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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4~11 해 아래 새것이 없다! 2018. 10. 31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이 날이 되면 제가 종종 질문한 내용입니다. 시월의 마지막 날이지만 이 날은 15171031일 마르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공포한 날을 기념하는 하는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95개 논제의 원제목은 면죄부(免罪符)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토론입니다. 이 부분은 오는 주일오후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목숨을 건 종교개혁도 해 아래 일어난 일입니다. 부패한 종교성에서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이라는 성경의 뜻을 드러낸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이러한 종교개혁이 50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은 해 아래 새것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이 29회나 나옵니다. 이와 같은 뜻의 표현은 하늘 아래, 땅 위에서 라는 표현도 됩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아담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해와 하늘과 땅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라는 뜻은 아담 아래, 법 아래라고 해도 됩니다.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은 한 아담인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타락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죽었더라는 결론입니다.

 

창세기 5:1~8절을 봅니다.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후에 태어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아벨은 허무하게 죽은 것입니다. 헛되다는 단어가 헤벨인데 아벨이라는 단어의 같은 단어임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은 아벨 대신 셋을 얻었습니다. 셋을 아담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났을 때에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인간이 천년을 가까이 살았지만 그 모든 결론이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해 보아도 인생의 결국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지혜자도 무식자도, 사람도 짐승도 죽더라는 것을 전도서는 헛되고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을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 속에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었더라는 족보 속에 유일하게 죽었더라는 말이 없는 사람이 에녹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65세부터 하나님과 삼백 년을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을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유다서에서도 나오지만 에녹은 선지자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그 심판의 내용은 므두셀라가 죽으면 세상에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늘 종말론적으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은 천년 가까이 사는데 삼분의 일만 살고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헛되지 않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세상의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삼분의 일만 살다가 사라져 버리고, 아벨처럼 형에 의하여 죽임 당하여 허무하게 죽는 인생이 해 아래 새것이 없는 허무한 세상에서 허무 하지 않는 인생입니다.

 

전도서 1:2~3절을 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헛되다는 말을 NIV 성경에서는 의미 없다(meaningless)고 번역하였습니다. 타락한 아담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다 하무하고 의미 없는 일입니다. 전도서 12:8절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시작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그 헛됨을 알아야 그 중에 헛되지 않는 것이 여호와 경외이며 이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이 이렇게도 분명하게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담 이후로 타락한 인생 그 자체가 허무한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생들은 자신의 허무함을 생명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것으로 채우려고 평생을 소진합니다. 그러므로 허무하고 허탄한 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하지만 인생 자체가 허무하기에 끊임없이 우상숭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기에 생명의 갈망이 아니라 허무한 갈망한 가득하게 된 인생이기에 평생 탐심에 이끌려 살다가 영원한 허무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해 아래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 4절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이 땅이 영원하기에 이 땅에 여호와의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땅이 영원하다는 것은 허무하게 죽어가는 인생에 비하여 땅이 오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지만 땅은 영원히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영원하다는 말을 가지고 안식일이 영원하다고 하니 그 날짜를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 안식교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율법 조문대로 해석을 하면 죽이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고후3:6).

 

5~7절입니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해 아래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 바람, 강물을 통하여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모든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지만 그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만족이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8~11절입니다.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생은 무엇을 해도 자족이 안 됩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기에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살아가기에 피곤한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라고 보는 것, 새로운 것이라고 듣는 것들도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책을 보고 음악을 듣는 것도 결코 족함이 없습니다. 저의 설교도 새것이 아닙니다. 이미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다 말해진 것들입니다. 다만 구석에 숨겨져 있는 것들이기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7인의 십자가 사상을 보면 초대교회 때나 중세 교회 때나 현대에도 십자가를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것도 피곤한 것입니다.

 

전도서 12:12절입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많은 책들을 짓는 것도 끝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출판된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반서적이 아니라 기독교 서적만 해도 해도 수백 년을 책만 읽어도 다 읽지 못할 내용들입니다. 지금 이 설교를 보고 듣는 사람들도 이런 저런 설교를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도 사실 피곤한 일입니다. 지난주에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너무 피곤해 보인다고 하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 피곤하냐고 물으니 죄와 저주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허무에 굴복하는 피곤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해보려는 노력이 인간의 철학입니다. 자신이 의도하여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살아야 하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허무합니다. 죽음도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을 반항하기 위하여 유명한 철학자들은 스스로 죽음의 길에 들어섬으로 자신의 허무한 인생의 굴레 지워짐을 벗어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결국은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허무한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허무에 굴복하게 됩니까?

 

로마서 8:20절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허무한데 굴복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시며 왜 해 아래 속한 인생들이 허무한데 굴복해야 하는 것입니까?

 

창세기 3:17~19절입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이것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허무한데 굴복하면서 죽어가도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로마서 5:12~15절입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3)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아담부터 모세 때 까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갔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망이 있었지만 그 사망의 이유가 모세를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도 모세가 받은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과 죽음이라는 것도 결국 모세가 받은 계시를 통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 오경이라는 창세기 안에 이미 율법 받기 전에 죽음이 왕 노릇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벨과 에녹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통하여 법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고 나서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의 능력으로 의에 이를 수 없는 허무한 인생임을 율법으로 계시합니다.

 

로마서 8:18~20절을 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허무한데 굴복하게 하시는 분이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허무하지 않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니 해 아래서 계속 수고를 해서 어떤 성취를 하면 자신들의 헛되지 않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들도 진선미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모든 것이 선악판단을 자기중심으로 한 것이기에 헛된 것입니다. 종교적인 업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었다는 것도 다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런 해 아래 인생의 수고가 헛됨을 알게 하십니다. 인생의 헛수고에서 돌이키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21~25절입니다.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허무하게 썩어질 것들에서 해방이 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이미 묵시적으로는 그 영광의 자유가 이루어졌습니다.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8:30).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고난을 통하여 썩어지지 아니할 영광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보이지 않는 그 약속을 믿고 살아야 하는데 그런 믿음이 없기에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고(8:26)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십니다(8:34). 이런 자들은 이 역사 속에서 해 아래 새 것이 없음을 알기에 더 이상 허무에 굴복하지 않는 그 영원한 영광의 새 날을 믿음으로 소망하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