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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1~11 하나님을 갈망함 2021. 3. 10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표제어를 보면 고라 자손의 1)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마스길이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시편이 고라 자손의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체를 보면 다윗의 시와 같기에 다윗의 시편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작사하고 고라 자손이 작곡하고 찬양을 인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라 자손은 신명기에서 모세를 대적하다가 땅이 꺼져 죽은 자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습니다(26:11). 이들은 아버지의 반역에 동조하지 않은 자들로 봅니다. 이들은 레위 지파로 다윗 시대 때 찬양을 인도하는 자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갈망에 관한 내용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됩니다. ‘생령이란 히브리어로 하이 네페쉬입니다. 이 단어는 짐승도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짐승은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을 만드시듯이 말씀으로 명하시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사람은 친히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짐승과 달리 사람을 이렇게 만드신 이유는 사람은 하나님을 갈망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네페쉬가 사용된 단어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목구멍, , 욕구, 영혼, 생명, 사람, 대명사로 사용됩니다. 한마디로 하면 갈망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살아야 인간입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와 아담이 선악을 따 먹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혹한 것은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으로 살겠다는 겁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고 나니 하나님처럼 된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상태로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안 되기에 에덴동산에서 추방합니다(3:22).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사람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흙에 속한 것만 갈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흙에 속한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3:11).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영원을 사모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려고 하는 갈망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한 일이 바벨탑을 쌓는 일입니다.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고 우리의 이름을 내자고 합니다. 타락한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자기 이름의 영원성을 추구합니다. 모두가 니므롯이며 진시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이름을 부인하고 주의 이름을 갈망한다면 이것은 놀라운 은혜가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합니다. 사슴이 사냥꾼에게 쫓기는지 아니면 사나운 짐승에게 쫓기는지 간에 그 목이 탈 정도로 갈급한 상태를 말하면서 시인은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합니다. 앞에서 갈망하는 인간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썩어질 것만 갈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두 가지 악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합니다(2:13).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5:39). 그러므로 영혼의 양식을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참된 생명의 양식이며 음료라고 합니다(6:55).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생명의 양식을 먹기 위함입니다. 이 생명의 양식에 얼마나 갈급합니까? 사슴이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 되었다면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시냇물만 찾아가는 겁니다. 이런 사슴처럼 생명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2절입니다. 내 영혼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생명의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번역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갈급함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생명에 관한 갈망이 없이 생존에만 갈급하다면 생명에서 끊어진 증거입니다. 생명에서 끊어진 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한 욕망만 가득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도 생명이 아니라 생존만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도 생존을 위한 욕구가 있습니다. 생존의 욕구나 생리적인 욕구들은 누구나 있습니다. 그 생존과 생리적인 갈급함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있습니다. 그러한 생존을 위한 양식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여 채워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말씀입니다(6:7~8). 성령이 임한 자라도 생존을 위한 일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자는 반드시 썩지 아니할 양식을 구하게 됩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겠느냐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을 보려고 합니다. 지금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를 원합니다. 물론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면 죽게 됩니다(33:20). 그런데도 주의 얼굴 뵙기를 원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제사장의 축복이 주의 얼굴을 비추어주시도록 축복합니다(6:25~26).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얼굴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시편 105:1~6절입니다. “1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2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3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4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5-6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역대상 16장에 나오는 시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언약대로 하신 일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심과 그 뜻을 구하는 겁니다.

 

지난주에 기독교 서점에 갔더니 사장님께서 우리 교회 어떤 분이 딸과 함께 성경을 사러 왔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전화하였더니 딸이 이런 말을 하였답니다. 설교 시간에 사람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겠다고 하면서 설교 들으면서 성경에 메모하려고 여백 성경을 사러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들을 텐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생겼다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생기는 것은 사람마다 환경이 다릅니다만 그 방향성은 같습니다. 생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의 형편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면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시편 저자가 어떤 형편인지 짐작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 시편 기자는 낙심이 되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인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런 소리를 구약이나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듣는 소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나가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4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지나간 날들이 생각난다. 무리의 앞장을 서서 하나님의 집에 이르던 일, 환희와 찬송 소리 드높던 그 행렬, 순례자의 축제로 법석을 떨던 그 일, 이제 이런 일들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하나님의 집으로 앞장서서 인도하여 함께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하던 그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무슨 사정인지 그런 예배를 할 수 없으므로 마음이 상하는 겁니다. 시편 저자가 다윗이라면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에 나갈 수 없어서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지 낙심이 되고 불안합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낙심되고 불안한 자기 자신에게 말합니다. 위와 같은 번역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불안하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구원자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찬양하지만, 다시 내 영혼이 속에서 낙심이 됩니다.

