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2:5-9 길흉화복(吉凶禍福) 2010. 5. 19 (녹화와 녹음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5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6 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7 여호사밧이 이르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8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9 이스라엘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우리가 기도를 왜 합니까? 사람들은 큰일을 앞두고 길할지 흉할지를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흉과 화는 피하고 길과 복은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미래를 알 수가 없기에 신과 통한다는 무당을 찾아가 자신의 장래를 알아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래의 일을 점쳐준다는 점집들이 문명의 발달 유무와 상관이 없이 어디에나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점쟁이나 무당을 용납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명기 18:9-14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 자나 신접 자나 박수나 초혼 자를 너희 가운데 용납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죽이라는 것입니다(출22:18, 레20:27).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물어보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도서 7:13-14절입니다. “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장래 일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은 형통한 날은 당겨서 고정하고 싶고 곤고한 날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바르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길흉화복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면 됩니다. 곤고한 날에는 돌아보면 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일이 잘 되거든 행복을 누려라. 일이 틀려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 아무도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 그런데 우리는 둘 다 못하고 삽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형통한 날에 내가 너무 기뻐하며 형통을 누리면 혹시 이 형통이 속히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를 염려하면서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있으면 숨기려고 하지요! 그리고 곤고한 날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구나 하면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되돌아보고 생각하라고 하니 내가 무슨 일로 이렇게 곤고한 일을 당하는가 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곤고한 날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은 한치 앞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기에 주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배경을 봅니다. 열왕기상 20장에서 아합 왕이 아람 왕을 이긴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붙여주셨는데도 마치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아람 왕이 자기 아버지가 빼앗은 땅을 돌려주겠다고 하자 자기 임의로 살려주었다가 무명의 선지자에 책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돌려주지 않고 삼년이 지났을 때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아합 왕을 방문하였습니다. 여호사밧과 아합은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결혼을 하였으니 사돈관계입니다(왕하 8:18). 그리고 군사력도 아합이 강하였기에 여호사밧이 무시하지 못하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도 당신의 말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여호와께 물어보라고 합니다.

 

5-6입니다. ‘먼저’ 물어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본성일 수도 있지만 여호사밧은 아합보다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게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 사백 명쯤 모읍니다. 그들에게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울 것인지 말 것인지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올라가서 싸우라고 합니다.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7-8절입니다. 4백여 명이 일제히 왕이 승리한다고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보니 영 미덥지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물으니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길흉을 이야기 하는데 자기에게 좋은 일은 말하지 않고 흉한 일만 이야기 하니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이 좋지 나쁜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입에 쓴 것이 몸에 좋은 것이라고 하여도 쓴 것보다 단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가 수도 없이 많은데 그 중에 4백 명은 다 좋은 말을 해 주는데 1명이 좋지 아니하는 말을 하면 그 한 사람은 어디에서도 인정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 그룹에서도 백성들에게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진짜 선지자냐 하는 것입니다.

 

아합 에게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자가 850명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와의 갈멜산의 대결에서 이들이 제거되었지만 400여명의 선지자가 또 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왕도 그렇게 여기고 선지자 자신들도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그 이유는 왕에게 흉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날마다 아합을 고발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온갖 우상숭배를 하고 자기 왕궁 곁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나봇을 죽입니다. 이런 왕에게 길한 것만 말하는 선지자가 어떻게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호사밧의 말을 들은 아합이 하는 수 없이 내시에게 명하여 자기에게 흉한 일만 예언하는 미가야를 불러오게 합니다. 이렇게 미가야를 불러 오라고 하는 중에 4백여 명의 선지자들이 어떻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까? 10-12절입니다. 두 왕 앞에서 집단적인 예언을 합니다. 그 중에 지도자인 시드기야는 철로 뿔을 만들어 가지고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그 증거물로 철 뿔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선지자들도 다 같이 그렇게 말합니다.

 

13-14절입니다. 미가야를 부르러간 왕의 사신이 미가야에게 부탁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그들과 같은 말을 해서 왕에게 미움을 받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지 뭘 그리 혼자 잘난 체 까다롭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괜히 당신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 내시는 미가야를 생각해서 한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세상의 유혹이지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저 둥글둥글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부모의 가르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살아계심으로 맹세하건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만 말하겠다고 합니다.

 

어제가 5.18민주항쟁 30주년 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조국과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군인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일을 주도한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한국의 기독교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물론 이런 사실을 알리며 정부를 비판하다가 많은 목사들이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이라고 하는 교단과 대표적인 교회라는 곳의 목사들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조찬기도회에 가서 길한 일만 말했지 흉한 말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아합의 체제하에서 아합의 편을 들어주면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길한 일만 예언하여 주던 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15절을 봅니다. 왕이 미가야에게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갈지 말아야 할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미가야가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길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흉한 일만 예언하였는데 왜 길한 일을 예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제 너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네가 좋아하는 말을 해 주는 선지자들의 말을 지금까지 들어왔기에 이제 너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가야가 하는 말은 비꼬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합도 눈치를 채는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여야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을 말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미가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17절입니다.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주인이 없어졌으니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아합 왕이 죽게 되고 백성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것만 예언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19-23절입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천상회의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꾀어서 길르앗 라못에 가서 죽게 할 것인가 하였을 때에 한 영이 나아와서 자신이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방법은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심으로 지금 선지자들이 거짓말 하는 영에 의하여 그렇게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제일 화가 나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24-28절입니다.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말 하는 영이 들어온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자기들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확신도 믿을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미가야가 시드기야에게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날에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왕도 미가야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서는 자신이 평안히 돌아올 때 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미가야는 온 백성이 들으라고 하면서 왕이 참으로 평안하게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29-38절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가 압니다.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하러 갔지만 그래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어서 여호사밧에게만 왕복을 입게 하고 자신은 변장하여 전쟁에 임합니다. 아람 왕이 이상하게도 아합만 잡으라고 합니다. 여호사밧을 공격하다가 아합이 아닌 줄 알고 돌이킵니다. 그런데 어느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이 아합의 갑옷 솔기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싸우가다 결국 피를 흘리며 죽게 됩니다. 그 병거의 피를 개들이 핥음으로 나봇을 죽였을 때에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되었습니다(21:19).

 

오늘도 우리는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습니까? 기도 많이 하여 예언한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까? 그들이 길한 것만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흉한일도 예언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흉한 일을 말함으로 그 영혼을 사냥하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길흉화복으로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길흉화복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저주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온갖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있다면 그것은 복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하여도 예수님 밖에 있다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끝으로 요한복음 7:7절을 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미가야를 미워한 이유는 흉한 일만 예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들 중에 악하지 아니한 일도 있기에 취사선택할 수 있다고 하셨다면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행사가 악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흉한 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또한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길흉화복에서도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