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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49:28~33  게달과 하솔에 대하여    2015. 1. 28

28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29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그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 할지니라 3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솔 주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너를 칠 모략과 너를 칠 계책을 세웠음이라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32 그들의 낙타들은 노략물이 되겠고 그들의 많은 가축은 탈취를 당할 것이라 내가 그 살쩍을 깎는 자들을 사면에 흩고 그 재난을 여러 곳에서 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하솔은 큰 뱀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거기 사는 사람이나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리라 하시니라 

이유 없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는 어떤 마음이 듭니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혹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도 원인을 알면 좀 덜 답답할 것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원인이라면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포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자녀의 어머니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 병은 현대의 첨단의학으로도 그 원인을 밝힐 수가 없는 병입니다. 그래서 원인이라도 알면 덜 답답하겠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게달과 하솔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루살렘 주변의 나라들의 심판을 받을 때에 몇 가지 이유들이 있기도 하였지만 어떤 나라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 심판을 받습니다. 오늘 살펴본 게달과 하솔이라는 나라도 오늘 분문에서 이런 심판을 받을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게달과 하솔에 대하여 찾아보았지만 특별하게 심판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김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심판을 이유대지 않고 옳습니다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있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내용들이 성경에 있는 것입니까?

게달은 인명도 지명도 됩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12 아들 중에 둘째입니다(창25:13).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 사이에 태어난 자식입니다. 이 아들들의 이름이 지역이 이름이 됩니다. 게달이 사는 곳이 아라비아 지역입니다. 그리고 하솔은 이스라엘 경내에 여러 곳에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시에 하솔의 이름도 나오고 사사시대에 하솔의 이름도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하솔은 게달과 함께 아라비아 지역의 한 지명으로 봅니다. 이러한 두 나라 게달과 하솔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바벨론에 의하여 공격을 받는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라비아 지역의 하솔은 성경에서 별 언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게달에 대하여 몇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120:5~6절입니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메섹과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화라고 합니다. 메섹은 흑해 연안의 민족이고 게달은 아라비아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가 두 곳에 살 수 있는 지리적인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기에 그 이름을 비유로 봅니다. 그러면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거하는 것이 왜 화가 되는가 하면 이들이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막지역이기에 목축을 하지만 약탈도 하는 민족입니다. 화평을 미워하는 민족이기에 심판을 받는다고 말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아가서 1:5절입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여기의 게달의 장막도 비유로 사용됩니다. 아라비아 지역의 천막은 고동색의 염소 털로 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람미가 게달의 장막 같을 지라도 솔로몬의 휘장 같다는 말은 솔로몬이 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왕 가까이에 백옥 같은 피부의 여인들이 즐비할 지라도 목축을 하는 술람미의 검게 그을린 그런 여인을 솔로몬 왕이 사랑한다는 이 이야기는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로 사용된 것이 게달의 장막 같다고 사용되었습니다. 심판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21:13~17절입니다. “13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드단 대상들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하리라 14 데마 땅의 주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15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음이니라 16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17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의 말씀도 열방의 심판에 대한 내용 중에 게달에 대한 내용이지만 특별한 심판의 이유는 없습니다. 

이사야 42:10~13절입니다. “10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11 광야와 거기에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이 사는 마을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주민들은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12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전할지어다 13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여호와의 전쟁을 찬양하는 나라로 부름 받는 나라들 중의 하나가 게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게달은 심판받을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께 새 노래로 찬양하는 자들로 부름 받습니다. 

이사야 60:7절입니다.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이사야 60장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예루살렘을 다시 영광스럽게 하실 때에 열방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오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열방의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복음이 선포되고 그 복음에는 열방이 참여할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며 그 십자가로 열방이 모여들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내용 중에 게달도 포함이 됩니다.  

예레미야 2:10절을 봅니다.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 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깃딤 섬들과 게달에 사람을 보내보라고 합니다. 그런 나라들은 그들의 신이 우상일지라도 그들의 신을 바꾸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참으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다고 책망하기 위하여 게달을 비유로 들어 사용합니다. 

지금까지 게달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나라가 망할 정도로 악을 행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열방이 여호와의 찬송하게 될 때에 그 찬송의 무리에 함께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에는 이유도 없이 여호와께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고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 소유로 삼고 그들을 향하여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는 것은 여호와의 심판으로 인하여 사방에 두려움이 가득함을 말하는 마골 밋사빔이라는 말씀입니다(렘6:25, 20:3, 46:5).

