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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8:4~17 서기관의 거짓된 붓 2013. 9. 4

 

4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6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8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1)거짓되게 하였나니 (법을 거짓되게) 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제가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 보는 성경에는 이 단락의 소제목을 ‘죄와 벌’이라고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된 성경의 소제목은 ‘눈먼 백성과 엉터리 지도자들’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소제목들은 그 한 단락의 내용을 간단하게 가늠해 볼 수 있는 유용성도 있지만 때론 본문을 가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죄와 벌’이라고 하면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선입견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정작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죄가 무엇인지 가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13절을 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제 외울 정도가 되었지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를 버린 것이 근원적이 죄가 됩니다. 이것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원적인 죄이기에 이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살아가려고 터진 웅덩이들을 만들어가며 사는 세상이 지옥입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주일 오전설교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율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어약은 일방적은 은혜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430년 뒤에 모세 언약이 나온 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율법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인간이 죄에 갇혔음을 깨닫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을 받고서는 그 율법을 통하여 자기 의를 챙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율법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셨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율법을 가지고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인데 오히려 율법을 가지고 자기들도 바로 가지 못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과 율법을 모르는 자들을 무시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구약을 통하여 다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언약을 예언하였습니다. 그 새 언약이란 모든 언약들을 완성하심으로 이루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의 효력을 성령을 통하여 받은 자들은 모세언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증거 한 것처럼 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지를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언약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시대를 살면서 아직도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으면 구약을 복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율법으로 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1~18절을 봅니다. “봉독” 새 언약의 일꾼이 된 사도가 무엇을 전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율법 조문은 죽이는 직분입니다. 그런데 그 직분도 영광이 있어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왔을 때에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그 얼굴을 주목하여 바라보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건으로 가린 것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율법의 직분이 사라질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이 완고한 자들은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수건이 가려진 채로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 아래로 인도합니다.

 

제가 월요일 날 차를 타고 가면서 어느 목사의 설교 결론부분을 들었습니다. 짐작하건데 그 본문은 다윗이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릴 때의 내용으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값없이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계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번제를 드린 배경을 설고 앞부분에서 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만 그 목사의 설교는 값없이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십일조와 감사와 주일헌금을 잘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주일헌금도 구체적인 금액의 예를 들어가면서 그렇게 값없이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죄수가 총리가 되고 포로로 잡혀간 여인이 황후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자 교인들이 아멘하고 설교가 마쳤습니다.

 

제가 길게 예를 들었습니다만 창원에서 제일 큰 예배당에서 나온 설교입니다. 제가 차에서 극동방송이나 기독교방송을 통하여 가끔 들어봅니다만 들을 때 마다 이런 식의 설교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말씀을 깊이 보고 묵상하여 설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목사의 눈에는 교인들이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교인들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설교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값없이 예배를 드렸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예배에 완벽하게 성공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엇으로 설명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의 고난과 죽음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런 의문이 일어나지도 않는 것은 다른 목사들도 그렇게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하고 그런 설교에 아멘 하는 것은 아직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결론부분은 거의 언제나 예배에 성공하여 인생에 성공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예배 성공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한 결론이 십일조와 감사와 주일헌금의 강조였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마치게 된다면 그 설교를 들은 사람은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께로 멀어질 뿐입니다. 이것이 의문에 속한 직분이며 정죄의 직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일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이제 본문 예레미야 8:4~6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이 넘어지면 넘어진 채고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일이 있어서 집을 떠나갔으면 돌아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것을 수사의문문으로 말씀하신 것은 당연히 넘어진 자는 일어서고 떠난 나는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백성은 항상 하나님을 떠나 물러가고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합니다. 이렇게 하는 자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들은 정직을 말하지 않고 그들의 악을 뉘우치지 않고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서 뉘우치는 말을 하는 자도 없이 마치 전쟁터로 달려가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한다고 합니다.

 

7절입니다. 공중의 학과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는 지킨다고 합니다. 창원에 있는 주남저수지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합니다. 겨울에 가보면 그 수많은 철새들의 군무가 장관입니다. 그 수많은 철새들이 얼마나 먼 거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오는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런 새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에 사람들은 주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사야 1:2~4절입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예레미야서아와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새들과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경북의 어느 목사들의 모임에서 개를 잡아먹기 위하여 집에서 기르던 개를 끌고 강가로 갔다고 합니다. 개를 삶기 위하여 솥과 다른 것들도 다 준비하여 갔다고 합니다. 드디어 개를 잡기 위하여 몽둥이로 내려쳤는데 그만 빗맞아 개가 도망을 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에 집에 들어 가보니 그 개가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도 주인이 왔다고 꼬리를 흔들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개를 다시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예화로 쓴다고 하니 어느 모임인지 말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개를 잡기 위하여 몽둥이로 때려서 피가 나서 도망갔지만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온 개 이야기를 왜 하겠습니까?

 

예레미야 2:4~8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잘못 한 것이 있다고 이렇게 물러갔느냐는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를 통과시켜 약속의 땅에 들여놓고 그 아름다운 것들을 먹게 하였는데 그렇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관리들은 여호와를 반역하고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른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예를 들은 설교는 결국 바알을 따르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리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 8:8~11절입니다. “8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새들과 짐승들은 자기의 때를 알지만 예루살렘 백성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서기관의 붓이 거짓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새 번역으로 8절을 봅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 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백성들에게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서기관들의 붓이 율법을 변개시킨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는 것은 참으로 엄격한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의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고 조작하였다는 것은 율법자체보다는 오히려 율법의 해석을 자의적으로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말로 말하면 성경을 보고서 설교를 하는데 해석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과 그 뜻을 왜곡 조작하는 것은 결국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거짓되고 조작되었기에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힐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기에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저주가 임하게 되는데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줄 것이며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벌을 받는 이유는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평강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사와 예배를 잘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자기들의 이익을 챙긴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말을 하는 거짓된 설교들을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도 욕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망을 들으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12절입니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다 우상숭배를 하는데 그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얼굴도 붉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후안무치(厚顔無恥)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예레미야 선지자가 책망을 하니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를 핍박합니다. 어제나 오늘이 동일한 현상입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돌아오라고 하여도 돌아올 줄 모르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진멸하시며 포도와 무화과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게 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인데 오히려 예루살렘 백성들은 바알들이 자신들에게 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거두어 가 버리신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14~16절입니다. “14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니라 15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16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켰도다” 심판의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며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께 범죄 하였으니 견곤한 성에 들어가 죽자고 합니다.

 

오늘날 복음을 듣고 안다는 자들의 모습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어차피 인간들은 죄인인데 우리가 죄를 짓다가 그냥 죽자고 합니다. 주께로 돌이키라는 말씀을 오히려 나는 죄를 지었으니 벌 받아 죽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겸손하게 회개하는 모습이 아니라 대드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악함이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까? 서기관들의 붓이 거짓되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이 거짓을 설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심판의 모습입니다.

 

17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이러한 자들에게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라고 하십니다. 어떤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뱀이 땅에 기어 다니는 뱀이 아니겠지요! 일차적으로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할 재앙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런 재앙의 선포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3:1~39절입니다. “봉독”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33절에 보시면 이들이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고 주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인데 그 율법으로 자기들의 권력을 삼고 그 율법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기 위하여 외식하며 온갖 욕심을 다 부리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의 거짓된 붓, 이들의 거짓 된 설교가 뱀이며 독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 하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동안 들어왔던 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에 의한 뱀과 독사의 말인지 잘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바울사도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그 영광의 기업이 무엇인지 이 일을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어떠함을 알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