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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18 주께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2014. 2. 19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지난주에 본 19장의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토기장이의 집에서 그릇을 사고 백성의 지도자들을 몇 사람과 함께 하시드문 어귀의 힌놈의 골짜기에서 그 그릇을 깨뜨리고 말씀을 전합니다. 그 그릇이 깨어진 자리가 도벳의 산당이 있었으며 그곳을 요시야 왕이 거름더미를 삼은 것으로 시작하여 게힌놈이 게헨나로 번역이 되면서 지옥이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리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도벳에서 돌아와서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전합니다(19:14~15). 거룩한 성전이라는 이곳을 하나님께서 불에 태워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20:1~3절입니다. “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전 뜰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의 소식을 전하자 바스훌이라는 사람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때리고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을 채워두었습니다.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입니다. 성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예레미야를 때리고 나무 고랑으로 채워두었습니다. 나무 고랑이란 죄수를 묶어 두는 기구입니다. 하루 밤을 이렇게 채워놓고는 그 다음날 풀어줍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제사장 가문의 출신입니다. 그러므로 매를 때리고 하루정도 감금하는 것으로 벌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풀어주는데 그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스훌을 향하여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마골밉사빕’이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20:4~6절입니다.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바스훌은 성전의 총감독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단의 총회장쯤 되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작은 교회 목사정도의 사람입니다. 이런 예레미야가 총회장이 목회하는 제일 큰 교회에 가서 이곳을 하나님께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였다면 총회장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이단으로 몰아서 제명출교를 할 것입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하였다가 풀어줄 때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바스훌에게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이름을 마골밋사빕이라고 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말은 사방의 두려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바스훌의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이 됩니다. 그 두려움이란 바스훌 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왕의 손에 온 유다를 넘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의 총 감독인 바스훌만이 아니라 다른 제사장들도 거짓 예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시면 바스훌에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거기서 죽어야 하는 이유는 거짓 예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이란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성전이 있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있으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늘 보호하여 주시기에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었습니다.


예레미야 6:12~14절입니다. “12 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평강을 전합니다. 그들이 잔하는 평강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평강을 얻는다는 그런 말들이었습니다. 이 말을 백성들이 듣고 그렇게 복과 평강을 받기 위하여 제물도 바치고 헌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평강을 말하고 그 평강을 얻기 위하여 열심들을 내었지만 그 속마음은 탐심이었기에 결국 성전이 우상숭배의 자리였습니다.


20:7~8절입니다. “봉독” 주께서 나를 권유하셨다고 합니다. 이 권유라는 말이 성경에서 어떻게 쓰이는가 하면 속이다. 유혹하다. 설득하다는 말로 사용됩니다. 예레미야 자신이 여호와의 선지자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보다 강하시기에 그 설득에 넘어가서 할 수 없이 선지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호와께서 자신을 선지자로 만들었다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셔야 하실 텐데 어떻게 된 셈인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고 사람마다 종일토록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전하는 말은 말을 할 때 마다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게 하셔서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할수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자신보다 강하심으로 나를 이기셨기에 나를 이렇게 끌고 간다는 탄식입니다.


예레미야 1:4~10절을 봅니다. “봉독” 예레미야 선지자의 소명입니다. 모태에 짓기 전에 여호와께서 알았고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여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슬프다고 합니다. 자신은 그런 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하시기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세우시고 누구에게 보내든지 그에게로 가며 무슨 말이든지 그렇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을 주시는데 여호와께서 두려워말라고 하시면서 너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매를 맞고 나무 고랑에 매였다가 풀려나고 종일 수치와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강하셔서 자신을 이기셨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소연 하는 것입니다.


20:9~10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조롱과 수치와 모욕을 당하기에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임하였기에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시는데 자신이 아무리 전하지 않으려고 결심을 하여도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말씀을 전해야 하지만 그럴수록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워함을 듣습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고소하면 자기들도 고소하겠다고 하고 자신의 친한 벗도 예레미야가 실족하기를 기다립니다. 예레미야가 혹시 유혹을 받아 실족하면 그를 이기이 우리 원수를 갚자고 하고 있습니다.


11~13절입니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 예레미야는 조롱과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주께서 자신을 이기셨기에 어쩔 수 없이 전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부르실 때의 약속인 그 구원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주의 보복하심을 보게 하여 달라고 하면서 이미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기에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지금 고난 중인데 이미 구원의 완성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강하사 예레미야를 이기심으로 자기의 사역자로 삼으시고 이렇게 이끌어 가십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어떻게 고난을 받으실 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은 메시아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이 받을 그 고난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조롱과 모욕과 수치를 당하심으로 모든 선지자들이 미리 그 일을 보여주는 역할이며 그리스도의 완성으로 자기 백성을 삼은 자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같은 길로 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주께서 나를 설득하시는데 그 설득을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께서 나보다 강하심으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종일 수치와 모욕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14~18절입니다.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13절에서 구원하셨음을 인하여 찬양한다고 하고서는 갑자기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욥의 탄식 중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만 이미 구원이 완료되었다고 찬양하였지만 또 돌아서면 자기의 태어남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겠다고 할 정도로 탄식이 계속됩니다.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셔서 이러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가 하는 탄식이 이미 구원이 완료되었다고 찬양한 예레미야의 입에서 또 나옵니다. 이런 모습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시편 22:1~10절입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예레미야의 탄식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증언한 내용들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일을 시중드는 천사들도 알지 못한 이 엄청난 구원의 비밀을 하나님은 십자가속에 감추어두심으로 자기 백성만 불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우리가 결심하여 가는 길이 아니라 주께서 강하셔서 우리를 이기심으로 끌고 가시는 길입니다. 이미 완료된 구원이 다가온 것이기에 순간의 찬양이 나오지만 돌아서면 또 다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만큼 탄식이 나옵니다. 이미 완료된 구원이 이 역사 속에서는 탄식과 고난 가운데 피어납니다. 그러므로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8: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