 

6~8절입니다. 내 영혼이 낙심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요단 땅은 요단강 동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약속의 땅에서 멀리 있는 중입니다. 심지어 요단강의 발원지인 헤르몬산을 언급합니다. 미살 산은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너무 멀리 있지만, 그곳에서 주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6절이 지역적인 거리를 말한다면 7절은 고난의 깊이를 말합니다. 폭포와 바다가 서로 부르듯이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절망스러운 가운데서도 주를 기억하니 낮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기쁨의 때와 정반대의 상황이지만 기도합니다.

 

9~10절입니다. 하나님의 전에 이르지 못하고 멀리서 환난 중에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대적이 나를 비방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어 나타날 때 나도 낙심이 되지만 나를 보는 사람들도 네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조롱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나에게 주셔서 대적을 발로 밟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응답이 안 됩니다. 그래서 다시 낙심되고 불안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합니까?

 

11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표준 새 번역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번역을 비교하여 보는 것은, 앞의 내용은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뒤의 번역은 나타나 도와주신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거저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이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앞의 번역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기에 내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시편 42편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나에게 도움을 주시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전에 생명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무리와 함께 찬양한 기억만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찬양과 경배를 드리지 못하고 멀리 쫓겨나 있는 상태입니다. 이럴 때 대적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을 합니다. 이런 상태이기에 낙심이 되고 불안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극적인 도움이 나타나지 않아도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이 뒤의 번역입니다.

 

이제 질문해 봅시다. 평생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이 전혀 도와주시지 않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네가 사는 모양은 왜 그 모양이냐고 조롱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낙심도 되고 불안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까? 우리는 철야를 하든지 금식을 하든지 아니면 선금으로 감사헌금을 하고서라도 응답을 받으라는 말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눈으로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온갖 간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게 과연 오늘 시편에서 말씀하는 내용일까요?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서 40일을 금식합니다. 그 후에 사탄이 나타나서 유혹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말이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탄에게 하나님의 아들 됨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물리치고 조용히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최후의 유혹을 받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 와보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습과 오늘 본 시편이 연결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도움이 없지만,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마태복음 27:37~44절입니다.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 패를 붙였더라 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같이 욕하더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를 구원하여 보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면 남만 구원하지 말고 너 자신을 구원하여 보라고 합니다. 이런 조롱이 오늘 시편 42편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의 말이 지금 십자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못 박힌 강도들조차 이렇게 조롱합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달려 죽는 예수님은 누가 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저주받아 죽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 안에 비밀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십자가의 강도들조차 조롱한 예수님의 죽음이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 하실 일을 합니다. 그 죽음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겁니다(27:51). 그 육체의 찢어짐이 새로운 살길을 연 것입니다(10:20). 그런데 그 십자가의 처형을 집행하는 로마의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27:54). 이런 일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성도는 생존의 세상에서 생존으로 만족이 안 됩니다. 아무리 채워도 그 갈증을 해갈할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날 길이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길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자신이 생명수라고 합니다. 자기를 믿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다고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찾아가셨듯이 오늘도 주님은 복음으로 자기 백성을 찾아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합니다(4:14).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6:35).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흐르는데 이는 성령을 말씀합니다(7:38~39).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목마름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생기는 자들인데 그 과정은 환난입니다.

 

요한계시록 7:14~17절입니다.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흰옷 입은 큰 무리가 어디에서 나오는 자들입니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이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오늘 본 시편 42편도 큰 환난을 겪습니다. 그런 환난을 겪을 때 사람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럴 때 기도하고 찬송하며 기다릴 뿐이라고 합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도는 이 땅에서 환난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 환난을 통하여 참된 목마름이 무엇인지 알고 그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해갈이 됩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