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6:16~30 땅이여 들으라 2013. 8. 7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17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18 그러므로 너희 나라들아 들으라 무리들아 그들이 당할 일을 알라 19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20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2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두리니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이웃과 그의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30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렸음이라

 

오늘 말씀을 보다가 어미의 말을 반대로만 하는 청개구리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산으로 가라고 하면 강으로 가고.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합니다. 어느 날 어미 청개구리가 병이 들어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자기의 무덤을 강가에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산에 무덤을 만들 줄 알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미가 죽는 것을 보고서 정신을 차린 청개구리가 엄마의 말대로 강가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엄마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개골개골 울어 된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보았습니다. 이러한 청개구리의 모습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로만 행하는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또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6: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길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역사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그런 길로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순종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잠시 잠간이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따랐던 적이 있습니다.

 

2:2절입니다. 청년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따른 것을 말씀합니다. 광야 40년 동안 10번이나 거역하였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광야이기에 어쩔 수 없이 구름 기둥 불기중의 인도를 받아 갈 수 밖에 없었든 그 길이었습니다. 마지못하여 따라간 그 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는 길이 희박한 자들입니다. 여호와를 따르는 길만이 심령이 평강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길로 가지 않겠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4~5절입니다.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어디서 처음 사랑이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네 촛대를 옮긴다고 하십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향한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옛적 선한 길이 어떤 것인지 알고 그 길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나 에베소 교회나 제대로 돌이키지 못하였기에 둘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른 길로 가는 것이 마음의 평강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초청에 유대인들은 오히려 배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참된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오직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만 됩니다. 바울사도도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엡1:17~19).

 

오늘 우리가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우리의 소원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보다는 나의 이익 된 길을 본능적으로 선호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길이란 좁은 문 좁은 길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가 임하여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아닙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가 임한 자라면 우리 마음에도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위하여 소원을 주십니다. 그런 자들만이 주님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가지 않겠다고 할 자들입니다.

 

예레미야 6:17~18절입니다. 선한 길로 가라고 하실 때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다고 합니다. 파수꾼의 나팔소리를 들으라고 합니다. 파수꾼들을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나팔을 붑니다. 이 나팔소리를 듣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이 듣지 않겠다고 합니다. 청개구리처럼 반대로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나라들아 들으라고 합니다. 너희 무리들아 그들이 당할 일을 알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길로 가지 않겠다고 하고 경고의 나팔소리도 듣지 않겠다는 그들이 당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6:19절입니다. 땅이여 들으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생각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들의 생각의 결과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거절하였습니다. 선한 길로 가라는 말씀에 가지 않겠다고 하고 경고의 나팔소리를 들으라고 하는데 듣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행하십니다. 이 심판을 행하시는 일에 땅이여 들으라고 합니다. 땅이여 들으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실 때에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4:26절과 신명기 30:19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맺으실 때에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이 두 곳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복을 주시지만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면 심판을 받고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당합니다. 이 심판을 당하는 일에 증인을 부르는 것이 땅이여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심판 속에 다시 소망이 있는 것이 신명기 4장의 본문에 들어있습니다. 비록 포로로 잡혀갈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인하여 돌이켜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1:2절에서도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짐승들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고발에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6:20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는 않으면서도 종교적인 제의는 부지런히 행하고 있습니다. 시바에서 유향을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고 합니다. 유향과 향품이란 여호와의 성전에서 분향하는 것과 성전의 기구와 제사장에게 바르는 기름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아주 먼 나라에서 수입까지 합니다. 그리고 번제도 부지런히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을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聽從)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고 제의는 부지런히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분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은 늘 관심을 그 분에게 두어야 합니다. 무시로 그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의는 그 형식만 취하면 됩니다. 제사와 분향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기에 이것만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소를 잡아 바치고 향품을 수입하여서 분향한 것입니다. 이것이 더 분명해 보이고 확실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속에서도 상대방의 뜻을 헤아리는 길은 참 어렵습니다. 몇 십 년을 함께 살아도 아내나 자녀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내 딴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전혀 아닌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니 차라리 법으로 정하여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이 할 일, 아내가 할 일, 자녀가 할 일을 법으로 정하여 놓으면 그것만 하면 나의 의무를 다하였다는 것이 되기에 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법으로 정하여진 딱딱한 권리와 의무만 남게 됩니다. 정말 좋은 관계라면 그런 법과 상관없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행하는 것보다 법적인 의무만 이행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여깁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이와 같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입니다.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간곳없고 법적인 의무만 행하고서 자기들은 할 일을 다 했다고 합니다. 물론 법적인 의무도 제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 편리한 대로 하고서는 다 했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이 땅의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중요한 법들이 있습니다. 지금 합동 교단에서 교회 헌법을 대폭 수정한다고 논의 중인데 그 수정 조항들 중에 교인의 의무가 더 강화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의도입니다. 법으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심판을 당하는지 보면서도 이렇게 나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법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인들이 너무 똑똑해서 목사들이 힘든 모양입니다. 교인의 의무는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옳고 그럼만 따지니 아예 교인의 의무를 강화하여 다른 소리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길로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6:21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 장애물을 둔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종교적인 의식만 행하면서 그들의 할 일을 다 했다고 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장애물이 바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이웃과 그의 친구가 함께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6:22~26절입니다.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 온다고 합니다. 바벨론이 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사랑이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처럼 포효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 한다고 합니다. 그 소문으로 인하여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에 사로잡혔는데 그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밭에도 길에도 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며 독자를 잃음같이 슬퍼하며 통곡하라고 합니다. 멸망시킬 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도 재에 구르며 슬퍼하며 통곡하는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내어버린 은이 되었습니다.

 

6:27~30절입니다. 예레미야를 백성중의 망대와 요새로 삼아 다 살펴보게 합니다. 살펴본 결과 그들은 다 심히 패역한 자며 비방하는 자며 그들이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의식으로 인하여 자기들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멉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와 분향으로 자기들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모습은 세상의 우상을 섬기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은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연단하기 위한 심판입니다. 마치 풀무에서 은을 연단하는 것처럼 연단하였습니다. 좋은 은을 얻기 위하여 불순물이 섞인 광석을 용광로에 집어넣고 납과 함께 풀무불로 녹입니다. 그러면 찌꺼기는 납과 함께 밑으로 가라앉고 은이 위로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은은 얼마나 질이 좋지 않은지 제대로 분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단련이 되지 않기에 내어버린 은이 된 것입니다. 마치 소금이 맛을 잃으면 내어버려 길에 밟히는 것과 같이 내어버려진 은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 영원히 멸망하는 것으로 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될 수가 없기에 고난의 풀무를 통과하게 하여 자기 백성들을 연단하십니다.

 

이사야 48:1~11절입니다. “1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2 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 3 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4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5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6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7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8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풀무 불로 시련하였노라 11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진실과 공의가 없습니다. 완고하여 목은 쇠의 힘줄이며 이마는 놋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망대와 요새가 되어 예루살렘을 살펴본 모습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간에 그들은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자기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하여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멸절하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은처럼 하지 않고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다고 합니다. 은처럼 연단하면 제대로 연단이 되지 않을 때에 예레미야서의 말씀대로 내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처럼 하지 않고 고난의 풀무로 시련하여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내십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자기의 이름으로 언약하신 바를 이루어내셔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이라는 고난의 풀무를 통과하는 것이 정상임을 아시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다 동원하여서라도 자기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이 하나님의 열심에 항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