지혜를 얻으라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명철을 얻으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생존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생명 없으면 그것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6절입니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지혜가 너를 보호하리라고 합니다. 지혜가 우리를 어디에서 보호하는지는 앞으로 계속 나옵니다. 지혜가 없으면 스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5:5). 그러므로 지혜를 얻고 버리지 않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지혜는 히브리어로 여성형명사입니다. 마치 연인을 사랑하듯이 지혜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군에 가면 개인 병기를 나누어주면서 애인처럼 다루라고 합니다. 총을 잘 다루어야 전쟁에서 적을 물리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교관들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도 인격화 하여 사랑하는 연인처럼 사랑하면 그 지혜가 너를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7절입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합니다.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으라고 합니다. 지혜와 명철을 얻는 것이 제일이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모든 것을 다 투자하여도 그것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제일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시간과 물질을 바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는 그 사람이 무엇에 가장 많은 시간과 물질을 소비하고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지혜가 으뜸이니, 지혜를 얻어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명철을 얻어라.”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편 42:1~5절입니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마스길이란 교훈이라는 말입니다. 잠언과 같은 뜻입니다. 고라자손은 레위지파로 찬양을 맡은 족속입니다. 이들이 성전에서 찬송을 하는 자들인데 어떤 사정인지 찬송을 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하였든지 성전이 파괴가 되었는지 아니면 심각한 질병이 들었는지 자신이 함께 찬송하러 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갈급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다고 합니다. 찬양하고 경배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이 상하고 불안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영혼에게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갈급함이 우리에게 있기는 합니까?

 

마태복음 13:44~46절입니다.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잠언 4:7절에서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으라는 말씀의 해석을 하는 중입니다.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마태복음 강해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신 비유로 보았습니다. 자신의 소유란 자신의 생명조차 버림으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자들을 찾아내는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께서 찾아내신 자들 또한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모든 소유보다 지혜이신 예수님이 더 귀하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려서라도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를 다 잃어버리게 하셔서라도 지혜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나의 최고의 소유라고 여긴 부나, 가족이나, 자존심이나, 건강이라는 것이 지혜를 찾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이런 것을 제거해서라도 지혜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의 그 어떤 것보다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라고 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4:25~33절입니다.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따라나선 것입니까? 인간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외연을 넓혀가면서 사랑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것만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계산을 잘 해보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망대 세우는 비유와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33절의 말씀처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잠언 4:7절의 해석입니다.

 

본문 8~9절입니다. 그를 높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버려서라도 지혜를 얻었다면 당연히 지혜를 높일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보다 귀한 것이 지혜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지혜를 높이는 자는 지혜가 그 사람을 높일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아직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다고 조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품으면 그 지혜가 너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높아짐과 영화롭게 되는 것은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만약에 지혜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다 버린 사람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보다 높아지고 영화롭게 된다면 지혜를 얻기 위하여 누구든지 자신의 소유를 다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혜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준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을 듣기도 하겠지만 반대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고린도후서 6:1~13절입니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1)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2)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3절을 보면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이 한다고 합니다. 잠언에서 내 아들아, 아들들아 라고 말하듯이 바울사도가 자녀에게 말하듯이 한다고 합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은혜와 구원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 복음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으려고 많이 견디고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평가가 나왔습니까?

 

딱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바울의 일행들의 모습이 영광과 아름다움과 참됨과 유명함과 살아 있는 자와 항상 기뻐하는 자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은 바울의 일행의 모습이 욕됨과 악한 이름과 속이는 자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무명한 자로 보았고 징계를 받는 모습으로 보였고 근심하고 가난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눈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를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이렇게 선명하게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지혜를 얻은 자들 곧 복음을 얻은 자들에게만 복음 전하는 자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자녀들만이 지혜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며 이런 자들은 지혜가 영화로운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별로 알아주는 자들이 없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아주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번영의 신학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이 역사의 끝이 옵니다. 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에서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였던 지혜를 구하고 생명을 구하며 자신의 소유를 다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 그들이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1:1~18절입니다.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잠언서의 지혜를 얻으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사도와 야고보의 서신까지 연결하여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자들이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혜의 자녀들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과 야고보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보는 시각과 전혀 다릅니다. 흩어진 성도들 나그네 된 성도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은 반드시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시험과 유혹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혹하지 않습니다. 시험은 훈련입니다. 그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인내하고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일을 당하면 지혜가 없습니다. 혼돈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런 지혜를 구하는 자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그런 시험들을 참고 견디어 낸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다고 합니다. 면류관이라고 해서 머리에 쓰는 관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면류관입니다. 생명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광스러운 면류관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 지혜로 충만해 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충만해져서 이웃에게도 흘려보내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