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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1~8 대적(對敵)의 말 2020. 6. 3            (210장)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1)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오늘 본문 표제어를 먼저 봅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표제어를 다윗이 붙인 것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결론은 시편의 본문을 보면서 이미 구약시대 때에 소제목을 붙인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내용을 가볍게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이 시의 배경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런 표제어를 그 시의 배경으로 보면 시편 본문의 내용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아들의 반역으로 도망가는 모습은 구원을 받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셀라도 살펴보겠습니다. 표제어와 셀라가 처음 등장하는 시편이 3편이기에 미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셀라는 시편에서 73회 나타나고 하박국 3장에 3회 나옵니다. 하박국 3장도 하박국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셀라의 어원에 들어 올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셀라가 어떤 의미로 붙여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시편 3편에는 셀라가 나오는 곳이 2, 4, 8절입니다. 시의 한 문단이 마칠 때에 셀라가 붙어 있기에 음악적인 표시라고 봅니다. 잠시 멈추라든가, 소리를 높이라든가 하는 용어로 추정합니다. 어원으로 보면 주께 올려드린다는 표현도 되겠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봉독여호와께 하소연 합니다. 이런 시편을 탄식시라고 합니다. 시편에는 많은 탄식의 시가 있습니다. 탄식과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는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적이라는 단어가 한글성경으로 시편에만 49회가 나옵니다. 성경전체에서는 253회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자기를 치려고 일어나는 대적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대적들이 하는 말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2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빈정대는 자 또한 왜 이리도 많사옵니까?” 세상의 무수한 재앙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도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 모습이기에 대적들이 조롱합니다.

 

다윗이 언제부터 이런 대적이 많았습니까? 다윗은 목동출신입니다. 다윗이 목동이었을 때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다른 형제들을 다 제쳐두고 막내가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형들의 시기가 오죽하였겠습니까? 다윗의 형들 세 명이 사울 왕과 함께 전쟁에 나가 있을 때에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면회를 갑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조롱을 듣고서는 분노합니다. 이런 다윗을 큰형 엘리압이 보고서는 분노하여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고 하면서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합니다. 기름부음 받아서 그런 건데 건방지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내가 왜 까닭이 없겠느냐고 하면서 다른 군인들과 이야기를 하니 사울 왕에게 보고됩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자기가 저 골리앗을 물리치겠다고 합니다. 사울 왕이 자신의 갑옷을 입혀주지만 거치적거려서 벗어두고 물맷돌로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군인들이 용기를 내어 적들을 크게 이깁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환영하는 자들이 노래하기를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합니다(삼상18:7). 이 소리를 들은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음으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나라를 구하였지만 왕이 다윗을 대적합니다. 다윗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대적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편을 드는 자들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전쟁의 의미를 알았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다윗 편을 든다고 사울은 자기 아들마저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편에 서는 일은 세상의 미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사울 편에 선 자들은 다윗을 고발합니다. 그러므로 대적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사울체제에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는 다윗에게로 모여듭니다(삼상22:2). 택함을 받은 자들은 기름부음 받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의 미움을 받는 일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15:19).

 

가인과 아벨을 보면 누가 저주 받은 모습으로 보입니까?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아주신 아벨이 저주 받아 죽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하나님의 표를 받아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자손들이 무기를 만들고 악기를 만들고 문명을 건설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아벨은 허무하게 저주 받아 죽은 자로 보이고 가인은 성공한 자로 보입니다.

 

욥도 까닭 모를 고난을 당합니다. 하루아침에 재산이 다 날아가고, 자식이 다 죽고, 몸은 병들고, 그런데도 욥은 주신이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이런 욥을 보고 욥의 아내는 그런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이때에 친구들이 와서 욥을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인과율입니다. 네가 아무리 정직하게 살았다고 하여도 무언가 숨겨진 죄가 있기에 이런 재앙을 당한하고 하면서 회개하고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친구라는 자들이 욥의 대적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배경이 압살롬의 반역이라면 다윗은 이미 간음하고 살인한 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대적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징계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 받음으로 대적이 일어나지만 다윗의 범죄 이후에 징계로 인하여도 대적이 일어납니다. 범죄 이전에 대적들이 일어나는 일은 기름부음 받은 자의 고난이기에 그 고난을 감당하면서 대적을 주님께서 물리치실 것을 청원하며 주께 감사의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범죄 한 이후에 이런 대적들이 등장할 때에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봅니다.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이 탄식시가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기 이전의 일이라면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까닭모를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배경인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면서 지은 시라고 한다면 다윗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사무엘하 12:7~12절입니다. “봉독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이 있기 전에는 자기 죄도 몰랐습니다. 간음하고 살인하여도 죄로 알지 못합니다. 간음과 살인은 둘 다 율법에 의하여 죽어 마땅한 죄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율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지만 자신의 죄를 모릅니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은 성령의 역사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기 죄로 들리지 않으면 아직도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있기에 자기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는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간음으로 인하여 우리야가 죽고 그 아들이 죽습니다. 그런데 죄가 용서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셨다면 다윗에게 더 이상 다윗이 벌을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 하셨다면 깔끔하게 앞으로의 삶에 어려움도 없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 있지만 방금 읽어본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원수가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한 거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욥기에서도 사탄은 하나님께 시비걸기를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에 잘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원수가 다윗을 용서하신 것을 비방할 수 있습니다. 그 사탄이 간음하고 살인한 다윗을 용서 할 수 있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신 죽는 자가 우리아이며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죽습니다. 다윗은 자기 대신 죽는 분으로 인하여 용서받는 그 용서의 위력을 알게 됩니다.

