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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6:1-3 상호소속(相互所屬) 2020. 3. 18          (488장)

 

1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이주 전에 신랑을 잃어버린 신부가 신랑을 찾아 나서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신랑을 찾아 예루살렘 성에서 헤매다가 순찰하는 자들에게서 맞아서 상처가 나고, 성벽을 파수는 하는 자들에게 겉옷을 빼앗긴 채로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찾는다고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말해 달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내용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그 형편없는 몰골의 술람미를 향하여 네가 사랑하는 자가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점이 무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술람미 여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한지를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지난주에 본 대로 여인 중에 아름다운 여인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이 나은가 하는 말이 일종의 조롱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1절도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네 임이 어디로 갔느냐? 간 곳을 알아야 함께 찾아보지 않겠느냐는 말도 조롱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임이 간 곳을 알았다면 찾아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찾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임이라면 조롱을 당하면서도 찾아 나섭니다.

 

본문 2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내 사랑하는 자란 신부가 찾는 신랑입니다. 이 신랑이 자기 동산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동산 가운데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동산은 신부를 말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부를 때도 이렇게 불렀고(4:12,15), 신부가 자신을 말할 때도 동산이라고 합니다(4:16). 또 신랑이 신부를 부르면서도 자신을 동산이라고 합니다(5:1). 동산이나 백합화와 같은 이미지들은 사랑하는 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부는 신랑을 자기 안에서 찾았습니다.

 

자기 안에서 사랑하는 임을 찾았다는 말이 이미 자기 안에 사랑하는 임이 들어온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임이 자기 안에 오지 않았다면 아무리 자기 안을 살펴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임을 찾기는커녕 지독히도 이기적인 자기 사랑만 확인하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기적인 자기사랑을 확대하여 나갈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일서 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이 사랑이 임한 자만이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칼럼 영상메세지에 란희와 철이라는 닉네임으로 영상을 올리는 분이 있습니다. 미국에 사시는 분인데 저의 설교 영상을 주제에 맞게 잘라서 짧은 복음이라고 올립니다. 이번에 올린 제목이 이렇습니다. ‘이럴 때에 금식하라. 무엇이 중요합니까? 내 안에 예수님이 없는데이런 제목을 붙여서 올려 놓았습니다. 마가복음 2장의 금식논쟁의 설교에서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참된 금식은 내 안에 예수님이 희미할 때에 금식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사랑하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계십니까? 그 분이 우리의 전부가 되십니까? 아니라면 우리도 금식할 때입니다. 신랑을 놓쳐버린 신부는 상처를 입고 겉옷을 빼앗겨도 이미 그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하는 임을 찾아 나섰고 결국 찾았습니다.

 

아가서 4:12~15절을 봅니다. “12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신랑이 신부를 부르는 노래입니다. 신부를 향하여 잠근 동산이며 아름다운 과일과 향기로운 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술람미가 신랑을 찾아 나섰는데 어디에 신랑이 있다고 합니까? 그 동산에 있습니다. 그 동산이란 바로 자기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랑을 찾아 나서게 한 분이 신랑입니다. 먼저 사랑하셨고 몰약의 향기를 남겨두었기에 신랑을 찾습니다.

 

호세아 14:1~3절입니다. “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음란한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역할인 호세아 선지자가 전하기를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돌아갈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돌아오라고 하시지만 이 말씀도 주께서 이루어내십니다.

 

이어지는 4절을 봅니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이미 구약 전체를 통하여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돌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구스인의 피부색을 바꾸지 못하고 표범의 반점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스스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13:2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사랑하셨기에 진노가 떠났습니다.

 

이어지는 5~8절입니다. “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주께서 돌이켜 주신 결과가 아가서의 동산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9절을 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인간의 주체가 극에 달한 이 시대에 누가 이런 말씀을 믿겠습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금은 철학과 과학의 발달로 자기주체성이 더욱더 극성인 시대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조롱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신천지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로 조롱을 당합니다. 그동안 교회가 말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어디에 있느냐고 세상에 조롱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함께 하심을 교회가 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거리끼고 미련한 그 십자가로 다 이루심이 못 마땅해서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면 이미 교회가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도는 반드시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그 길로 가는 자와 걸려 넘어지는 자가 나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사랑하는 임을 찾아 나섰는데 드디어 찾았습니다. 그 사랑하는 임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사람은 요한일서와 호세아를 통하여 살펴본 대로 사랑하는 그 분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서 사랑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았지만 정신을 다른데 빼앗겨 사랑하는 임을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본문 3절을 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하면 나는 임의 것, 임은 나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하는 임이 백합과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고 있습니다. 백합화의 이미지도 양떼의 이미지도 신부의 이미지입니다. 신랑이 이미 신부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상처입고 겉옷을 빼앗긴 술람미가 신랑을 찾아 나섰는데 그 신랑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 계심을 발견하고서는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상호소속이 되었습니다. 상호연합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라고 한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가 되라고 구약에서 말씀하시고 이 하나 됨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계십니다.

 

요한복음 10:24~33절입니다.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1)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여기서 소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예수님의 양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나와 아버지가 하나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신성모독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인간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만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선포는 소속을 구별하게 됩니다.

 

호세아서 14:9절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주가 이런 말씀을 알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아버지께 소속이 된 자들만이 알아듣습니다. 아버지께 소속이 되지 않은 자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셔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의 관계 속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그렇게 소속이 된 자는 술람미가 부른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임의 것, 임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요한복음 17:20~26절입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십자가 지기 전에 하신 기도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가서의 내용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기도입니다. 이 하나 됨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께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 버림받음으로 죄인들과 연합이 되어 그들의 죄를 속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이 일을 적용하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에베소서 2:11~22절입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아가서 본문의 주석과 같은 내용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요한일서 4:13~16절입니다.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심은, 아버지의 뜻대로 자기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찾아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함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 안에 하나님도 거하십니다. 이런 사랑을 아가서가 미리 예언하고 그 예언을 십자가로 이루셔서 우리에게 그 하나 됨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 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음을 알게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 됨에 죄인을 참여시키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이 사랑이 임한 자는 세상이 작게 보이며 그 십자가의 사랑이 크게 보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