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6:1~8 피난하라 2013. 7. 17

 

1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2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4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5 일어나라 우리가 밤에 올라가서 그 요새들을 헐자 하도다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책을 만들라 이는 벌 받을 성이라 그 중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 7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 8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

 

연일 폭염과 열대야로 피서(避暑)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작은 한반도가 남부지역은 폭염(暴炎)을 피해야 하고 중부지역은 홍수(洪水)를 피해야 하고 북쪽은 아사(餓死)를 피해야 하는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인들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에서는 예루살렘에서 피난하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성벽으로 된 성읍이며 왕궁이 있고 성전이 있으며 제사장과 선지자와 율법과 제사가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고 이곳으로 피난하여 들어왔는데 오히려 이곳에서 피난하라고 합니다.

 

1절을 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제일 중요한 단어를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6장을 시작하는 제일 처음 단어가 ‘우즈‘라는 단어로 도망하다. 도피하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출애굽기의 우박 재앙에서는 가축과 들에 있는 것을 모으라는 말로도 사용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베냐민 자손들에게 피난하라고 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질 때에 북쪽으로 10지파로 갈라지고 남 유다와 함께 한 지파는 베냐민 지파뿐입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 유다와 베냐민만 남았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적의 침략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피하여 들어와 있는데 이 예루살렘으로부터 피난하라고 합니다. 드고아 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고 합니다. 이것은 피난민들을 소집하여 깃발을 따라 피난행렬을 이루어 나가게 합니다. 피난하여 가는 지역은 예루살렘의 남쪽입니다. 바벨론이 북쪽에서 공격하여 오기에 남쪽으로 피난가라는 말이 되지만 예루살렘의 남쪽으로 내려가면 광야로 가게 됩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에 접합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의 멸망 앞에서 광야로 피난가게 합니다.

 

2절입니다. 피난해야 하는 이유는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멸절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멸절하는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내가 멸절하리니 피난하라고 합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이 되도록 여호와께서 그렇게 꾸미고 단장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주신 것으로 그들은 온갖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번성할수록 더욱 범죄 하였습니다(호4:7). 꺼림을 받아 태어나면서부터 씻기지도 않고 보자기에 싸지도 않은 채 버려진 계집아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공주로 신부로 치장하여 놓았더니 그것으로 오히려 음행을 한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겔16장). 이러함으로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3~5절입니다. 바벨론이 공격하여 오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하여 정오에 올라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벌써 날이 기울어 저녁이 되자 아깝다고 합니다. 전쟁은 밤에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공격하고자 하는 열의가 얼마나 대단한지 밤에 올라가 그 요새를 헐자고 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악이 얼마나 가득한지 그 악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이 바벨론 군대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벨론 군대들에게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책을 만들라고 합니다. 성벽을 공격하기 위하여 성 밖에 나무로 성벽의 높이만큼 쌓아올려서 공격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나무들은 벌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전쟁을 할 때에 성읍 주변의 나무들을 찍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읍주변에는 주로 과일나무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목이 아닌 나무들은 찍어서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구별도 없이 나무를 찍어서 예루살렘 성벽을 향하여 공격하도록 합니다. 여호와의 분노가 어떠한지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분노하시는 이유는 그 예루살렘 성읍이 오직 포학한 것뿐이라고 합니다. 포학 한 것이란 지난주에 본 5:26~2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흘러야 할 예루살렘 안에 포학이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  백성은 이런 것을 좋아하기에 그 결국에는 심판을 받습니다.

 

7절입니다.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샘의 특징은 물이 솟아나옵니다. 샘은 물을 저장하는 웅덩이가 아니라 물이 계속하여 솟아나기에 물이 항상 넘쳐납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의 죄가 샘과 같이 죄가 그렇게 쉬지 않고 솟아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죄악들이란 폭력과 탈취가 나오고 그로 인하여 질병과 살상이 여호와 앞에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또한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신종 바리새인들입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인간의 죄가 이러함을 보여주면서 이방인도 똑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끊임없이 솟아는 샘처럼 인간의 죄가 이렇게 솟아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이러한 죄를 책망하고 지적하시는 이유는 훈계를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귀가 할례를 받지 않고 마음이 할례를 받지 않아서 훈계를 받지 않습니다. 여기서 훈계를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훈계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욕으로 여겼습니다.

 

10절을 봅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어떻게 돌이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심판 앞에 여호와께서 피난하라고 합니다. 도대체 어디로 피난해야 합니까?

 

시편 12:5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고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뜁니다. 경건하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집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이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신다고 합니다. 그 안전 지대에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신다고 합니다. 그 안전지대가 어디일까요?

 

시편 62:7~8절을 봅니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 다니며 지은 시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여호와만 잠잠히 바라본다고 합니다. 여호와만이 자신의 반석이며 구원이시며 요새시며 피난처라고 합니다. 사람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와 같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지 않는 인생들을 보면서 슬프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께 피하지 않는 인생은 입김이며 그 인생도 속임수라서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볍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 우리들이나 간에 무엇을 피난처로 삼고 살아갑니까?

 

히브리서 6:17~20절입니다.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우리의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느 곳도 우리의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행위가 나를 숨겨줄 수 가 없습니다. 내가 만든 나의 안전한 피난처라고 여긴 것이 내가 피할 곳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뉴스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숨겨놓은 재산 찾아낸다고 야단입니다. 그가 수천억을 받아 숨겨놓은 것이 그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온 세상에 그의 가족들까지 참으로 치욕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한 행위들이 마치 자기의 피난처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조차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수단이 된 시대입니다. 함께 죽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조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어마 어마한 규모가 건물들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피난처가 된다고 여기기에 세습도 하고 불법도 행하면서 지켜 나가려고 합니다. 피난처가 아니라 바벨탑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이런 곳에서 정말 피난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8:4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인 로마는 멸망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멸망했습니다. 오늘날 바벨론 화 되지 않은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들마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한 외형적인 모습이 없는 곳에서는 자기들만의 성경해석과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에 자기들만이 피난처라고 합니다. 때로는 아주 금욕적이거나 아니면 신비주의로 가거나 간에 자기들만이 피난처가 된다는 곳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주께로 피한 자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시편 11:1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다윗이 여호와께 피하여 있는데도 사람들이 다윗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다윗은 아무른 도움과 피난처가 없어 보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피난처를 찾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아무른 피난처가 없어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아갑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소망한 그 피난처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영원한 안전지대 영원한 피난처를 찾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썩어질 정욕을 피하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순례자로 살아갑니다(벧후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