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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8:18~9:22 슬프다! 2013. 9. 11

 

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19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20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16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 그들을 흩어 버리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오늘본문의 시작이 슬프다는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는 이유는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 애가에서 슬픔과 눈물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슬픔과 눈물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소식을 전하여도 돌이키지 않음에 대한 슬픔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슬픔과 눈물은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감정만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가슴에 귀를 대고 있는 자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슬픔과 탄식은 바로 하나님의 슬픔과 탄식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와 하나님의 탄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탄식도 있습니다. 백성들의 탄식은 원망의 탄식입니다.

 

18~9:1절까지의 말씀에서 선지자와 백성과 하나님의 탄식을 구별하여 보겠습니다. 먼저 선지자의 탄식입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이러한 선지자의 슬픔과 탄식은 딸 내 백성이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 인하여 탄식합니다. 백성들의 소리가 어떤 소리인가 하면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이러한 백성의 소리는 원망이 담겨있는 탄식소리입니다. 시온은 곧 예루살렘인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왕 노릇을 하지지 않고 뭘 하시는가 하는 원망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우상 숭배한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탄식을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이러한 여호와의 탄식에 백성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은 제사를 드렸고 절기를 지켰다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서 도둑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에 자기 탐심을 위하여 열심히 제물을 바치고 절기를 지킨 것이 우상숭배인줄도 모르고 환난이 닥치니 여호와를 원망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가 우상숭배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에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구원을 기다렸지만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선지자는 다시 탄식이 나옵니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않은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어찌하면 내 머리를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길르앗에 치료하는 유향이 있기에 평소에 그곳에서 치료약을 구하여 치료합니다. 그런데 왜 이 백성이 여호와께로부터 치료를 받지 못하는가 하는 선지자의 탄식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머리가 물이 되고 눈이 눈물 근원이 된다면 주야로 울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모르기에 재앙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시온으로 불러지는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곳인데 여호와께서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적들이 쳐들어오고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보고만 계시는가 하는 원망과 탄식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선지자와 하나님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기에 탄식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백성사이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백성들을 끌어안고 울고 있습니다. 이들이 멸망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아야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킬 것인데 죄를 알지 못하니 주께로 돌이키지를 못합니다. 공중의 새들도 때를 따라 오고 가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를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된 붓으로 인하여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미가서 3:1~12절을 봅니다. “봉독” 백성의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의 이런 모습이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한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주께로 돌이킬 수가 없는 백성들입니다. 이런 모습이 구약의 모습만이 아니라 신약의 모습이며 오늘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11:20절입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미가서 말씀의 압축입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는 배척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뺨을 칠지라도 용납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이 시대도 팽배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계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슬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남을 비판하기는 잘하지만 실상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복음을 알고 언약을 안다는 것은 주께로 돌이키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아는 것으로 자신은 주께로 돌아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더욱 슬프게 합니다.

 

예레미야 9:2~6절입니다. “2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6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차라리 내 백성을 떠나 광야로 나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 안에 온통 속임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이는 일로 인하여 여호와 알기를 싫어합니다. 여호와의 성전조차 도둑의 소굴로 만들어 놓은 세상이기에 온 세상이 다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거짓말에 속은 자들은 주께로 돌아올 줄을 모릅니다. 자기들은 주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이 됩니다.

 

7~9절입니다. “7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8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 9 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서 주께로 돌아오지 않을 뿐 아니라 백성들도 다 거짓에 사로 잡혀있습니다. 그 특징이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고 있습니다. 표리부동한 모습이 바로 인간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이러한 나라에 보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들은 선지자는 심판이 아직 심판이 집행되지 않았지만 이미 심판이 당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산과 목장이 불에 탔기에 가축의 소리도 공중의 새와 심증도 다 도망가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미 심판이 집행된 현실로 보이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先知者)란 선견자(先見者)자이며 예언자(預言者)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는 것이 선지자며 선견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보고 먼저 안다는 것은 개인의 길흉을 점치는 그런 무당 짓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고 반드시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심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오실이기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이 세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는 사람이 적어진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서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이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아니할 곳이 없음을 보고 울어야 합니다. 어디 한 곳인들 마음 둘 곳이 없는 세상입니다. 어제 저녁에 집사람이 양파를 까는데 겉이 멀쩡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겹 속에 있는 양파 안이 완전히 썩어있었습니다. 겉 부분의 몇 겹이 멀쩡하게 있으니 안이 썩은 줄을 모르는 것처럼 이 세상에 멀쩡해 보이는 것들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거짓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이러한 마음으로 이루어놓은 것들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11절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다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든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돌무더기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었다는 말은 폐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 들짐승의 굴이 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시겠다는 것이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폐허가 된 것처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세상도 이미 폐허더미로 보이는 것이 선지자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 슬퍼하고 있습니까? 폐허가 된 것들을 가지기 못하여 슬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2~16절입니다. “12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 같이 불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느냐 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14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16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 그들을 흩어 버리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래서 미리 보는 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죄로 인하여 심판을 당합니다. 그 죄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바알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하시는데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그들을 여러 나라에 흩어 버리고 그들의 뒤로 칼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온 세상의 멸망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공통된 죄악은 바알숭배입니다.

 

이 바알숭배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이 신이 되어있는 세상입니다. 이미 공산주의는 망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만세를 외치지만 이 자본주의도 결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본다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 알고 주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주께로 돌이키는 것은 바알 즉 돈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만 하지 실상은 바알을 숭배한다면 이것이 바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 슬퍼합니까? 멸망의 가증한 바알을 가득 쌓아둔 것으로 기뻐하고 그 바알이 무너진 것으로 슬퍼하지 않습니까?

 

17~22절입니다. “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해 보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18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19 이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거처를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20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21 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22 너는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예루살렘의 멸망 앞에서 우는 자들이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보고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울지 않기에 곡하는 부녀를 불러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곡하는 부녀가 초상집에 호상(護喪)꾼으로 와서 형식적으로 울면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라고 합니다.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미 예루살렘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에게만 들렸기에 다른 자들이 울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함께 울 수 있도록 지혜로운 호상꾼을 불러서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받게 하여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망이 창으로 넘어오고 궁실로도 들어와서 자녀와 청년들을 멸절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의 시체가 분토처럼 들에 떨어지고 거두지 못한 곡식 단처럼 될 것이기에 그렇게 되기 전에 울라고 하는 선지자의 마음 곧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6:20~23절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가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금 우는 자들은 웃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웃는 자들은 애통하며 울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는 자들은 가난한 자인데 무엇에 가단한 자들입니까? 병행구절인 마태복음과 연결하여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자기 의로 배부르고 웃는 자들은 그 날에 주리고 애통하며 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로 돌이키지 않고 멸망할 가증한 것들을 의지한 것들, 그것이 재물이든 자기 의이든 이런 것들을 지금 슬퍼하며 주께로 돌이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우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셨습니다.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혼자 우십니다. 예루살렘이 평화의 성인데 정작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멸망하였습니다. 이 멸망은 온 세상의 멸망과 연결이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만이 나와 세상을 보면서 슬퍼하며 울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