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열왕기하 1:1-4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2010. 5. 26

 

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답답한 일을 당할 때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아하시야가 답답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첫째는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한 것입니다. 아합왕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모압이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었는데 아합이 죽고 그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된 때에 모압이 배반을 한 것입니다. 둘째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이 든 것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에그론의 신 바엘세붑에게 이 병이 나을 것인지 물어보라고 신하들을 보낸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릅니다. 너는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왕의 사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왕에게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그러면 아하시야가 회개하여야 할 텐데 오히려 그런 말을 전한 엘리야를 잡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군사력으로 선지자를 막고자 한 것은 여호와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왕이 되어서 행한 일이 어떤지 열왕기상 22:51-53절을 봅니다. “5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 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 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53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아합과 이세벨과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는 것은 바알을 섬겨 예배함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게 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배반한 아하시야에게 하나님은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모압의 배반입니다. 모압의 배반에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여호와를 배반한 일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나에게 배반하거나 좋지 않게 대하면 노발대발 하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왕이 다락 난간에서 떨어졌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사고입니다.

 

신명기 22:8절입니다.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지붕을 만들 때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난간이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난간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이미 여호와의 말씀은 사장된 채로 읽혀지지도 않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하시야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바알을 섬기고 있으니 다락 난간에서 떨어진 이유도 모르고 거저 자기 병이 나을 것인지 어떨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보낸 것입니다.

 

에그론은 블레셋의 한 도시입니다. 블레셋의 에그론에서 섬기는 바알의 이름이 바알세붑입니다. 바알도 지역마다 이름이 조금씩 다른데 이 에그론의 바알이 더 유명한 모양입니다. 바알의 뜻은 주인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발전되어 신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세붑이라는 신은 파리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파리나 해충을 막아주는 그런 신으로 봅니다. 이런 바알세붑의 이름이 조금 변형되어 예수님 당시에는 바알세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다고 한 것입니다.

 

모압이 배반을 하고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도 이미 여호와를 배반하고 바알을 섬기고 있기에 여호와께 돌이킬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하여 간 것입니다. 이때 엘리야가 나타나서 왕이 올라간 그 침상에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왕이 오십 부장과 오입인의 군인을 보내어 엘리야를 잡아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왕이 당신을 데리고 오라고 한다고 합니다. 잡아 가겠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엘리야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너희를 사를 것이라고 하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갈멜산에서 불이 내려온 것처럼 이제는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왕이 잘못 하였는데 왜 부하들이 죽는 것입니까? 아하시야의 치하에 있다는 것은 아하시야처럼 바알에게 복종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왕에게 잡아가려고 군사 50명을 데리고 가서 엘리사에게 내려오라고 한 것은 아하시야와 한 통속이 되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적한 것입니다. 첫 번째 오십 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다시 오십 부장과 오십 명의 군대를 보냅니다. 첫 번째와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세 번째 다시 보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오십 부장은 다르게 행동합니다. 앞의 두 오십 부장의 결말을 보아서 그렇게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만 엘리야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사람이여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하게 보아달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아하시야 왕이나 앞의 두 오십 부장과 전혀 다른 모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남겨진 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와 함께 내려가라고 합니다. 엘리야도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명을 받고 함께 내려가서 왕에게 말합니다.

 

16절을 봅니다. 아하시야 왕에게 말합니다. 네가 사자를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니 이스라엘의 그의 말을 물을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고 합니다. 이 말씀이 2절에서도 6절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말씀하시는 것은 왕을 엄중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을 책망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책망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우상에게 묻기 위하여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합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길한 말을 해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답답한 일을 만나면 어디에 물어보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물어보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물어보면 됩니다. 성경은 다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말씀을 외면하고 있으니 들리지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늘 답답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답을 말씀하고 있지만 그 답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 않고 바알에게 물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알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믿음과 소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5.18민주화 운동 30주년을 맞아 기독청년회가 김삼봉 교수를 초청하여 강의한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과제는 자본에 맞서는 것이다. 80년대 고문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면 2000년대는 낙오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게 고문의 공포보다 강도가 약한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불안해서 정치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공포는 스멀스멀 모두를 지배한다. 낙오의 공포는 자본의 폭력에서 비롯되었다. 국가 폭력과 자본 폭력은 같으면서 다르다. 국가 폭력은 주체가 바깥에 있는 반면 자본 폭력은 폭력의 주체가 바깥과 안에 동시에 있다.

 

마음속에 돈을 숭배하지 않으면 자본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본이 국가를 흔든다. 정치가들은 기업이 주는 돈으로 정치 자금을 쓴다. 국가의 비호를 받고 자본이 권력을 확대한다. 기업 대신 국가가 노동조합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라. 노동자가 기업에게 고소 고발을 당하면 개인 통장이 압류된다. 자본이 생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법이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위하면 나라가 망한다. 지금 그 길로 들어서고 있다. 삼성이 그러하다.

 

역사의 때는 도둑처럼 임한다. 그때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촌음을 아껴서 미래의 길을 예비하고, 지혜로운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과제로 싸울 필요는 없다. 각자의 부름에 대답해야 한다. 교회에게도 그게 교회냐고 물을 때가 온다. 그때 "보시옵소서. 이게 교회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불신자처럼 염려하지 마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나와라. 믿지 않아서 염려하고, 염려해서 죄에 빠진다. 자기를 염려하는 게 인본주의다. 진정한 신앙은 자기를 걱정하지 않고 세상만 걱정한다. 그러면 자기의 염려와 아픔은 크고 거룩한 손이 돌보아 준다.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일부를 인용하였습니다만 오늘 이 시대의 모습을 잘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묻습니까? 바알에게 묻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들은 대부분 바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들이지 않습니까? 집안의 일이든, 회사의 일이든, 국가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자본이면 해결된다는 것이 바알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묻기 위하여 나온 자들은 이런 대답을 듣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시면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여러 가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론부분이 3:19-21절입니다.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으려고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묻기 위하여 가까이 오면 그 행위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빛 앞에서 자신의 죄가 드러나기에 사람들이 나아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아오는 자들이 있는 것은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행한 일로서 예수님께 나아온 자들, 즉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자들은 그들의 신분과 환경과 직업에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사람 예수님께 질문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8-30절입니다. “봉독”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서 질문하기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것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알고 있는 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자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관원이 큰 부자라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님께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려고 왔다가 근심하며 돌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생보다는 우선 돈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로 오는 사람들이 무엇을 물어보기 위하여 오는 것입니까? 이 부자 관원은 영생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교회의 현실은 예수 믿으면 무엇을 주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바알이 준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몰려가서 물으려고 하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는 곳이 아니라 바알의 신전이 되어버린 곳입니다. 내 병이 고침을 받겠는지? 내 사업이 잘 될는지? 우리 자식이 잘 될는지? 서울의 큰 교회에서는 6.2선거에 나온 사람을 예배 중에 소개도 하고 기도도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가서 묻고 싶으십니까? 바알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십니까? 십자가 지신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에게 물으려고 가느냐는 책망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