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5:1~19    대조(對照)를 통한 책망      2014. 8. 27 

17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18 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1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설교의 유형 중에 가장 많은 설교가 모범적인 설교입니다. 모범(模範)적인 설교란 모범적으로 잘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좋은 본은 본받고 나쁜 본은 받지 말자는 설교입니다. 이런 식의 설교는 인물별로 하든지 주제별로 하든지 강해를 하든지 잘하는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을 본받지 말자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식의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아왔습니다. 초등학교는 바른 생활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실화를 들어서 나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은 본받아 살라고 합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였습니다. 교회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그런 예로 알맞은 본문으로 채택이 됩니다. 

만약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레갑 가문의 사람들이 그 조상들의 말을 잘 들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복을 받자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본문도 그렇게 보이고 성경 여러 곳에서도 그런 내용들이 많기 때문입니다(고전 10:1~12, 살전 1:7, 딤전 4:12, 밷전 5:3, 요삼 1:11). 이런 말씀을 보면 분명히 선한 것은 본받고 악한 것은 본받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런 식으로만 결론을 내린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 없게 됩니다. 성경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그 말씀을 성취 하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우리도 레갑 가문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여 복 받자고 한다면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선지자를 부지런히 보냈지만 순종하지 않았기에 멸망 받는다는 것을 레갑 자손과 대조(對照)하고 대비(對比)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자기 약속과 자기희생으로 구원하여 내시는지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 35:1절을 봅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바로 앞장인 34장은 시드기야 시대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전의 왕인 여호야김 때의 말씀을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역사의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지금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이유를 여호와께로부터 받아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35장은 제 1차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그 시기에 있었던 내용을 언급함으로 지금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지 않는지 레갑의 가문 사람들을 대비시키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먼저 레갑 가문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겠습니다. 레갑 사람들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속한 겐 족속 사람입니다(삿1:16, 대상 2:55). 이들은 처음부터 광야의 유목민들입니다. 이들 중의 상당수가 출애굽 당시부터 이스라엘에 편입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에 레갑 가문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유목민 생활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전쟁의 와중에 잠시 예루살렘으로 피난하여 들어와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들 중의 몇 사람을 성전으로 불러서 포도주를 마시게 해 보라고 합니다. 

35:2~11절입니다. “2 너는 레갑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 하시니라 3 이에 내가 하바시냐의 손자요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의 형제와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레갑 사람들을 데리고 4 여호와의 집에 이르러 익다랴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들였는데 그 방은 고관들의 방 곁이요 문을 지키는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의 방위더라 5 내가 레갑 사람들의 후손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6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7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8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9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10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 11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이 땅에 올라왔을 때에 우리가 말하기를 갈대아인의 군대와 수리아인의 군대를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자 하고 우리가 예루살렘에 살았노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레갑 가문의 사람들을 성전의 한 방으로 인도합니다. 성전에는 부속 건물로 된 방들이 많습니다. 그 방들 중에 하나로 데리고 가서 포도주와 잔을 놓고 마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명령하기를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하지 못하게 한 것을 말합니다. 그 내용들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라고 합니다. 개수로 말하면 다섯 가지입니다. 이런 내용은 철저하게 유목민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명령을 했을 까요? 단지 가문의 전통인 유목민으로 살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 대하여 보도록 합니다. 