 

사무엘하 15:30절입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아들이 반역하여 아버지를 죽이려고 옵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맨발로 울면서 머리를 가리고 올라갑니다. 사독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왕을 따라 가려고 하니 왕이 성읍으로 도로 메고 가라고 합니다.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겠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주의 선한 뜻대로 행하시기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자신은 버림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용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자신은 이미 간음과 살인으로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 때에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알고 인정을 합니다. 그때 용서를 선포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집안에서는 칼이 끊어지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고 아버지의 첩을 백주에 동침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들의 반역으로 다윗은 맨발로 울면서 감람산으로 피난 갑니다. 이때 시므이가 다윗 왕의 피난행렬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조롱합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시므이를 죽일까라고 하니 그냥 두라고 합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합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고 여호와의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자들이 대적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1 주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2 나를 빗대어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다" 하고 빈정대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다윗이 피난 가는 이런 모습을 보고서 여호와의 구원을 받은 자로 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고 많은 유력한 자들이 반역의 무리에 가담하였기에 다윗이 맨발로 도망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본문 3~4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3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나를 에워 싸주는 방패, 2)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시니, 4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셀라)” 다윗이 피난 가는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도움을 입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방패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무른 보호자가 없이 도망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자신의 방패라고 합니다. 주님이 자신의 머리를 들게 하여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용서의 선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대적들에게 쫓겨 가지만 여호와의 용서에서 끊어진 것이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본문 5~8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5 내가 누워 곤하게 잠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6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7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의 하나님, 이 몸을 구원해 주십시오. , 주님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뺨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를 부러뜨리셨습니다. 8 구원은 주님께만 있습니다. 주님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셀라)”

 

사람이 언제 잠이 오지 않습니까? 염려가 많을 때 잠이 오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방에 적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서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잠을 잘 수 있고 잠을 깰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붙드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천만인의 대적들이 다윗을 향하여 너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한 후반기의 삶을 보시면 구원받은 자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연약함과 죄가 나옵니다. 그리고 아들의 반역만이 아니라 자식들 안에서 간음과 살인이 일어납니다. 이런 모습으로 보고 많은 사람들이 다윗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자신의 대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구원하여 주시고 그런 대적들을 물리쳐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구원이 일어났음으로 완료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다고 합니다. 대적이 사나운 짐승이든지. 독이 있는 뱀이든지 간에 그 머리를 쳐서 이빨을 다 꺾어버리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는 그 원수를 하나님께서 이미 꺾어 버린 것을 압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대신 죽은 우리아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한 우리아가 다윗의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으로 죄와 용서를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절에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합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우리아의 이름을 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족보는 다 죄인들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들의 족보 속에 대신 희생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 특히 우리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처녀 마리아는 목숨을 성령의 잉태를 소식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족보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1: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다윗은 이미 성령의 감동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아들의 반역으로 비참하게 쫓겨 가는 그 모습을 보고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천만인의 대적들이 조롱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향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그런 자들을 대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미 오실 그리스도의 일을 성령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의 마지막에 등정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나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봅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기서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예슈아입니다. 구원이라는 뜻이지만 여호수아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는 예수아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예수아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십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 예수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그 이름이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입니다.

 

다윗이 아들의 반역으로 감람산으로 피난 갈 때에 울며 맨발로 도망갑니다. 그런 다윗을 보고 누가 구원을 받은 자라고 말하겠습니까? 다윗만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택한 자들을 다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람산 깊은 밤중에 홀로 기도하십니다. 다윗이 맨발로 울면서 피난 간 그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올리브 산에서 올리브를 짜는 기름틀이 있는 곳에서 땀을 피처럼 흘리면서 밤새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대적들이 조롱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십자가에 앞에서 다 도망갑니다.

 

마태복음 27:39~44절입니다.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다윗을 향한 조롱이 예수님께 모아지고 있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조롱한 그 조롱이 예수님께 모아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가 저렇게 저주 받아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승리임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 십자가로 뱀의 머리를 깨어 버림으로 대적의 이빨을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다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구원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미 믿었기에 자신이 비록 아들의 반역으로 쫓겨 가지만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다윗의 이런 환난을 보고서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신약에서도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은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4:1~18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1)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시편 3편의 해석과 같습니다. 대적의 말에 속지 마시고 십자가의 완성을 믿고 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