그리고 하솔에 대하여서도 도망하라고 합니다.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너를 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을 보내어 치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게달이나 하솔은 사막지역이기에 사람들이 잘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요하고 평안히 살 수 있기에 문빗장 없이 홀로 사는 국민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축이 탈취를 당하고 재난이 여러 곳에서 오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솔은 큰 뱀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여 그곳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심판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까? 

박동현 교수의 이 본문 주석의 결론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늘도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어떤 나라가 강해져서 작은 나라들을 모조리 공격하여 점령하며 약탈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을 그저 강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온 누리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따라 그런 상황을 일정 기간 허락 하실 수도 있다. 그런 때에는 이 세상의 어느 지역도 안전할 수 없고, 세상 끝까지 엄청난 전쟁의 재난에 휩싸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시대에 세계의 패권을 어느 나라에 맡기셨는지를 오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 본문 주석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학자답게 결론을 내립니다. 학자는 자기의 피할 길을 마련해 둡니다. 그래서 ~사건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하실 수도 있다. 이렇게 표현하지만 그러나 이런 결론도 인간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입니다. 어떻게 온 세상을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누가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아무른 잘못도 없는 약한 나라를 강대국이 마음대로 하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뜻으로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일이 지금도 온 세상이 가득한데 이런 것들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을 누가 공의의 하나님으로 믿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박국서 1:2~4절입니다.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악인의 형통의 의인의 고난에 대한 선지자들의 질문들을 인용할 때에 시편 37편과 시편 73편과 욥기서와 이 본문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불합리하기에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시행되지 못한다고 항의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하박국서 2:4절을 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계속되어 지는 말씀에서 나옵니다. 악인들은 어떻게 사느냐하면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않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힙니다.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알지 못하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읍니다. 스올과 사망은 족함을 모릅니다. 지금까지 모든 인류를 다 집어 삼켜도 여전히 죽음은 족함을 모르고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고 가듯이 이 세상의 강한 자들의 욕망이 이러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박국 2:9~13절입니다. “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0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12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3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고 부당한 이익을 취합니다.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불탈 것입니다. 그런데 불탈 것으로 수고하고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음이라고 합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에 강한 나라가 작은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것도 인간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강한 나라들이 작은 나라들을 학대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들의 안전을 위하여 약한 자들을 빼앗고 죽이는 것을 누가 이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믿을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주체성이 다 무너져야 합니다. 인간의 인과율이 무너져야 합니다. 인간의 선악체계가 무너져야 받아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어느 인간이 수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심으로 이런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지금 세상을 거꾸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박국서 3:2절에서 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선지자가 여호와께 질문하여 응답을 받고 나서 하는 찬송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해 달라는 말씀은 주님의 뜻 곧 심판을 이루어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 부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은 완전히 심판의 내용이 나옵니다. 이런 심판의 소식이 얼마나 두려운지 16절에서 창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떨렸다고 합니다. 

하박국 3:17~19절입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결론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서 살면서 무엇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겠습니까? 악인의 형통입니까? 의인이 고난입니까? 의인의 고난이란 이 세상에서 심판을 당함으로 오직 여호와의 구원으로만 즐거워하도록 만들어 지는 자들이 의인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게달이나 하솔의 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십니까? 온 세상은 개인이나 나라가 심판받을 만한 일을 해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기에 아무리 열심히 착하게 살아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항의하는 것이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자들의 후손임을 증거 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고무줄 이야기 하였습니다. 아담을 늘여놓은 것이 우리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사는 것 자체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모습을 예수님이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7:46절입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께서 우리와 다른 점 하나가 무엇입니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버림을 받습니까? 죄인인 우리가 버림받아야 할 그 벌을 대신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대신 버림을 받았는데 왜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면서 우리는 고난이 없다고 하는 것이 번영신학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버림받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여기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찬양을 하게 됩니다. 이 모습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부르짖는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 탄식과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의 정당성들이 다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이 역사 속에 살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 없는 것들을 단 하나라도 남김이 없이 다 무너져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아무 것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이 역사 속에 고난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이 광야의 길을 통하여 왜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만 살아야하는지를 배우고 갑니다. 성도는 날마다 말씀으로 해석당하며 살아가며 그 결론은 다음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4:10~11절입니다.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 찬양을 성도는 지금 여기서부터 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1: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