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6:9~15 할례 받지 못한 귀 2013. 7. 24

 

9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를 따듯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12 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도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유들을 보았습니다. 지난주에 본 6:6~8절에서 벌 받아 마땅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중에 오직 포학한 것뿐이며 그 악이 마치 샘이 물을 솟구쳐냄 같이 끊임없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탈취와 질병과 살상이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훈계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마음이 예루살렘을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든다고 하십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이 결국 듣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은 언약궤와 결부되어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는 상황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과 모든 하늘의 천사들을 주관하시는 절대적인 주권과 권능의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싸우시려고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군대를 호출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은 언약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9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농부가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다 따내듯이, 적군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샅샅이 뒤져서 끌어 갈 것이다. 그러니 예레미야야,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포도 따는 사람이 포도덩굴을 들추어보는 것처럼,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개역개정보다 문장의 구분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데 적군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샅샅이 뒤져서 끌어가는 것이 마치 농부가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따듯이 그렇게 잡아 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를 수확할 때는 샅샅이 뒤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신명기 24:21~22절입니다.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가 곡식을 거둘 때에 땅에 떨어진 곡식을 줍지 말게 하시고, 올리브도 한번 턴 후에 다시 살펴보지 않게 하시고, 포도 수확도 그 남은 것을 찾으려고 샅샅이 뒤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은 간데없고 이스라엘 전체가 다 탐심이 가득하였습니다. 단지 농산물의 수확에서만 탐심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백성 전체가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하여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그것을 좋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지막에 어찌하겠느냐는 탄식의 소리를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이기에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벌로 인하여 적들이 쳐들어와서 포도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샅샅이 다 따 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전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원의 소식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심판을 예고하는 이유는 그 중에 회개하는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소식이 들리는 중에는 아직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소식도 전하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심판입니다. 심판의 소식에서 구원의 소식이 함께 있다는 말씀이 바로 9절입니다. 9절의 앞부분은 적들이 쳐들어와서 포도를 샅샅이 거두어들이듯이 포로로 잡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9절의 후반부는 예레미야에게 적들이 남은 자를 다 잡아가기 전에 포도 넝쿨을 들추어보듯이 한 사람이라도 남은 자를 구하여 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소식에도 항상 구원의 소식이 담겨 있습니다.

 

10절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탄식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서 심판을 선포하여도 그 심판의 소식에 반응을 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심판의 소식을 욕으로 듣고 수치스럽게 듣고 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롯의 사위들이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 위로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임하고 있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쾌락이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읍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욕으로 여기고 즐겨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욕으로 들린다면 이는 소돔과 고모라 성 보다 더한 타락입니다. 이것은 귀가 할례를 받지 않아서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귀만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할례란 아브라함의 언약을 확정하는 몸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태어난 지 8일만에 다 할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할례가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일에 얼마나 방해가 되었는지 신약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구약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0:16, 30:6절에서 이미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9:26절에서는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이방인들이나 간에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몸의 할례는 아무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습니다.

 

11~12절입니다. 여호와의 분노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가득합니다. 여호와의 파토스에 선지자도 감정이입이 된 것입니다. 그 분노가 가득하여 참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판을 선언합니다. 새 번역으로 봅니다. “11 그들을 향하신 주님의 진노가 제 속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제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나의 분노를 길거리의 아이들에게 쏟아라. 젊은이들이 모인 곳에다가 쏟아라. 결혼한 남자들과 결혼한 여자들이 잡혀 갈 것이다. 장년은 잡혀 가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도 잡혀 갈 것이다. 12 그들의 집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어가고, 밭과 아내들도 다 함께 다른 사람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내가 손을 들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칠 것이기 때문이다. 나 주의 말이다."

 

여호와의 심판 선언입니다. 이러한 심판은 언약을 배반하면 이러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언약의 저주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저주를 이미 율법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신명기 28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임하리라는 말씀 속에 아주 구체적으로 다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여기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잡힐 것이며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심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에서 배운 몇 가지를 잘 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생각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3~15절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임하는 이유를 한 번 더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심판을 받는 이유는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립니다. 백성이 이러하다면 선지자와 제사장이 책망하고 바로 잡아야 하는데 선지자와 제사장마저 다 거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백성들의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책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이 바치는 뇌물과 복채에 눈이 멀어서 죄를 책망하기는커녕 평강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평강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기에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어 그 삶의 환경마저 평안한 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평강하다고 하지만 평강이 없습니다. 이들의 거짓 평안으로 인하여 백성들이나 지도자들이나 가증한 일들을 할 때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을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하지요! 얼굴 가죽이 두꺼워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거짓된 평강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나 지도자나 모두가 탐욕에 사로잡혀 있기에 주님의 책망과 심판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 자들이 언제 열리게 됩니까?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께 질문한 내용과 그 답변을 보면 이스라엘의 십분의 일이 남았을지라도 그마저 심판을 당하고 나서 거룩한 그루터기로 일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거룩한 그루터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는 자들이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힌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복음서와 요한 계시록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알아듣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어떻게 하면 죽일까를 의논하고 결국 죽였습니다.

 

사도행전 7:51~53절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 집사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괴로워서 귀를 막고 스데반을 향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나 사도들과 같은 사람은 어떻게 귀가 열려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성령이 임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복음을 받는 자들은 자신들이 예수 죽인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귀에 할례를 받은 자이며 성령이 임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귀가 할례를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분명합니다. 자기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합니다. 이것은 불교처럼 자기금욕적인 모습으로 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어 나를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주께서 차압해 가 버린 인생입니다. 오늘날처럼 주체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시대에 이런 말씀이 여러분에게 기쁘게 들립니까? 욕으로 들립니까?

 

고린도후서 5:14~15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기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사는 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 말씀이 기쁨으로 들리면 귀가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통하여 그러면 나는 뭐냐?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나의 모습을 만들기 위한 나의 노력들이 허사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이 욕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열심히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살 것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나는 죽었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않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자들이 꼭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또다시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해 줄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입니다.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오늘 우리의 스승은 어떤 스승입니까? 자기의 사욕을 채워준다는 스승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를 따르게 하는 스승입니까? 자기의 사욕을 채워준다는 자들의 말이 달콤하게 들리면 이들은 아직 귀가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스승들은 탐심으로 지어낸 말을 가지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이익의 재료로 삼습니다(벧후2:3). 그들이 자유를 준다고 하여도 결국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벧후 2:19).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엄중하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1~2절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얼마나 엄한 명령입니까?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또한 그가 재림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기를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5~8절입니다.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성령이 임함으로 귀가 할례를 받게 되면 복음을 듣고서 자기 죄를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들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워준다는 거짓 선생들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그 사욕이란 세상의 복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들도 사욕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군대나 회사에서 충성경쟁을 하듯이 교회에서도 자기의 가치를 높이도록 하는 말을 쫓아가는 것이 사욕을 쫓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귀가 할례를 받게 되면 그 말이 어떤 말인지 분별이 됩니다. 종교와 복음이 구별이 됩니다. 이렇게 귀가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