성경에 레갑의 아들로 된 사람들의 이름이 세 명이 나옵니다. 여호나답(왕하 10:15, 23), 말기야(느 3:14),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답입니다. 느헤미야의 말기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문을 재건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호나답과 요나답인데 이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여호나답의 축약형이 요나답입니다. 그러면 요나답이 여호나답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레갑의 아들은 분명하기에 지금 예레미야가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였는데 자기들의 선조인 요나답이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였기에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선조인 요나답이든지 여호나답이든지 왜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요? 단지 유목민의 전통을 이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열왕기하 10:15~17잘입니다. “15 예후가 거기에서 떠나가다가 자기를 맞이하러 오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난지라 그의 안부를 묻고 그에게 이르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하니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르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16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17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에 남아 있는 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여기서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나옵니다. 예후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아 아합 가문을 심판합니다. 이 일에 여호나답이 예후와 함께합니다. 그리고 바알숭배자들을 다 모아서 그들을 처형하는 일에도 여호나답이 함께 합니다.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온통 우상숭배로 가득하였습니다. 가나안의 농경문화와 그들의 우상숭배를 본받은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에 그 심판의 도구로 쓰임을 받은 사람이 레갑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레갑의 아들로 인하여 주어진 명령은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하고서 내린 명령입니다. 가나안의 우상숭배에 물든 농경문화를 본받지 말고 철저하게 유목민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직접적인 명령도 아니고 다만 한 가문의 선조가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문의 전통을 수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본문 12~16절입니다. “12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가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15 내가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끊임없이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살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6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나 이 백성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12절을 봅니다. 그 때에 즉 레갑의 후손들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는 말을 할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그의 자손에게 명령한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한 것은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는데 내거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모든 종 선지자를 끊임없이 보내면서 이제는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라고 합니다.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 선조에게 준 땅에서 살리라고 하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레갑 족속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실물교재로 사용하셔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 심판의 내용이 본문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선지자를 통하여 부지런히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그들이 듣지 않음으로 결국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합니다. 아무리 책망을 하고 대조를 통하여 교훈을 주어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면 레갑족속은 어떻게 자기 조상들의 말을 잘 지켜내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직접적인 명령도 아니었는데 다만 레갑의 아들 중의 한 사람이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심판에 동참하며 목격하고서 후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유목민으로 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이때를 위하여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우리의 선행이나 법을 지킨 조건이 아니라 오직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레갑 족속의 아들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전통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아닙니다. 이방인 겐 족속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구원자의 역할을 이방인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례를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잘 지켰다고 하면서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앞에서 설 사람이란 여호와를 섬길 사람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섬길 사람이란 구약에서 제사장들과 임금들과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름부음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제사장도 임금도 선지자들도 다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방인으로 온 레갑의 아들 요나답을 말합니다. 

요나답이나 여호나답의 이름의 뜻이 같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라는 단어와 재촉하다, 강권하다, 자원하다, 추진하다, 기뻐하다, 헌신하다는 ‘나다브’와 합하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답’의 뜻을 풀어보면 여호와께서 추진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일을 여호와께서 스스로 헌신하여 추진하시는 일이 여호와 앞에 영영히 설 사람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들이 다 실패하여도 여호와의 약속은 신실하시기에 반드시 여호와 앞에서 영영히 설 자를 세우십니다. 그는 마치 이방인 겐 족속에게서 그 조상들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한 것처럼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하실 한 분을 세우시는 것이 여호와의 일하심입니다. 

히브리서 10:1~18절입니다. “봉독” 여호와 앞에 영원히 설분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레갑 족속의 이야기도 제사장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이 다 실패하여도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시기에 반드시 여호와 앞에 영원히 설 자를 보내시겠다는 그림자의 역할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수많은 이방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수많은 대조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주께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 합니다. 이러한 대조를 예수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38~42절입니다.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오늘날 우리는 무슨 표적을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표적이 없습니다. 무능하고 저주받아 죽은 십자가만이 표적임을 예수님은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여왕의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온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크신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창조하신 분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을 귀신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들에게 수많은 대조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대조란 반드시 성경의 진리로 세상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이 세상을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천지가 다 복음을 증거 하는 재료들입니다. 월요일 집중호우를 통하여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 말씀에 비추어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은 다 여호와의 진리를 증거하고 있는 재료들입니다. 

절대적인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세상을 대조하여 보면 이 세상이 전부다 상대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영원에 비추어 보면 이 세상은 잠시 잠간입니다. 살아있는 말씀으로 세상을 비추어 보면 세상은 죽은 세상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런 죽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날마다 죽음의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세상이 볼 때에 죽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 속에서 죽음과 대조되는 영원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4절입니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아멘!